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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 (64)화 (64/192)

#64

은겸은 여전히 시선을 창밖에 둔 채였다. 본래 사람에겐 거리감이라는 게 필요한 법이었다. 설령 그게 가족이라 해도 일정한 거리를 넘어서면 그다음부터 관계가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에 기울기 마련이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루카나 가람처럼 한쪽으로 기울거나 한쪽을 휘두르고 싶게 되어 버리기 쉬웠다.

그 중간에서 저울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 건 그 어떤 변명을 해도 자신의 책임이었다. 은겸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솔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무리에 녹아들려 열심이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어차피 퍼질 대로 다 퍼진 거, 그냥 공개로 돌리는 건요? 솔이라는 애…. 걔 좋던데요, 저는.”

“그래? 그치? 이쁘지?”

은겸이 일부러 솔의 이름을 부르자 남자는 눈에 띄게 반색하며 되물었다. 그의 물음에 평소라면 그저 웃고 말았을 텐데 이번에는 은겸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은겸은 창밖의 풍경에서 눈을 뗐다.

“네. 이참에 그냥 이곳저곳 얼굴 비치고 활동 좀 시키시는 건 어때요?”

차라리 잘됐다 싶어 은겸은 슬쩍 운을 떼 보았다. 한 번 엎어졌던 그룹이 두 번 엎어지지 못할까, 하물며 태오네는 이미 여러 번 전적이 있었다. 물론 거기에 자신도 어느 정도 지분이 있었지만. 은겸은 순한 강아지처럼 웃으며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또 엎으시려는 거 아니죠? 태오, 이젠 진짜 데뷔시켜 주셔야죠.”

“나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래? 대표님 속뜻을 어떻게 알겠냐.”

“제 솔로 컨셉에 솔이라는 친구 마스크가 잘 맞거든요. 뮤비에 살짝 얼굴 밀어 넣고 미리 눈도장 찍어 두면 좋잖아요. 어차피 유출될 대로 다 됐는데.”

“네가 웬일이냐? 정말 도와주려고?”

“그럼요. 제가 이제 선배인데.”

“전에 내가 태오 얼굴 좀 비치게 해 달라고 했을 땐 그렇게 질색했으면서.”

공놀이하자 조르는 강아지 같은 얼굴로 태오를 들먹였던 은겸은 상대의 말에 정색했다. 하지만 이내, 상대가 눈치채기도 전에 예의 그 서글서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다시 포장되었다.

은겸은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정말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했다는 듯이 굴었다. 어차피 상대도 썩 은겸의 말을 믿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괜한 말이 도는 건 사양이었다. 순진한 척, 착해 빠진 척 은겸이 난감한 척을 했다.

이 바닥은 서로 쉼 없이 경쟁하게 만든다. 발을 들인 순간부터 연습생들은 연습생들끼리, 데뷔하고 나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경쟁이라고 말하고 가르쳐 놓고, 아쉽고 필요할 때만 온정과 의리, 가족 이런 걸 찾고는 한다. 태오의 사정이 안타까운 거야 익히 안다. 그 때문에 자신의 그룹에서 나가게 되었으니까.

당시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은겸은 치열한 경쟁에 태오라는 리스크를 안고 데뷔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제대로 활동도 하지 못하고 수시로 벌어지는 응급한 상황에 자리를 비워야 하는 멤버? 가람도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팬과 분쟁을 일으킨 멤버.

이제 막 데뷔한 그룹에겐 다 같이 침몰하기 딱 맞은 조건이었다. 당시 은겸이 한 일이라곤 어른들에게 솔직한 제 생각을 말했을 뿐이다. 결정은 어른들의 사정에 의해, 어른들의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그 후로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당연했다. 이 싸움에서 이기려고 쉼 없이 달려왔으니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 것이 정당했다. 은겸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회사에선 매번 은겸에게 태오를 밀어주는 게 어떠냐는 제안했다.

사실 별것 없었다. 쇼케이스나 콘서트에 짧게나마 얼굴을 비쳐 주고 라디오나 예능 같은 곳에 나갔을 때, 친한 척 언급해 주고 은근한 관심을 유도하는 일이었다. 딱히 어려운 것도 아니었지만 은겸은 늘 거부의 의사를 표했다. 같이 데뷔하려 했던 멤버라 온정에? 사정이 안타까우니까? 같은 회사 밥을 먹는 동생이니까?

어차피 데뷔하고 나면 한 차트에서 숫자를 두고 싸워야 했다. 예전 같았다면 이런 말을 절대로 은겸이 먼저 꺼내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때는 ‘태은겸’ 앨범이 아니라 ‘데이블락’이었잖아요. 팀 작업물인데 제가 어떻게 함부로 밀어붙여요.”

“지금은 밀어붙여 줄 거고?”

“저 이제 의견 정도는 어필해도 되는 급 아니에요?”

남성의 은근한 떠보기에 은겸은 고개를 기울이며 웃어 보였다. 순해 보이는 얼굴 안에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었다. 웃으며 대화하고 농담하듯 편하게 굴고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작은 신경전 같은 것이 감돌았다.

“아니긴, 네가 우리 회사 간판인데. 네가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너도 태오랑 같이 고생했었잖아. 짠내 난다 애들. 이젠 진짜 카메라 마사지 좀 시켜 줘야지.”

지난 5년간 미친 듯이 일했다. 지방 어디든 무슨 일이건 가리지 않았고 망가지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요즘 들어 풀어 주긴 했지만, 그 와중에 골칫덩어리 같은 멤버들을 단속하고 조율해 이만큼 회사에 이바지했다, 그 정도의 발언할 자격은 차고도 넘쳤다. 그리고 실제로 YC의 간판인 은겸의 말은 제법 잘 먹혔다.

“솔이 걔는 아직 프로필 사진도 없죠?”

“걔는 샵부터 보내야지. 머리 봐라. 애들 샵 좀 보내고 날 잡아서 프로필 사진 싹 업데이트하고, 네 말대로 뭐라도 시켜 봐야지 않겠냐? 그래도 태오가….”

일부러 솔의 이름을 꺼냈는데, 다시금 태오의 이야기로 돌아가려 하는 남자의 속내가 훤히 보여 은겸은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하지만 내용에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확실히 그 잘난 외모를 다 가리는 머리부터 처리해야 할 필요는 있었다.

“잘됐네요. 저 김윤희 작가님이랑 일정 잡혀 있잖아요. 솔이 정도 마스크면 혹하실걸요.”

“에이, 그런 건 조심해야 해. 은겸아, 네가 아무리 작가님이랑 친해도… 괜히 작가님하고 틀어져. 그냥 다 같이 사내에서 처리하면 돼.”

“일단 이따가 대표님 오시기로 했는데, 한번 말씀드려 보고요.”

“고맙다. 그렇지 않아도 매니저가 언제까지 애들 놀릴 거냐고 맨날 눈도장 찍고 있었어.”

“이번에는 진짜 데뷔시켜 주세요. 그래야 저도 선배 노릇 좀 해 보죠.”

데뷔 초부터 인연이 닿아 여러모로 돈독한 사이인 포토그래퍼가 있었다. 자신처럼 막 시작했던 때에 만났었는데 어느새 입지를 굳힌 굵직한 작가가 되었다. 이번 컨셉을 준비하며 여러 대화를 나눴었는데, 문득 그녀가 찾고 있는 얼굴상이 솔과 꽤 부합한다는 게 생각이 났다. 사실 그녀와의 친분을 이용해 보자는 시도는 그간 여러 번 있었으나 제 이미지 관리에 철저한 은겸으로선 괜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늘 거절해 왔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구태여 실장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은겸은 솔을 김윤희에게 소개해 줄 생각이었다. 김윤희가 찾는 마스크라서인 것보다는 솔이라면 그녀의 눈에 들어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은겸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동안 자신이 누군가를 이렇게 각별히 신경 써 준 적이 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미지 관리상, 방송상 어쩔 수 없이 그런 적은 있어도 저 스스로 알아서, 적극적으로 챙겨 준 적은 없었다. 태오만 봐도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그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면서 도움은커녕 오히려 훼방을 놓았었지 않은가.

태오와 솔이 다른 점이 뭘까. 은겸은 잠깐 눈에 띄게 살갑게 구는 남자의 말을 흘려들으며 잠시 고민했다. 사실 데이블락의 멤버들보다도 태오나 가람과 함께 알고 지낸 시간이 더 긴 은겸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은겸에겐 태오를 배려해 주고 도와주고 싶은 동정심이 생기지 않았었다. 가람도 마찬가지였고 도지호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달라지긴 했다. 더는 연습생이 아니기도 했고 제법 묵직한 발언을 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더 이상 그룹 활동에 미련이 없었다.

이번 솔로 앨범의 성적이 제 생각만큼만 나와 준다면 은겸은 더는 그룹 활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망아지 같은 놈들을 챙기면서 허울뿐인 리더라는 자리를 맡고 분량을 나누어 가지는 것 따위 이젠 사양이었다. 하지만 성솔이 신경 쓰이고 도와주고 싶은 건 그런 속물적인 이유에서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만약 그 시절 그때로 돌아가 솔을 만났더라면 태오나 가람과는 달랐을 거라고 은겸은 확신했다. 솔은 무언가 달랐다. 단순히 쉽게 볼 수 없는 외모를 가져서? 각지에서 이쁘고 잘생겼다는 사람들이 흘러들어오는 바닥이다. 물론 아름다운 외모는 호감과 좋은 인상을 주기 좋지만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단순히 그런 문제였다면 태오나 가람도 어디 가서도 꿇리지 않을 외모였다.

꿋꿋하게 구는 두 사람과 달리 그 음울하고 적당히 절망한 표정이 좋았다. 혼자 후미진 연습실에 숨어 울며 청승 떠는 것도 좋았다. 짠하고 안쓰러워서, 솔에게는 은겸의 뒤틀린 속내를 충족시켜 주는 그런 모습이 있었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은 거다. 도와주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무튼 고맙다. 참, 그리고 솔로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데이블락 리더야. 잊지 마. 루카 잘 챙겨 봐.”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이젠 알아서 조심해야죠. 잘할 거예요. 언제까지 제가 챙겨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은겸의 어깨를 남자가 손끝으로 툭 두들기며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자신을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는 그 속내가 훤히 보였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이런 게 어른들의 사회 아니었던가. 은겸은 순한 강아지처럼 얼굴을 둥글게 만들고 아주 선량한 사람인 척, 난처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 사고뭉치…. 하아, 연습생들 다루듯이 핸드폰을 뺏을 수도 없고.”

“루카 만나면 한 번 더 말해 둘게요.”

“태오랑 애들도 좀 부탁할게.”

“네. 한솥밥 먹는 식구들끼리 도와야죠.”

속에도 없는 말을 하며 은겸은 활짝 웃었다.

***

“얘들아, 우리 프로필 사진 찍으러 갈 거야!”

“네?”

“오늘이요?”

“이렇게 갑자기요?”

아침 식사 준비가 한창이던 숙소에 영호가 들이닥쳤다. 달걀프라이를 하던 지호는 깜짝 놀라 뒤집개로 노른자를 터뜨려 버렸고 며칠간 빡센 다이어트로 홀쭉해져 축 늘어져 있던 득용도 놀라 벌떡 일어났다. 모두가 놀라고 당황한 표정이었는데 딱 한 사람만 아무렇지 않았다.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성솔이었다.

“성솔, 지금 잘 때가 아니야. 일어나.”

“…….”

잠이 든 채로 태오의 손에 방 밖으로 끌려 나온 솔은 아직도 한밤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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