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25화 (25/192)

#25

“같이 연습해도 돼요?”

“연습하는데 무슨 허락을 맡아요.”

호기롭게 말은 꺼냈지만, 막상 가람과 나란히 선 제 모습이 거울에 맺히자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긴장감에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는 것만 느껴져 솔은 연신 손을 쥐락 펴락 했다. 순서를 따져 보듯 작게 동작을 이어 나가던 가람이 가만히 서 있는 솔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냥 가만히 앉아나 있을걸.

은겸과 함께 연습할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거울 너머로 보이는 태오와 득용, 지호의 시선 때문일까. 솔은 축축해진 손바닥을 옷자락에 연신 문질렀다.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숨이 가빠지고 눈동자가 사방으로 튀었다. 거울 속에 새하얗게 질린 자신이 이리저리 곁눈질하는 모습이 제 눈에도 퍽 불안정하게 느껴졌지만, 그 상황을 인지하는 머리와 다르게 몸은 쉽사리 통제되지 않았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솔은 득용이 들고 온 책자를 같이 봐주던 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태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솔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침의 일도, 불과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던 연습실에서의 일도 있었기에 솔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태오의 모습에 더욱더 긴장했다. 그 어떤 모진 말을 들어도 절대 여기선 울지 않을 거라 속으로 되뇄다.

“모자는요?”

정작 솔에게 다가온 태오가 건넨 말은 생각지 못한 전혀 엉뚱한 말이었다.

“네?”

“아침에 씌워 준 내 모자요.”

“그쪽 가방에….”

솔은 손가락을 들어 태오의 가방 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태오는 솔이 올려 두었던 모자를 그대로 들고 와 다시금 그에게 건넸다. 태오가 모자를 건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솔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모자 쓰고 해요.”

“모자를요?”

솔이 멀뚱히 그가 건넨 모자를 바라만 보고 있자 태오는 아침처럼 씌워 주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너무 스스럼없이 행동하는가 싶어졌다. 인풋과 아웃풋이 칼같이 이루어져야 하는 태오의 성격상 늘 반쯤 얼이 빠져 있는 솔은 느려도 너무 느렸다.

의사 표현이 드물고 느긋한 가람도 처음에 이런 문제로 태오와 조금 말썽이 있었었다. 지금이야 세상 바지런하지만, 여전히 아침 기상 문제는 쉬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가람을 챙기던 습관 때문에 아침에도 그러했지만, 태오는 솔에게 자신이 너무 스스럼없이 다가선다고 느꼈다. 아차 하고 나면 이미 행동이 벌어지고 난 뒤였다. 그간 손이 많이 가는 사람들을 챙겨 온 결과였다.

아침에는 제멋대로 팍 모자를 씌워 줘 놓고 이제 와서 내외하듯 데면데면한 것도 웃기지만 지금부터라도 조심해야겠단 생각이었다. ‘주의해야지.’ 태오는 그렇게 속으로 읊조리며 재차 솔에게 모자를 건넸다. 그제야 솔이 모자를 받아 들자 태오는 설명을 덧붙였다.

“불안할 때 시야가 좁아지면 좀 나아요.”

“어…. 네. 어떻게 알았어요?”

“모르기엔 그쪽 시선 처리가 너무 불안정해서.”

“아…. 고마워요.”

“모자 눌러쓰고 시선은 최대한 아래로 둬요. 그러면 좀 나을 거예요.”

껄끄러워하는 솔의 내색에도 태오는 거침없이 이유를 알려 주었다. 단순히 태오가 사람들을 잘 관찰하고 신경 쓰기 때문이 아니라 솔은 그 티가 나도 너무 났다. 득용처럼 어지간히 둔한 종자가 아닌 이상 다들 금세 알아챌 정도였다.

“뭐야, 그런 거였어요? 태오 형?”

“너야말로 뭐야. 김득용.”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고 득용이 손에 들고 있던 책자를 내팽개치고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이 그 옆에 앉아 있던 지호의 무르팍에 떨어졌다.

“나는 여태까지 형들 모자 쓰는 거 되게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쫄려서 그런 거였냐고요.”

충격을 받은 듯, 심각한 표정을 짓길래 무슨 대단한 일인가 했더니 별것도 아니었다. 득용을 제외한 네 명의 표정이 딱 그렇게 막을 하고 있었다. 가람이 득용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방법도 있다, 이거지.”

“형들 맨날 모자 촥~ 눌러쓰고 나올 때. 나는 맨날 와, 우리 형들은 스타일링도 잘한다 이랬는데….”

“그래. 멋지게 봐 줘서 고맙다. 득용아. 남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거 원래 어려운 거예요. 자연스러운 거니까.”

“근데, 저 형 무용했다면서요. 그럼, 사람들 앞에서 발레 이런 거 하는 거 아닌가?”

태오는 득용에게 한숨 섞인 웃음을 지어 보이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을 맺기도 전에 우렁찬 득용의 목소리가 또다시 길을 가로막았다.

“득용아, 우리 오붓하게 둘이서 숙제하러 갈까?”

결국 그가 떨어뜨린 책을 잡고 방긋방긋 웃고 있던 지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득용이 아직도 문제집이 5페이지나 남았네.”

“여기서 해도 되는데요. 지호 형.”

“아니. 단둘이 오붓하게 하자. 형이 잘해 줄게.”

“그렇게까지…?”

“그럼. 우리 막내 성적이 바닥을 기어 다니는데. 큰형이 이 정도도 못 해 주겠니?”

“안 해 줘도 될 거 같은데요. 지호 형.”

“아니, 아니야. 득용아. 지금 꼭 해 주고 싶어.”

활짝 웃으며 부드럽게 말을 이어 나가는 지호였지만 그가 그럴수록 득용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악! 아파요. 혀엉!”

이어지는 득용의 거부에 결국 지호는 득용의 귀를 움켜잡고 좁은 보컬 트레이닝 룸으로 끌고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까지 계속해서 악악거리는 득용의 비명이 이어졌다.

열여덟 살이라더니 방학임에도 마냥 놀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이쪽의 삶을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만 해도 늘 학원에서 무용에만 열중이었었지 공부에는 사실 취미가 없었다. 생김새로 사람을 재단해선 안 되는 일이지만 사실 득용은 한눈에 보기에도 썩 공부에 취미가 있을 것 같게 생기지는 않았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평가였다.

눈치 없는 데다가 시끄럽기까지 한 막내를 맏형이 끌고 들어가자 동갑내기 셋만 자리에 남았다. 시끄러웠던 득용이 사라진 것에 조금 감사했던 것도 잠시. 그마저 사라지자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누구 하나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거울만 쳐다보고 서 있던 그때, 역시나 태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무 숙지 어느 정도 됐어요? 아는 데까지 대충이라도 맞춰 봐요.”

태오의 말에 가람까지 솔을 쳐다보았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부터 들어 솔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어제는 정말 목숨이 지척에 달려 제정신이 아니었었다. 오전에 은겸은 아주 특수한 케이스라고 치자. 그래도 뒤에서 자신을 쳐다보던 두 쌍의 눈이 사라져서인지 조금 덜 부담스러웠다. 솔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몇 시간 사이 귀에 푹 익어 버린 익숙한 노래를 가람이 재생시켰다.

막 달려 나가는 발걸음처럼 가벼운 기타 리프트와 그 아래에 무겁게 깔리는 낮은 베이스. 스피커에서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오자 솔은 태오의 조언대로 두 손으로 모자를 힘껏 끌어당겼다. 버킷 햇의 챙이 얼굴을 반쯤 가릴 정도로 푹 눌러쓰자 그 경계선에 걸쳐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보였다. 시야 가장자리가 어두워지니 그의 말대로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솔은 천천히 아주 작게 움직였다. 다소 성의 없어 보일 수 있었지만 당장엔 그게 최선이었다. 손목을 까딱까딱하며 건성으로 움직이는 듯했지만 그래도 안무의 순서와 대략적인 동작은 맞아떨어졌다.

옆자리의 가람과 태오 둘 다 솔에게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각자 제 할 일이 제일 중요하다는 듯, 오롯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확인하기 여념이 없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시야를 더욱 가린 솔은 그것이 두 사람의 배려라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일부러 솔을 쳐다보지 않는 것이다.

동작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두 사람과 달리 그 가운데서 설레설레 움직이는 솔에게 시선이 안 가려야 안 갈 수가 없었다.

땅에 발이 붙은 듯, 두 사람이 성큼성큼 움직일 때도 솔은 그 자리에서 한 발짝 내에서만 움직였다. 정말 모자 때문일까 아니면 애써 솔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두 사람의 배려 덕분일까, 솔의 움직임도 점점 그 모양새를 갖춰 갔다. 구부정했던 팔이 점점 시원스럽게 쭉쭉 뻗고 아이솔레이션도 좀 더 자연스러워졌다. 솔은 거울 속 자신을 보지 않고 달달 외워 두었던 머릿속 안무만을 되새김하며 가람과 태오에게 동작을 맞춰 나갔다.

‘이 정도면, 이 정도라면 할 만하겠다.’라고 안도의 숨을 쓸어내린 것도 잠시, 보컬 룸이 열리고 지호가 튀어나오자 솔의 몸이 눈에 띄게 빳빳하게 굳었다. 그러고는 새하얗게 질려 다음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허우적거리며 그 자리에 멈춰 서자 박자와 다음 동작을 알리는 태오의 구령이 솔의 귀를 때렸다.

“하나, 둘, 턴! 다시 왼쪽부터 반복.”

태오의 구령에 솔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얼결에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가고 새하얗게 날아갔던 정신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도 껴야지.”

“아, 아직 점심시간이라고요. 혀엉.”

“여기서 어깨, 시선 고정하고. 오른발, 오른발.”

그 소리에 지호가 대열에 합류하자 후다닥 튀어나온 득용까지 끼어들었다. 솔이 당황해 다시 허우적거리기 전에 또다시 태오의 구령이 이어졌다. 그가 카운트를 하며 동작을 하나하나 집을 때마다 몸에 조금 익어 버린 동작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얼떨결에 대열의 중앙에 서 버린 솔은 자신도 모르게 멤버들과 합을 맞추고 있었다.

어영부영 한 곡을 끝내 버렸다. 그토록 뜸을 들이고 걱정했던 게 허망할 정도로. 통증도 이제는 제법 이를 악물고 참을 만했다. 통증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집중하다 보면 얼굴을 살짝 찌푸리는 정도로 참고 넘어갈 수 있었다. 물론 다른 네 사람에 비하면 형편없이 헐렁한 동작이었다. 네 사람과 함께 서 있었다는 것 자체로 희망이 보였다.

[특성 ‘비운의 천재 무용수’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데이블락 - 핫 트릭 안무 숙련도 25%]

[현재 피로도 35/100]

태오의 말대로 모자는 꽤 큰 효과가 있었다. 가람이 음악을 끄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자 솔도 모자를 슬쩍 벗었다. 어둑했던 시야가 밝아지며 눈앞에 알림 창이 떠올랐다. 안무 숙련도와 피로도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특성 ‘비운의 천재 무용수’도 활성화 상태였다.

사실 이 거지 같은 특성이 있는 한, 동작 하나하나가 솔에겐 쉬울 수가 없었다. 긴장감에 땀을 두 배나 흘린 솔의 머리는 방금 샤워를 한 듯,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모자를 벗고 땀에 젖은 머리를 손으로 마구 쓸어 넘기자 득용이 “어!!” 하는 큰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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