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태오 형이다!”
녹음실에서 내려온 득용이 솔의 옆에 나란히 선 커다란 그림자를 보고 펄쩍 뛰며 외쳤다. 득용을 뒤따라 들어오던 가람도 태오를 발견하곤 놀란 듯 굳었다.
“윤태오?”
“뭐야, 왜 다들 입구에 서 있어.”
다들 미리 연습실에 모이자고 계획이라도 한 것인지, 타이밍 좋게 지호의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그렇게 연습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순서대로 그 자리에 멈춰서 다들 태오를 바라보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초롱초롱한 멤버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일은 주로 솔에게만 일어나던 일이었기에, 제게로 집중되는 시선이 퍽 어색했는지. 태오는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사실 태오에겐 이 상황 자체가 멋쩍었다. 그가 떠났을 때 가람뿐만 아니라 멤버 모두가 돌아가며 태오에게 한마디씩을 얹었었다. 그때마다 정말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단호히도 거절했는데 단지 솔이 보고 싶었다는 이유 하나로 이리 쉽게 무너졌으니 민망할 법도 했다.
“뭐냐, 윤태오. 내가 얘기할 때는 정말 이젠 끝인 것처럼 굴어 놓고.”
지호가 우뚝 멈춰 선 가람을 슬쩍 밀어내고 태오에게로 다가서며 말했다. 툭 내뱉은 말과 달리 그의 입꼬리는 늘 그렇듯 둥글게 말려 있었다. 웃음을 참느라 씰룩이는 것이 훤히 보였다.
그 모습에 솔도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아직 문틀을 넘지 못한 지호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솔 나름의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털썩, 누군가가 주저앉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둘러보니 득용이 태오의 옆에 철퍼덕 주저앉아 있었다.
“진짜, 다행이다. 나는 진짜 태오 형이랑 이제 끝인 줄 알았다고요!”
“뭐야, 김득용. 솔이가 계속 태오 꼭 돌아올 거라고 그랬잖아.”
“솔이 형 말을 안 믿은 건 아니구… 사실 상황이 상황이었잖아요.”
어떤 일이 있어도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태오가 정말 팀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제법 큰 충격이었는지, 득용은 장난스러운 말투와 달리 두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때 지호가 주저앉은 득용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자 득용은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고는 엄마에게 혼난 아이처럼 생떼를 부리며 아이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엉덩이를 씰룩였다. 그리곤 엉엉 땅을 치며 우는 시늉을 했다. 덩치만 커다랬지 이럴 땐 영락없는 애였다.
며칠간 심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형들 눈치를 보며 말 한마디 못 얹고 그저 고개만 끄덕이더니 사실 득용도 꽤 속앓이한 모양이었다. 그런 득용의 모습에 멤버들 모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태오는 득용의 머리를 벅벅 문지르듯 쓰다듬어 주며 솔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말없이 눈길을 주고받는데,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쭈뼛거리며 서 있던 가람이 드디어 문턱을 벗어나 태오에게로 다가왔다. 한결 밝아진 지호나 득용, 솔의 표정과 달리 가람의 표정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가람은 태오에게 가까이 다가가 며칠 사이 초췌해진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태오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치곤 안부를 물었다.
“이제 괜찮은 거야?”
“…아니, 근데 괜찮아져 보려고.”
가람의 어조는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지만 그 목소리엔 친구를 향한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실 가람은 아직도 감정이 뒤엉켜 복잡했다. 그저 솔의 옆에서 그를 지키는 걸로 만족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렇게 단순히 정리될 감정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가장 먼저 태오의 상태가 걱정되는 것을 느끼며 가람은 그래도 우리가 친구는 친구인가 보다 싶었다.
솔직히 태오도 아무리 각오한 일이었다곤 하나 동생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당연히 괜찮을 리가 없었다. 다만 태오는 제게 새로이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보며 견뎌 내려는 노력을 막 시작한 참이었다. 태오의 대답에 가람의 얼굴이 펴지기는커녕 더욱 굳자 그는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알잖아. 나 약속 어기는 거 제일 싫어하는 거.”
태오의 그 말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솔이 슬며시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태오에게서 한발 물러났다. 단순히 가람을 안심시키려는 말이었지만, 솔은 가슴에 바늘이 콕 박힌 것처럼 지레 찔렸다. 엄밀히 말하자면 솔은 태오의 그런 점을 이용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저 태오가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제 이기심에 태오에게 슬퍼할 시간도 주지 않은 것 같아 솔에게 뒤늦은 죄책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스멀스멀 몰려오려던 자책은 득용의 우렁찬 목소리에 모두 줄행랑을 쳐버렸다.
“그 약속 형이 먼저 깬다고 했잖아요!”
득용의 그 외침에 태오와 가람의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녹아내렸다. 도저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득용의 지적이 틀린 것도 아니어서, 태오가 득용에게 사과를 건네자 득용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미안.”
“미안해할 것까진 없고요.”
반드시 같이 데뷔하자던 말을 뒤엎은 태오에게 속이 상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이해와 공감도 되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단순한 말로 서술하기 어려웠고, 그렇기에 참으로 복잡한 일이었다.
태오의 사과에 머쓱해진 득용이 제 뒤통수를 스스로 한 대 때렸다. 퍽 소리가 나는 것이 꽤나 세게 내려친 듯싶었다. 그러자 지호가 득용이 스스로 쥐어박은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맏형답게 상황을 수습했다.
“그건 득용이 말이 맞지. 우리가 너였어도 그랬을 거야. 아니 애초에 이렇게까지 못했다.”
지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나 솔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솔은 근래까지도 그 아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지 않았던가. 이어지는 지호의 말은 솔에게 더 큰 공감을 끌어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너한테 마음 다스릴 시간을 더 줘야 한다는 거 아는데, 그래도 이렇게 돌아와 주니까 고맙고 좋네.”
지호는 정확히 지금 솔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솔의 입장에선 태오가 제자리로 돌아와 준 것이 정말 기뻤지만 그만큼 태오에게 힘든 일을 시키고 있는 것 같아 미안했다. 그렇다고 태오가 다시 떠나가는 것이 괜찮다는 말은 아니었다.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태오가 다시 떠나간다면 솔은 아마 그의 바짓단을 붙잡고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오열하며 태오를 붙잡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터였다.
모두가 지호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어두워진 솔의 표정에서 내심 그 속내를 짐작한 지호가 분위기를 풀어 보려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이런 건 원래 지호의 특기였다.
“이쯤 했으면 윤태오 전매특허 나와야 하는데.”
“전매특허?”
“그거 있잖아. 그거, 그거.”
하지만 오늘따라 눈치가 없는 득용이 맞장구를 제대로 치지 못했다. 척하면 척, 바로 답안이 나와야 했는데 득용은 영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사방으로 갸웃거렸다. 답답해진 지호가 이리저리 턱짓하며 눈치를 주었지만, 득용은 여전히 아리송하다는 반응이었다. 결국 두 사람을 지켜보던 솔이 조심스레 제 답안을 꺼냈다.
“이제 연습하자?”
“그래, 그거!”
솔이 말꼬리를 올리며 영 자신 없게 대답하자 지호는 손뼉을 짝 소리 나게 맞추며 탄성을 내뱉었다. 득용은 지금 상황과 상관없이 그 말이 너무도 듣기 싫다는 듯, 질색하며 고개를 내젓곤 말했다.
“지호 형 진짜 싫어.”
“아 왜. 내가 없는 말 했냐. 진짜가 한번 해줘야지.”
득용이 눈을 흘기며 질색하자 지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곤 눈썹을 찡긋이며 태오에게 넌지시 신호를 주었다. 그의 신호를 받은 태오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그 다운 대답을 내놓았다.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연습하자.”
“아, 윤태오 돌아왔네.”
그 말을 듣자 정말 태오가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솔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시간도 시간이었거니와 걱정을 한시름 내려놓자 피곤이 몰려오고 있었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지만, 저마다 입가엔 웃음이 남아있었다.
***
모처럼 다섯 남자가 나란히 길을 걸었다. 널따란 도로에 자동차 하나 지나가지 않는 새벽. 환한 가로등 불빛은 온전히 그들의 길을 비춰주려 이 시간까지 기다린 것만 같았다.
몸은 피곤하지만, 지금의 순간을 오래도록 즐기고 싶었다. 솔은 일부러 휘적휘적 걸음을 느릿하게 옮겼다. 그러자 태오와 가람, 지호가 솔과 속도를 맞춰 걸었다. 한 발짝 훌쩍 앞서가며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 드리운 제 그림자로 장난을 치던 득용이 뒤를 돌아 제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오는 형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이 제법 맘에 들었는지, 득용은 콧잔등을 씰룩이며 짓궂게 웃었다.
그저 제가 좋아하는 형들이 다 같이 모여 웃는 게 좋은 득용의 발걸음이 갈수록 가벼워졌다. 풀쩍풀쩍 뛰어 긴 다리로 앞서가던 득용은 숙소 건물이 보이는 골목 어귀에서 걸음을 주춤거렸다.
“뭐지?”
신나게 뛰어가던 득용이 문득 걸음을 늦추며 멍하니 건물을 바라보자 뒤따라오던 멤버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의문을 내뱉었다. 걸음이 느려진 득용은 어느새 뒤따라오던 지호와 어깨를 부딪쳤다.
“뭐가?”
“왜?”
지호는 저와 어깨가 부딪히고도 건물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득용을 한번 흘깃 보고는 그 시선을 따라 숙소 건물로 시선을 옮겼다. 이 새벽에 어울리지 않게 숙소 복도에 불이 훤하게 켜져 있었다.
이내 센서 등의 시간이 다 된 듯, 복도의 불이 꺼졌다. 하지만 1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깜빡, 깜빡. 숙소가 가까워질수록 모두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상함에서 시작된 의심이 확신으로 변질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위기를 감지한 태오가 손을 뻗어 솔과 가람을 붙잡아 세웠다. 그러고는 마치 제 뒤로 숨기듯 태오는 두 사람의 손을 잡아끌어 제 뒤로 밀어냈다.
“김득용. 영호 형한테 전화해, 솔이 넌 경찰한테 하고.”
어느새 제일 앞에 위치하던 지호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웃음기 하나 없이 지시를 내렸다. 지호의 말에 솔은 스토커에 대한 조사가 다시 진행되며 공유 받았던 경찰의 연락처가 떠올랐다. 황급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야심한 새벽, 긴 통화 연결 신호음이 이어졌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기다리는 목소리는 전화기 너머로 쉬이 들려오지 않았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질수록 솔은 속이 타 발을 동동 굴렀다. 지금 저기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분명했다. 순간 가람을 겁에 질리게 했던, 그리고 저와 일부러 부딪혀 핸드폰을 훔쳐 갔던 스토커가 떠올랐다.
숙소 복도의 불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는 모양을 가람이 넋을 놓고 올려다보더니 이내 걸음을 옮겼다. 태오는 황급히 그의 팔을 억세게 붙잡고 만류했다.
“들어가지 마.”
태오가 가람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