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167화 (167/192)

#167

솔에게 사탕은 잘 먹고 있냐고 묻는 글. 태오는 어쩐지 누가 쓴 글인지 알 것도 같았다. 솔의 졸업식장에서 얼핏 지나쳤던 얼굴이 흐릿하게 어른거렸다.

중간중간 미담이라고만 할 수 없는, 조금 입이 쓴 글들도 있었지만, 솔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남긴 글마다 솔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수줍게 웃는 그, 서늘하고 예민해 보이는 섬세한 생김새와 달리 칭찬에 하염없이 약하고 어색해하는 그.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머뭇머뭇 인사조차 쉬이 하지 못했던 숫기 없었던 모습. 솔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긴 글마다 마치 손을 톡 대면 깨질 유리를 다루듯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그를 대했다는 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금 솔은 다른 의미로 태오에게 그런 존재였다. 왜, 그날 장례식장에서 그를 밀어내려, 그를 끊어 내려 그런 행동을 했을까. 입이라도 맞추지 않았더라면 슬며시 친구처럼 얼굴이라도 보고 지나칠 수 있었을 텐데. 아니면 은근슬쩍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잠시 너무 힘들어 헛소리했다며 뻔뻔하게 굴 수라도 있었을 텐데 싶었다.

태오는 사람들이 써 내려간 글을 쭉 읽으며 이제 와 때늦은 후회를 했다. 자신이 선을 긋고 밀어냈으면서 솔이 너무도 보고 싶었다.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혹여 아직도 울고 있진 않을까, 전처럼 다시 가라앉는 중일까. 그도 아니면 지금 자신처럼 사람들이 남겨 준 이 글들을 보고 수줍어하고 있을까. 당장에 달려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고 참다 늦은 시간 텅 비어 있을 연습실이라도 찾아가 솔의 흔적이라도 눈에 담을 수 있지 않을까 발걸음을 했다.

두고 온 짐이 있다며, 짐을 정리하러 왔다는 핑계를 가지고 얼굴을 들이민 태오에게 매니저 영호는 솔의 소식을 전했다. 솔이 왜 제 병력과 가정사를 공개했는지, 그걸 공개하는 그의 마음이 어땠는지, 그리고 그 결정에 결국 자신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까지. 매니저는 태오가 며칠 정신을 놓고 지낸 시간 동안의 일을 알려 주었다.

팀 채널에 올라가는 영상들을 촬영한다고 할 무렵, 솔의 약한 모습을 촬영하려던 채민주에게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 모습이 대중에게 노출되는 것이 도리어 상황을 이겨 내려는 솔을 잡아먹는 먹이가 될까, 만류했던 그때 자신의 마음과 솔이 같은 마음이었다는 걸 구태여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대로 돌아서 회사를 나섰어야 했는데, 새벽임에도 환한 불빛과 함께 스며드는 음악 소리에 기어이 연습실 문을 열고야 말았다. 매일같이 열었던 문인데, 오늘은 마치 열어서는 안 되지만 결국엔 열고 마는 판도라의 상자 같았다. 그림자만이라도 눈동자에 담아갈 요량으로 홀린 듯 상자를 열었는데, 구슬땀을 흘리며 집중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말을 걸고 말았다. 서로에게 피드백을 주고받는 것이 이젠 몸에 밴 듯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벌어진 일이었다.

말을 주워 담고 싶었던 건 오히려 태오였다.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솔에게 얼마나 무책임한 짓을 저지르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이 모든 일련의 일들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불가항력이었다.

솔의 말대로 자신의 자리는 여기였나 보다. 더 이상 이 일에 매달려야 할 이유를 잊었다며 떠나겠다고 말해 놓고 결국 다시 이 자리였다. 길을 잃은 자신에게 보란 듯이 자신이란 이정표를 세워 두는 솔을 보니 홀린 듯 그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라 말을 꺼내야 할까. 미안하다는 말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자신을 기다리는 솔을 보며 태오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정작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지금 그가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와 솔직한 감정 그 자체였다.

‘이거 보니까, 네가 보고 싶어지더라.’

사람들이 솔에 관해 이야기하는 글을 보니 그가 보고 싶었다.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솔의 모습에 그가 너무 보고 싶어져 앞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구질구질하게 제 발로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다. 무책임하고 조금의 멋도 없었지만 가장 솔직하고 진실한 지금의 윤태오를 드러내 보인 말이었다.

전혀 몰랐다는 듯, 까만 글씨들을 읽어 내릴수록 눈이 점점 동그랗게 뜨이는 그를 태오는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솔은 함부로 손대기조차 조심스러운 유리알 같았지만, 지금 태오의 눈에 비친 솔은 달랐다. 유리알보다 더욱 찬란히 투명했고 무엇보다도 강한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다.

태오는 솔의 세세한 움직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꼼꼼히 그의 모습을 눈동자에 담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과 조금 상기된 얼굴. 그 사이 덕지덕지 붙은 파스와 옅은 멍 자국. 그간 분투한 흔적들이 역력했다.

울던 솔에게 잘할 수 있을 거라 말하며 다독이긴 했지만, 한편으론 그가 낙심하고 있진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태오의 걱정이 무색하게 그는 정말 태오의 말처럼 뭐든 잘 해낼 수 있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이런 사람을 누가 손가락질하고 욕할 수 있을까?

와락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지만, 태오는 그 마음을 억누르며 모자를 벗었다.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다. 마음먹은 대로 홀연히 떠났어야 했는데. 한번 발을 들이고 나니 더는 돌아설 수 없게 되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는 듯,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커다란 눈망울을 마주하니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솔이 기다리고 있을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그가 원하는 말을 돌려주고 싶었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지 자신이 없었다. 중력에 이끌려 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못하고 그의 주변을 맴도는 위성이 된 기분이었다. 조금만 궤도를 틀어 다가가면 그에게로 충돌해 버릴 것이고 조금만 궤도를 틀어 멀어지면 그대로 솔에게서 이탈될 것만 같았다.

이번에 놓치면 다시는 손에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데, 살면서 마주한 문제 중에 가장 어려웠다. 솔은 지금도 일렁이는 눈동자로 제발 함께 있어 달라고, 오르막길일지언정 함께 걷자고 말하고 있었다. 태오는 솔이 세운 이정표를 더는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곳에 오기로 발길을 돌린 시점부터 윤태오는 결국 이렇게 함락당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 겨우 스물이었다. 한 번쯤은 천지 분간 못 하고 철부지처럼, 어리석게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선택을 해도 괜찮을 나이였다. 잡아먹히리란 걸 알면서도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온 격이 따로 없었다. 그렇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조금은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선택을 해 보려 했다.

손에 모자를 꽉 쥔 태오는 결국 솔이 기다리고 있을 말을 내뱉었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사람이 제 자리가 이곳이라고 말하며 저를 지키려 아등거리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더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미안, 기다렸지.”

거대한 충돌이 일어났다. 멀어지는 듯싶었던 위성은 결국 태양의 열기에 타서 재가 되더라도 그에게 충돌하기를 택했다. 태오의 그 한마디에 솔은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품에 폭 안겨 오는 솔을 태오는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솔의 두 발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를 끌어안은 순간 태오는 모든 것을 수긍해 버렸다. 솔이 맞았다. 잠시 멀어 버린 시야에 짧은 방황을 했을 뿐 윤태오의 자리는 이곳이 맞았다. 익숙한 연습실의 공기, 얇은 머리카락 사이를 스치는 익숙한 체향. 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한참 만에야 멀어진 두 사람의 대화는 어쩐지 우스웠다. 고작 며칠 멀어졌을 뿐인데 몇 년 헤어진 것처럼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향한 일방적인 물음뿐이었다. 답은 듣지 않아도 안다는 듯이. 그렇게 서로가 각자의 자리에서 잘 이겨 내고, 서로를 지키려 노력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가 아쉬운 듯 간신히 떨어졌다.

아쉬움이 가득 남은 손길로 솔을 떨어뜨린 태오는 뒤늦게 연습실을 한 바퀴 굴러 보았다. 엉뚱한 짓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모습이 촬영되어 솔에게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지 않았다. 태오의 행동에 솔이 제법 눈치 빠르게 반응했다.

“촬영 안 하고 있어. 계속 참여할지 하차할지 미정이래.”

“아직?”

태오의 물음에 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문을 공개하며 소속사는 <마아스> 제작진 측에 원활한 해명을 위해 그간 내보내지 않고 의도적으로 편집했던 장면들을 재편집하여 오해를 벗겨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위해서라도 당연히 응할 거란 생각과 달리 <마아스> 제작사 측은 도리어 자신들을 탓하는 것이냐며 역정을 냈다.

그 결과 아직도 원만하게 조율이 되지 않은 듯, 언뜻 마주친 영호의 표정은 화가 잔뜩 나 있었고 늘 연습실에 설치되어 있던 카메라들도 철수되었다. 리더인 태오가 부재인 탓에 지호가 슬쩍 어떻게 해야 하나 확인차 물었지만 또렷하게 확정된 바가 없으니 일단 준비는 하던 대로 하라는 말만 돌아왔었다.

솔은 태오가 보여 주었던 저에 관한 해명 글을 떠올렸다. 글을 쓴 사람이 누군지 이제는 잘 알 수 있었다. 졸업식에서 마주했던 익숙한 포도당 사탕의 껍질과 함께 그 소녀의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났다. 댓글을 남겨 준 몇몇은 누군지 다 알 수 없었지만,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한때는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애정이 아니라 오히려 저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느꼈었는데, 돌이켜 보니 그저 자격지심이었다. 오히려 지금은 다른 사람이 보는 ‘나’라는 존재가 신기하면서 낯선 느낌이었다.

태오가 제 옆으로 다시 돌아와 주었고, 저를 응원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은겸, 가람, 태오를 비롯한 주변 모두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음을 솔은 재차 확인했다. 이제야 비로소 온전히 사랑받는 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조금 시간이 흐르면 이 일들도 결국 완만한 파도가 되어 흘러 넘어갈 거라 생각되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된 솔은 이제 아무런 걱정 없이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이 다 행복해질 일만 남은 것 같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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