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다행이다. ‘성공’이라는 글자가 솔에게 안심하라는 듯 일렁였다. 하지만 솔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시스템 종료를 맞이하지 않아도 되는 점은 무척 다행인 부분이었지만 솔은 웃을 수가 없었다.
뒤늦게 심각해진 분위기에 다른 심사 위원들이 칭찬을 한마디씩 덧댔지만 본래 열 마디 칭찬보다 한 마디 비난이 더 가슴에 박히는 법이었다. 그런데 열 마디 비난 뒤에 한 마디 칭찬을 들었으니 그 한 마디 칭찬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었냐. 정말 그랬다면 오늘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 줬어야지. 더 열심히 했어야지.
자신의 부족함은 차고 넘치게 인정한다. 하지만 서승훈의 지호를 향한 말에 솔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지호뿐만 아니라 멤버 중 그 누구도 정도를 지나친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솔은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꿈을 향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지호에 대한 서승훈의 평가가 그를 깎아내리는 것처럼 느껴져 솔은 가라앉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가 명성 있고 실력도 갖추고 있다는 건 앞선 평가와 주고받은 이야기로 충분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솔은 그의 평가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더불어 시스템 창 덕에 결과를 알고 나니 더욱이 허탈해졌다. 솔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제 발등만 바라보았다. 옆에 선 태오가 툭, 슬쩍 솔의 어깨를 건드렸다. 태오의 접촉에 솔은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지금은 촬영 중이고 이렇게 침울한 티를 내어서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솔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마이크를 내려놓은 서승훈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고개 숙이고 있던 지호도 고개를 들어 오히려 서승훈에게 감사하다 인사하고 있었다.
지호의 인사에 서승훈은 손을 흔들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점수를 공개한다는 MC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월에 숫자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솔은 오늘따라 그 숫자들이 어지럽게만 느껴졌다.
맞잡은 지호의 손이 긴장한 듯 땀으로 끈적했다. 솔이 그의 손을 바라보자 지호는 혹 제 손의 땀 때문에 솔이 불편했나 싶어 단단히 잡았던 손을 풀었다. 이미 결과를 알아 버린 솔은 그 대신 지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부드러워 보이지만 자신보다 훨씬 강한 지호를 위로하듯 솔은 토닥토닥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빠르게 올라가는 점수를 보며 솔은 차라리 시스템 결과가 늦게 나오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결과를 알고 나니 멤버들과 함께하는 이 순간을 진심이 아닌 거짓으로 보내게 되는 게 불편했다. 마음을 졸이더라도 이왕이면 같이 걱정하고 같이 기뻐하고 같이 안도하고 싶었다.
마침내 최종 점수가 공개되었다. 1위인 명하가 속한 5조와 9점 차이로, 그렇게 3위가 되었다. 너무 자만했던 걸까?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선곡하는 명하를 보며 솔은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팔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라 오늘의 무대는 이런 평을 들을 무대는 아니었다. 불현듯, 화장실 앞에서 지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남들이 무슨 생각,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결국 자신이 느낀 것과 생각이 중요하다던 그 말. 어쩐지 이 일을 예견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들어맞는 말이었다. 독선은 좋지 않았지만, 솔에게는 독선이 조금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금 벽장 속에 숨어 버릴지도 몰랐다. 솔은 자신과 눈을 맞추며 따스한 목소리로 들려주었던 그 말을 되새기며 오늘 무대에 대한 평가는 스스로 느낀 대로 결론짓기로 했다.
우리는 충분히 잘했다. 지호 형은 더할 나위 없이 멋졌고 다음에는 더 잘할 것이다. 솔은 침울하게 내려앉았던 기분이 풀릴 때까지 그 말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명하는 환하게 웃으며 ‘히트의 첫사랑’이라는 노래로 단독 무대를 꾸리기로 선택했다. 세 번째로 곡을 고를 기회를 얻은 솔과 멤버들은 다행히도 우선순위로 뽑아 두었던 ‘쥬시스의 HUSH’를 고를 수 있었다. 원하던 노래를 가져올 수 있었다는 것이 꿉꿉했던 기분을 조금이나마 나아지게 했다.
이후로는 조별 인터뷰와 개별 인터뷰 촬영이 계속되었다. 촬영을 마무리하고, 대기실에서 뒷정리하는 모습도 간간이 찍어 갔다. 혹평을 들었던 지호의 반응을 원한 촬영진들이 유독 지호를 카메라에 오래도록 잡았다. 촬영이 길어질수록 태오는 혹여 침울한 솔의 모습이 화면에 오래 잡힐까, 제 눈이 닿는 대로 솔을 밀어내거나 가려 댔다.
카메라가 온전히 사라진 퇴근길 밴 안에서야 득용은 분통을 터뜨렸다. 득용은 마치 랩을 하듯이 말을 굉장히 빠르고 강하게 토해 냈다. 끝없이 줄줄 이어지는 득용의 말에 솔은 입을 다물었다.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가려운 곳을 긁어 주듯 득용이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속 시원히 다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하다 얘들아. 나랑 좀 개인적으로 틀어져서.”
“지호 형이 왜 미안해요. 다음에 발라 버려요.”
득용의 말엔 주어가 없었지만 누구를 향한 말인지 다들 이해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순간 다섯 멤버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시선이 마주치자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득용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3위도 충분히 대단한 거지만, 다들 만족 못 하지? 이번 결과에 속상해하지 말자.”
태오가 멤버 모두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그러자 가람이 어깨를 으쓱이며 느른하게 미소를 짓고는 오늘 무대에 대한 소감을 말했다.
“나는 오늘 우리 무대 좋았어.”
“나도.”
“말해 뭐 해요. 우리가 제일 잘했다니까요!”
“맞아.”
가람의 말에 솔이 맞장구를 치자 득용도 태오도 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호도 굽었던 등을 펴고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그는 능청스레 웃고 있었지만, 멤버들을 향한 미안함 같은 것이 웃음 아래에 깔려 있었다.
“진짜로요. 다음 미션은 아예 대놓고 퍼포먼스니까. 우린 또 댄스 천재가 둘이나 있으니 아무 걱정 없어요. 우릴 위한 미션이다 이거야. 다시 1위 탈환해요.”
그것도 잠시. 주먹을 불끈 쥔 득용의 힘찬 외침에 멤버들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지호의 얼굴에도 더 이상 어두운 감정들은 보이지 않았다. 득용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호는 밝은 미소를 짓고 기분 나쁜 비평은 훌훌 털어 버린 듯했다. 솔은 지호의 그 웃음에서 진심을 엿보았다 생각했지만, 지호는 가슴이 갑갑했다. 서승훈이야 잠깐 출연한 특별 심사 위원일 뿐, 거슬리는 건 김명하였다.
솔은 김명하의 말에 휘둘려 지호에게서 멀어질 그런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호는 그저 김명하가 솔에게 인사하는 것조차 싫었다. 기분 나쁜 공기가 옮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뻔뻔하게 솔에게 인사하던 김명하가 떠올라 지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행동이었지만 솔은 지호의 변화를 미처 보지 못했다. 때마침, 새로운 퀘스트 알림 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퀘스트 : 이제는 움직여야 할 시간!>
당신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마이 아이돌 스타즈> 3ROUND 댄스 미션에서 순위 2위 이상을 차지하세요.
*보너스 미션 : 3ROUND 무대에서 아크로바틱 동작을 2회 이상 수행.
성공 시, 3ROUND 보상 상자 획득. (보너스 미션 성공 보상 컨셉 랜덤 골드 티켓 X1)
실패 시, 시스템 종료 (혹은 그에 상응하는 고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