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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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으니 누군가 다가와 어깨에 재킷을 걸쳐 주었다. 온기가 느껴지는 겉옷에 친절을 베푼 주인공이 누군가 확인하니 지호였다.
“고마워. 지호 형.”
“고맙긴. 그거 득용이 코 묻은 옷이야.”
웃음이 나올 상황이 아닌데도 솔은 지호의 말에 살짝 어깨를 떨며 웃었다. 덩치만 커다랬지 속은 여리고 아직 애인 득용은 영호를 보자마자 안도했는지 눈물이 터져 증언하는 내내 대성통곡을 했다. 쉬이 울음을 참지 못하는 와중에도 형들을 괴롭힌 스토커에 대한 증언은 꼭 해야겠는지 주절주절 계속 말을 내뱉었다. 발음이 뭉개지고 울먹이며 코를 먹는 소리에 반절은 무슨 말인지 제대로 못 알아들었지만.
그나마 가장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태오가 나서서 차근차근 상황에 대해 진술하고 가장 큰 피해자인 가람은 회사에서 사람이 나와 일단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스토커에 대한 피해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병원에 가야 했다. 긴장이 풀리자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게 된 솔은 한갓진 구석에 앉아 놀란 마음을 다스리는 중이었지만 여전히 얼떨떨하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지호가 솔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길고 긴 하루였고 다사다난한 한 주였다. 세상이 일부러 허튼 생각일랑 하지 말라고 미친 듯이 빠르게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마치 거나하게 취한 것처럼 눈앞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다리도 후들거리고. 거기다 지호가 덮어 준 재킷을 걸치고 경찰서 의자에 앉아 있자니 상황이 정말 취객 같기도 했다.
“정신없지?”
지호의 물음에 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이 상황이 얼떨떨했다. 벌써 비슷한 일로 경찰서를 세 번이나 찾게 된 지호도 정신이 없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피해 당사자들보다는 조금 사정이 나았다. 적어도 겁먹은 막둥이를 달래 주고 조사가 끝나고 넋이 나간 솔을 챙길 만큼은 말이었다.
“우리끼리 먼저 들어가자고 하면 싫다고 할 거지?”
지호가 득용과 태오가 들어간 조사실 방향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묻자 솔은 대답 대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실 지호의 말을 들어 숙소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눕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고도 사고고 오늘만큼은 모두와 함께 있고 싶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경찰 측에서 숙소 내부까지 점검을 마쳤다. 다행히 숙소 안까지 출입한 흔적은 없었고 CCTV를 확인하니 이번에도 스토커의 가택 침입은 미수로 그쳤다고 한다. 비록 미수라곤 하지만 아무래도 숙소에 들어가기가 좀 꺼려졌지만.
“득용이랑 태오 끝나면 우리 집으로 가자.”
“형네 집?”
지호의 제안에 솔이 고개를 기울이며 반문했다. 각자 개인 사정이나 휴식을 이유로 한 번씩 집에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얼핏얼핏 대화하며 흘려들은 것 외엔 멤버들의 가족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이 없었다. 물론 모를 수 없는 사정이 있는 태오와 솔은 예외였지만 말이었다.
“응. 숙소로 돌아가는 건 좀 아니잖아. 가람이네 부모님이랑 득용이네 부모님도 소식 듣고 올라오고 계시는 중이고….”
솔의 물음에 지호가 어색한 듯 머리를 흩트리며 대답했다. 프로그램 촬영 중이기도 하고 이번엔 대대적으로 기사가 나갈 테니 부모님들께도 상황을 알려드려야 했다.
영호와 회사 관계자들이 차근차근 놀라지 않게 연락을 드렸으나 새벽에 그것도 경찰서에서 하는 연락은 그 내용이 어느 쪽이든 부모님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기 최적이었다. 득용의 부모님은 연락을 받자마자 차에 시동을 거셨고 가람의 부모님도 피차 마찬가지였다. 어느 부모님이든 아들들이 머물고 있는 장소가 스토커가 침입하려 했던 숙소라면 가슴이 아프실 게 훤했다.
“몇 시간 안 남았지만 그래도 우리 집에서 한 숨자고 움직이자.”
“그래도 괜찮아요?”
“어어. 괜찮아. 오히려 너희가 불편할 수도 있어.”
지호는 흘긋 시계를 확인하는 척 솔을 쳐다보았다. 부모님 때문도 있었지만 사실 멤버들의 부모님이 찾아와 하나둘 멤버들을 데리고 떠나면 뒤에 남을 태오와 솔이 신경 쓰였다.
당사자들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괜찮다 하겠지만 지호는 괜스레 그 상황이 두 사람을 쓸쓸하게 만들거나 안 좋은 기억을 되새김질하게 되는 여지를 주게 될까 봐 먼저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 상황을 반긴다는 보장은 없으니 뒤늦게 살짝 걱정되었다.
"우리 집 식구가 좀 많아. 집 자체가 좁기도 하고…. 근데 그래서 오히려 안전하지 않나 싶어서."
지호의 집은 득용이네처럼 시골 한적한 땅의 저택도 아니었고 가람이처럼 손님방이 따로 있는 부잣집도 아니었다. 그냥 다세대 빌라에 가구며 짐이며 사람이 꽉꽉 들어찬 평범한 집안이었다. 저질러 놓고 보니 오히려 태오와 솔, 두 사람이 불편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 괜히 변명하기 시작했다.
“식구가 많으니까 CCTV가 따로 필요 없잖아? 그리고 우리 집 잘생긴 애들 좋아해.”
“늦은 시간에 괜히… 민폐일 거 같은데…”
지호의 변명에 솔은 머뭇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친구 집에도 한번 제대로 놀러 가본 적이 없는 솔이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어색한 것도 있었지만 그의 말대로 시간도 시간이었고 좋은 일로 놀러 가는 것도 아니니 여러모로 망설임이 앞섰다. 솔이 머뭇거리자 지호가 그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이대로 가다간 흐지부지, 솔의 입에서 그 스토커가 문을 따고 들어가려 했던 숙소로 돌아가겠다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아니! 진짜 좋아할걸? 잘생기면 장땡이야. 그래서 나는 찬밥 신세지.”
급하게 큰소리를 내어 솔의 말을 끊고 나니 조금 멋쩍어진 지호가 이런저런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딱히 찬밥 신세랄 것도 없었다. 물론 잘생긴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지호가 하하 웃으며 말하자 솔이 재킷 자락을 꼭 움켜잡고 지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얼굴을 꿰뚫어 보려는 듯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에 지호가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전에는 이렇게 눈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도 버거워했던 솔인데 이젠 눈을 마주치는 것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지호 형도 잘생겼는데…?”
솔이 지호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꼬리를 올렸다. 순간 피는 못 속인다는 말과 자신이 조금 전 내뱉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잘생기면 장땡이라는 말이. 솔직히 저 얼굴로 제 눈을 빤히 쳐다보며 잘생겼다고 말하는 건 반칙이었다.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걸 느끼며 지호는 큼큼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뻔뻔하게 웃음 지었다.
“그치?”
“응.”
자신을 포장하는 데에 이골이 난 지호였기에 뻔뻔히 대답했지만, 그 목소리의 끝이 살짝 떨려 왔다. 홀로 앉아 있는 솔이 걱정되어 분위기를 풀어 주려 말을 걸었던 것이었는데, 도리어 지호가 당해 버렸다. 지호의 능청을 가장한 대답에 솔은 마주친 눈을 활짝 휘어 이쁘게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심장 떨리게 하는 그 모습에 지호의 말이 괜히 길어졌다.
“그 말 들으려고 한 말이야.”
지호는 저에게 상황이 불리하면 말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말재간이 있는 편이었고 뻔뻔하게 구는 것도 퍽 잘했기에 무슨 말이든 내뱉어서 상황을 모면하거나 피하려고 하는 그의 습관이었다.
지호답게 장난기가 가득한 능청스러운 대답에 그저 형인 지호가 자신을 걱정해 괜한 장난을 친다고, 그의 속을 반만 이해한 솔이 더욱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맑게 웃는 솔을 보며 지호는 속으로 ‘정신 차리자. 나까지 끼어들지 말자’를 되새겼다.
언제였더라. 가람이 솔을 단순히 멤버나 친구보단 그 이상으로 여긴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부터? 아니면 태오가 득용이나 가람을 챙기듯 솔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부터? 사실 그 두 사람이 제 마음을 인정하기 전부터 지호는 그 묘한 기류를 눈치채고 있었다. 예전부터 눈치가 빠른 건 꽤 유용하긴 했지만 때로는 너무 많은 것을 빨리 알게 되어 피곤한 면도 있었다.
아무튼간 멤버의 구성원 중 두 명이 동료에게 다른 쪽으로 치우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솔에게 시선이 머물렀던 것이. 처음엔 자기들끼리 아등바등하는 게 재미있었다. 정작 사랑의 작대기 두 개를 모두 가져간 솔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해한 생명체처럼 눈만 끔벅이고 있는데. 가람과 태오만 서로에게 질투하는 것이 재미있어 괜스레 놀려먹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래 지내온 동생들이라 딱히 별생각 없이 그 모습도 귀엽게 느껴졌었다.
그러다 문득 솔의 무엇이 태오와 가람, 서로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것처럼 굴던 두 친구 사이에 균열을 만들었을까? 그게 궁금해 지호는 솔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자신도 솔을 보며 가람과 태오처럼 웃고 있었다. 지호가 본 솔은 왜 여태껏 홀로 그늘에 있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사랑이란 햇살을 그득 받아도 모자란 사람이었다.
어느새 가람과 태오와 똑같은 시선으로 솔을 보며 웃는 자신을 발견하고 지호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끼어들지 않아도 이미 여러모로 복잡하고 충분히 힘든 녀석들이었다. 거기다 자신이 당사자가 되고 나니 이 문제가 더는 즐겁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도 전에 덮어버리는 것이 맞는가? 감정이 불쑥 튀어나오다가도 혼자 속앓이하는 가람을 보면 그 마음고생이 이해돼 제 마음을 덮어두었다. 그러다 또 슬그머니 충동이 올라 올쯤엔 태오가 눈에 밟혔다. 삶에든 볕이라곤 솔밖에 없을 태오가 눈에 들어오면 또 마음을 다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나면 또 솔이 눈에 들어왔다. 아등바등 쉽지 않은 상황들을 헤쳐 나가려는 솔을 보고 있자면 도와주진 못할망정 그 길을 더 어렵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솔을 향한 마음도 마음이었지만 오랫동안 아끼고 함께 해 온 동생들을 향한 마음도 만만치가 않았다. 또 가람과 태오도 눈치채지 못한 두 사람의 마음을 제일 먼저 눈치챈 지호의 눈엔 솔의 마음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