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노래는 아직이네. 혼자 있으면서 왜 이렇게 떨어. 누가 보면 오디션 보는 줄 알겠어.”
말을 거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솔은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까 제대로 얘기 못 한 거 같아서 찾아왔어. 잘 지냈는지도 못 물어봤네.”
주환이 아니란 걸 알지만 친근하게 잘 지냈냐고 물으며 슬쩍 연습실로 들어오는 모양이 그와 겹쳐 보였다. 솔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여 은겸의 인사에 긍정을 표했다.
“잘 지내려고 하고 있어요.”
“그건 좀 어때?”
“어떤 거요…. 아, 조금씩 좋아지고 있어요. 모자 쓰면 조금 덜해요.”
“아, 모자! 그거 알려 준 거 태오지?”
“어떻게 알았어요?”
“태오가 한참 24시간 모자만 쓰고 다니던 때가 있었지.”
솔이 옆에 놓인 모자를 흔들어 보이자 은겸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 그는 익히 알고 있다는 듯, 그럴 줄 알았다며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크게 웃었다. 은겸의 반응에 솔은 역시나 태오에게도 그런 시간이 존재했구나 하며 납득했다. 어느새 은근슬쩍 연습실에 들어와 솔의 옆에 앉은 은겸은 툭, 하고 솔의 어깨를 두들겼다.
“잘 지내는 거 같아서 다행이야. 저번보다 얼굴이 좋아졌어. 물론 마빡에 멍 빼고.”
얼마나 오래 못 봤다고, 고작 며칠이었지만 사실 나아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긴 했다. 이전과 달리 멤버들, 특히나 태오 덕분에 제시간에 자고 일찍 일어났으며 아침, 점심, 저녁 끼니까지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거기에 적당히 어느 정도 피로감이 덜한 대인 관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고 운동이라기엔 다소 격했지만, 몸도 움직이고 있었다.
폐인처럼 살던 때에 비하면 자연히 좋아질 수밖에 없는 생활 방식이었다. 거기에 말끔하게 머리까지 정돈해 묶으니 조금 싹이 보였다. 물론 솔은 아직도 저 자신이 음침하고 보기 싫다 여기지만.
“그래요?”
“응. 근데 그거랑 별개로 발성 연습 좀 열심히 해야겠던데.”
“아, 맞아요.
“이번에는 뭐가 문제인지 말해 보세요. 친구.”
옆에서 은겸이 계속 무어라 말을 했는데 잠시 정신이 다른 곳으로 흘러갔던 솔은 맹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조금은 영혼이 없어 보였을까, 은겸이 팔꿈치로 솔의 팔을 툭 쳤다.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솔은 은겸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친구로서 서비스.”
솔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은겸이 어깨를 으쓱이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어조가 장난스럽고 스스럼없이 친밀했다.
“긴장하니까 소리가 말리고 호흡이 짧아져서 그렇대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많이 안 해 봤거나, 무대에서 긴장하는 사람들이 달고 다니는 문제지.”
보컬 트레이너와 지호가 귀에 딱지가 지도록 한 말이었다. 긴장을 풀고 소리를 크게 내라 하지만 춤도 이제야 겨우 윤곽을 보여 주는 솔이었다.
춤처럼 큰 페널티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타인 앞에서 노래를 불러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어느 날 가수를 하라고 하니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제가 노래를 좀 한다고 자신 있어 하던 게 아니어서 더더욱이었다. 힘차게 시작했다가도 금세 개미 기어가는 소리만큼 소리가 작아졌다.
“이건 모자로 안 될까요?”
솔이 손에 든 모자를 다시 한번 흔들어 보였다.
“데뷔도 모자 쓰고 할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네요. 하하……”
은겸의 말이 맞다. 뭐 모자 쓰고 할 수야 있겠지만 적어도 카메라에 얼굴은 나와야 할 것이다. 솔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금은 다른 것보다 곧 있을 주말 평가에 집중해야 했다. 그래야 태오를, 다른 멤버들을 절망케 하지 않을 테니까.
사실 퀘스트는 솔에게 보컬 평가까지 바라지 않았다. 숙련도도 안무만 체크되고 있었고 솔직히 현재로선 안무를 제대로 소화하는 것도 버거웠다. 무엇보다도 실제 평가에선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자신도 알 수 없었고. 단순히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라면 안무에만 매달리는 것이 안전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구색은 맞춰야 하지 않은가. 그래서 선택한 게 이렇게 따로 시간을 내어 보컬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하나가 익숙해져 간다고 했더니 다른 게 또 문제예요. 저는 문제가 너무 많아요.”
“잘 지내는 거 같다고 했더니 우울 모드네.”
“문제가 많은데, 그래도 갑자기 잘해 보고 싶어졌어요.”
“그거. 다행이네.”
솔은 혼자 자조하며 덤덤히 말을 이어 나갔는데, 은겸은 그런 솔이 차분하면서도 조금 울적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은겸은 커다란 강아지처럼 해맑게 웃으며 솔의 어깨를 툭툭 제 어깨로 건드리며 힘이 될 만한 말을 내뱉었다.
“무슨 사정이든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의욕이 있고 목표가 있다는 건 좋은 거잖아.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생기는 거니까…. 가만히 손 놓고 있는 거보다야 뭐든 좋지.”
“네. 그 힘이 조금 생긴 거 같아요.”
“그럼 노래 연습부터 하자.”
“그렇게 별로였어요?”
“일단 목소리에 힘도 너무 없고….”
은겸은 슬쩍 솔의 눈치를 살폈다. 솔은 살짝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찬찬히 끄덕였다. 별로 기분 나빠하는 내색은 아니었다.
“그래도 목소리는 좋아…. 음색 자체가 차분하고 깔끔해서 좋은데…. 일단 기본 발성부터 다잡아야 할 거 같아. 발성 연습 계속하고 있지?”
“하고는 있는데, 당장 모레가 평가예요.”
“어쩔 수 없어. 첫 평가에서 실력으로 점수 따기보단 좋은 인상이라도 남겨.”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솔의 입장에선 은겸이 하는 이야기가 당연했다. 오히려 후한 평가였다. 태오도 얼추 비슷한 평가를 했었다. 당장에야 평가니, 전곡을 듣는 것이지 활동은 각자 파트를 분배해 진행하니 한결 수월할 거란 조언도 잊지 않았다. 물론 최종적으론 보컬도 어느 정도 수준에 다다라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잘해 보고 싶어졌더니 마음이 조급해졌어요.”
단숨에 모든 것이 좋아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욕심이 생긴 것이다. 솔이 어깨를 움츠리며 살짝 미소 지었다. 은겸은 웃는 솔과 눈을 마주했다. 분명 실내의, 그것도 늦은 저녁 지하실에 갇혀 있는데도 어디선가 봄날의 훈풍이 불어오는 듯했다. 썩 마냥 밝지만은 않은 미소였는데도 어쩐지 은겸은 그의 그런 웃음과 마주하자 배시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은겸이 잠깐 연습을 도와주고 마지막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떠난 지 1시간쯤 지났을까. 다시금 혼자가 된 솔은 목이 따끔해질 정도로 연습을 했다. ‘큼큼’ 헛기침을 해 보니 목이 살짝 쓰라렸다.
솔은 조금 전부터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태오를 조금 기다렸으나, 그도 영호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 이상 연습하는 건 실력보다 다음 날 컨디션에 영향을 줄 것 같아 솔은 이쯤 연습을 끝마치려 했다. 손에 쥔 핸드폰엔 조금 전까지 그의 열띤 연습의 영상이 기록되어 있었다. 태오나 다른 친구들을 보아 하니 춤을 추거나 노래하거나 항상 자기 모습을 녹화, 녹음하여 재차 확인하는 걸 보고 따라 한 것이었다.
막상 녹음된 노랫소리가 은겸의 지적대로 맥없고 달달 떨려 민망해 일부는 진작에 지워 버렸다. 연습실에서 핸드폰을 쥐고 앉아 있으니 묘했다. 주머니엔 또 다른, 본래 늘 쓰던 공기계가 들어 있었다. 졸지에 무슨 인기인이 되겠다고 핸드폰을 두 개나 들고 다니는지. 어차피 두 핸드폰 모두 울릴 일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슬슬 뒷정리하고 들어가 보려 몸을 들썩이던 찰나, 솔의 손에 쥐어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꼭 조금 전 울릴 일 없는 전화를 두 개 다 들고 다닌다 비웃던 스스로를 놀리는 듯했다. 잠시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솔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의 주인은 가람이었다. 그러잖아도 사실 그렇게 당부받았지만, 막상 연락하자니 불편해 혼자 돌아갈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여보세요?”
[저 가람이예요. 아직도 연습해요?]
“이제 정리하고 가려던 참이었어요.”
[득용이랑 잠깐 운동 나와서, 그쪽으로 갈게요.]
“아, 네, 고마워요.”
가람과 전화를 끊은 솔은 연습실 한편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이미 12시가 넘어 1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 시간에 운동이라니.
[현재 피로도 63/100]
아슬아슬한 피로도를 확인한 솔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평소 그의 페이스대로 느긋하고 설렁설렁 정리하고 회사를 나서니 입구에 검은색 트랙 팬츠 위에 패딩을 걸친 두 사람이 솔을 기다리고 있었다. 합류한 세 사람은 천천히 숙소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시간에 운동을 해요? 온종일 연습하고 힘들잖아요.”
“형처럼 마른 태생들은 내 고통을 몰라요.”
“혼자 내보내기 그래서 따라 나왔어요. 겸사겸사.”
솔의 물음에 득용이 눈을 흘기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바싹 마르다 못해 힘없어 보이는 솔은 구태여 무용이 아니더라도 살이 찌는 체질이 아니었다.
“운동도 조심히 해야 해요. 조금만 하면 금세 근육이 붙어 버려서 우락부락해지고 좀 먹으면 그 근육 위에 지방 껴서 근돼 된다고요.”
“주말 평가 할 때 분명 몸무게 얘기 나올 테니까 발등에 불 떨어져서 이러는 거예요.”
“근데, 형 생각보다 오래 연습했네요.”
“아…. 하다 보니까 좀. 그렇게 됐어요.”
“오. 근데 그, 형은 좀 살살 해요.”
“네?”
“보니까 형 체력 완전 구리던데. 그러다가 괜히 다치거나 아프면 신경 쓰이니까. 살살 해요.”
늘 우렁찬 득용의 목소리가 조금 기어들어 갔다. 멋쩍은 듯, 코끝을 괜히 손으로 잡아당기는 득용을 보며 솔은 고개를 기울였다. 가람을 사이에 두고 마주친 득용의 얼굴은 어두운 가운데에서도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걱정…해 주는 거죠? 고마워요.”
“그리고 말도 편하게 해요. 제가 제일 어리잖아요. 저한테까지 형이 존댓말 하면 영호 형이나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걸요. 괴롭히거나 텃세 부린다고.”
“그러긴 했잖아.”
“아니! 처음엔 이 형이 어떤지 몰랐으니까 좀 거리를 둔 거지!”
득용의 말을 잠잠히 듣고 있던 가람이 불쑥 말을 툭 던졌다. 그의 말에 득용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주먹을 움켜쥐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게 텃세야. 김득용.”
“아, 가람 형은 꼭 자기는 안 그런 것처럼 그래!”
“그랬지. …미안해요.”
“어어…. 괜찮아요. 상황 이해하고 저도 그때 좀 태도가 그랬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