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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38화 (38/192)

#38

태오의 눈빛은 명백한 의심의 눈초리였다. 태오의 말과 표정, 태도에서 무언가를 느낀 솔은 재빨리 특유의 어색한 웃음으로 자신을 포장했다. 익숙한 일이었다. 지난 몇 년을 이렇게 살아와 별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솔과 달리 성솔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태오는 의심의 눈초리를 쉬이 거두지 않았다.

“혹시 기억 안 나요? 일어나요. 영호 형한테 전화할게요. 병원부터 가 봐요.”

“아니. 아니에요. 자다 일어나서 착각했어요. 꿈인 줄 알았어요.”

“…….”

“진짜예요. 주말 평가 하러 가는 꿈 꿔서….”

그가 매니저인 영호에게 전화를 하려 핸드폰을 꺼내자 솔은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그를 만류했다. 세상 무뚝뚝하게 생겨서 이런 데선 예민하고 기민한 태오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너무도 일상적인 대화와 반응이라 솔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제가 처한 상황이 짐작이 갔다. 무거운 머리와 잠에서 덜 깬 듯 흐리멍덩한 정신이 명백하게 알려 주었지만 솔은 그래도 명확하게 하고 싶어 속으로 ‘상태 창’을 되뇄다.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 떠오른 상태 창엔 낯선 한 줄이 추가되어 있었다.

[특성 ‘머릿속의 지우개’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시스템 창에 수치가 표기되는 것이 나름 자신의 발전을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마주하니 또 확인 사살이 따로 없었다. 솔은 눈살을 찌푸렸다. 구태여 이렇게 확실히 해 주지 않아도 이미 몽롱한 정신이 답을 주었는데 괜한 짓을 해 기분만 더 나빠졌다.

나사가 하나 빠진 탓인지 오전의 일과가 정신없이 휘몰아쳤다. 의지 없는 인형이 된 것처럼 멤버들의 손에 붙들려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고 넋을 놓고 있다 잠깐 보러 온 매니저에게 지적당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점심 식사 시간이었다.

득용과 가람이 쏟아 내는 걱정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고 전혀 와닿지 않았다. 대충 입으로 숟가락을 가져다 넣으며 ‘형 또 쓰러지는 거 아니죠?’ 하며 묻는 득용의 말에 대충 대답하며 속으로 ‘어제 쓰러졌었구나.’ 생각하는 게 고작이었다.

지난 며칠이 지나치게 의욕적이고 성실했던 터라 오늘의 모습과 그 대비가 명확했지만 정작 솔은 기억하지 못하는 어제의 일이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지호가 몇 번이고 묻고 싶은 것이 있는 듯, 말을 걸었지만 어딘지 정신이 나가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솔아!”

넋이 나간 솔은 누군가가 제 어깨를 건들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식사를 끝내고 연습실로 돌아가던 중 은겸과 딱 마주친 것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괜찮아? 어제 대체 뭐야.”

“어제요?”

“쓰러졌었다며. 입구에서 너 실려 가는 거 보고 깜짝 놀랐어.”

“아, 어제 저 쓰러졌던 거요? 그렇게 됐어요.”

또다시 잠시 정신을 놓은 덕에 반응이 한 박자 느렸다. 걱정스러운 은겸의 얼굴 뒤로 미심쩍어하는 지호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세요!”

“그래.”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처럼 솔의 어깨를 붙잡고 안부를 묻는 은겸은 정작 태오를 비롯한 다른 멤버들의 인사에는 덤덤했다. 솔이 은겸과 멤버들의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땐, 분명 꽤 오래 같이 연습생 생활하며 제법 친밀한 사이처럼 이야기했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모두의 반응이 지나치게 덤덤했다.

“걱정했어. 어젠 팬들이 몰려 있어서 내가 괜히 따라 움직이면 더 피곤해질 것 같아서 나중에 실장님한테 이야기만 전해 들었어. 평가받다가 쓰러졌다며.”

“네. 그렇게 됐더라고요.”

“뭐야. 남 일 말하듯이…. 열심히 하겠다고 그렇게 말하더니 너무 무리했구나? 그래도 평은 괜찮았나 보던데, 대표님이 기대된다고 그러시더라. 잘했어.”

“정말요? 쓰러졌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자신이 쓰러졌다는 사실에 기억이 없는 탓에 전혀 몰입하지 못한 솔은 남의 일을 전하듯 대답했다. 그런 솔의 모습이 부끄럽고 괜한 걱정을 끼치기 싫어 그런다고 오해한 은겸은 보드라운 강아지마냥 웃으며 솔의 어깨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은겸의 그 행동이 솔로 하여금 주환을 떠올리게 했다. 주환이 이따금 종종 하던 버릇이었다. 비슷한 부분이 분명 있었지만 은겸은 확실히 주환이 아니라는 게 인지가 되었다. ‘대표님.’ 다들 백의찬 대표에 대해 이야기했다. 솔에게 대표님이 거는 기대가 크며 눈앞에서 쓰러진 자신을 퍽 걱정한다고. 하지만 정작 솔의 기억에 백의찬 대표는 존재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애써 떠올려 보려 했지만 될 리가 없었다. 솔은 검게 빈 백의찬 대표의 얼굴을 떠올리며 은겸과 마주 보며 웃었다. 아마도 제 기억을 통째로 날려 버린 원인이 백의찬 대표인 듯했다. 필시 조금도 의찬과 닮은 구석을 찾지 못해 실망했겠지. 거기다 평가라는 상황이 압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기억은 없지만 하도 주변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니 그런 일을 겪었던 것 같은 그런 모호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썩 좋지 못한 소리까지 들었다면 충분히 잊고 싶을 만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은겸이나 다른 멤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들 응원과 칭찬이었다. 쓰러졌다니 안타까워 그러는 거겠지 싶었는데…. 그것이 전부인 건 아닌 듯했다. 솔은 제 어깨를 두드리는 은겸과 마주 보며 웃었다.

“선배님. 저희가 바로 레슨이 있어서요.”

은겸을 보고 있자니 조금 편안한 마음이 되어 솔도 어색한 표정들을 지우고 한결 편안하게 웃었다. 서로 얼굴을 보며 의미 없이 웃고 있는데 불쑥, 태오가 끼어들었다. 친한 사이같이 느껴졌었는데, 연습생들이 드나드는 연습실 앞이라서일까?

마주 보고 있는 은겸을 향한 태오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꽤 차가웠다. 오래 연습생 생활을 같이해 온 것치곤 태오의 반응이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딱딱했다. 그런 태오의 태도가 눈치 주는 것으로 느껴졌는지 은겸도 솔을 쓰다듬던 두 손을 떼어 내고 태오를 바라보았다.

“아, 미안. 내가 괜히 붙잡았네. 나중에 이야기하자. 솔아.”

“네. 나중에 봬요.”

”태오야. 솔이 너무 뭐라 하지 말고 잘 좀 대해 줘…. 그리고 지호 너도. 힘든 애 괜히 괴롭히지 마라.”

“괴롭힌 적 없어요. 그리고 저희 팀인데 당연히 잘 대하고 있습니다. 선배님.”

“그렇지. 네가 리더라며. 너라면 그렇지…. 근데 지호는 대답이 없네?”

“……”

분위기가 아주 미묘했다. 얼빠져 있는 솔도 오래된 마룻바닥처럼 삐걱대는 감정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득용은 뚱한 표정으로 아무런 말이 없었고 가람은 오늘 종일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이 날카로웠다.

이상한 긴장감에 솔이 슬쩍 눈치를 살피자 은겸이 먼저 웃으며 태오의 어깨를 두들겼다. 꽤 친밀한 동작이었는데 전혀 친밀함이 느껴지지 않아 아이러니했다. 그의 터치가 태오는 오히려 기분이 나쁜 듯, 그의 손이 닿았던 어깨를 툭 털어 냈다. 그러자 은겸이 물러서 그의 등 뒤에서 솔을 바라보는 지호를 구태여 언급했다. 지호가 끝까지 대답하지 않자 은겸은 고개를 돌려 지호를 빤히 응시했다. 솔이 보기엔 세 사람이 신경전을 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잘 좀 챙겨 줘.”

“말씀 안 하셔도 잘 챙길 겁니다.”

“그래. 나중에 보자 솔아.”

“네.”

한동안 계속되던 미묘한 대치는 은겸이 다시금 솔에게 시선을 두고 활짝 웃으며 마무리되었다. 만날 때처럼 친근하게 솔의 등을 쓰다듬으며 은겸은 인사를 고했다.

“솔아, 둘이 많이 친해?”

“많이?”

“응. 전부터 알던 사이야?”

“아뇨, 여기 들어와서 알게 됐는데요…. 지호 형? 그냥 여러모로 도움받고 그러다 보니까 알게 됐어요.”

“그래…. 너 근데. …아니다.”

“왜요?”

“너, 지금 진짜 괜찮은 거지?”

“네.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왜 존댓말을 하고 그래. 말 놓기로 했잖아.”

“어…. 하하. 어색해서….”

지호의 말이 사실인지 떠본 것인지 알 수 없는 솔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어물쩍 넘어갔다.

“너 혹시…?”

“…혹시?”

“아니, 아니다. 됐어.”

그가 사라지자 한 발짝 떨어져 있던 지호가 표정을 풀고 솔에게로 다가왔다. 온종일 묻고 싶은 것이 있는 것처럼 주위를 맴돌며 말을 걸다 말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왜들 이렇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거지. 그렇게 이상해 보이나?”

반나절, 아침에 눈 떠서 지금까지 괜찮냐는 말만 수십 번을 들은 것 같았다. 조금 짜증이 났다. 변명을 하는 것도 꽤나 감정 소모가 큰일이었다. 솔이 눈썹을 치켜뜨며 조금 날카롭게 묻자 지호와 솔의 사이에 태오가 끼어들었다.

“…꼭 남 일처럼 이야기하니까요. 쓰러진 건 본인인데 다른 사람들 걱정에 자기 일이 아닌 것같이 대답하잖아요. 지금.”

“내가요?”

“네. 보통 쓰러진 거 괜찮냐고 묻는 말에 그렇게 됐다고 대답하진 않죠.”

“아무래도 병원에 다시 가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솔?”

솔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자 반나절 동안 조용하던 가람이 결국 입을 열었다.

“진짜 괜찮아. 괜찮다니까요.”

“그냥. 다들 걱정해서 그러는 거야. 오늘 네가 좀….”

“멍하고 이상하게 굴어서?”

“응. 대답하는 것도 다 설렁설렁 하고 오전 연습에서도 집중 못 했잖아. 다들 네가 건강이 안 좋은데 무리하고 있는 걸까 걱정하는 거야.”

“괜찮아. 진짜 괜찮아요. 그냥 아직 제 컨디션 같지 않아서 그런 거뿐이에요. 아무래도 어제 쓰러졌잖아요.”

그냥 내버려 두면 다 해결되는 일인데. 왜들 이리 관심이 많은 건지. 그런 생각에 솔은 피식 비웃듯이 웃음 지었다. 잘 지내고 싶었는데, 잘 지내 보고 싶었는데 그러다가도 이렇게 삐딱선을 탄다. 모두 다 자신을 과보호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최근 들어 사이가 꽤 좋아지긴 했지만 한 번 쓰러진 거로 이렇게까지 호들갑 떨 만한 사이는 아니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불편한 것이었다. 과하게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

“그럼 영호 형한테 말하고 오늘은 쉬어요.”

“그러긴 싫어요. 또 다음 평가 준비해야 하잖아요. 이번엔 보컬도…,”

태오의 말에 결국 솔은 더는 짜증을 숨기지 못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 솔의 몸짓과 목소리에 덤덤하던 태오도 조금 감정이 일었는지 어조가 한층 강해졌다.

”몸도 안 좋은데 조급하게 할 필요 없다고요. 쉬어야 할 때는 쉬어야 해요. 그런 식으로 방치했다가 더 큰 사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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