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178화 (178/192)

#178

기분 나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던 은겸은 도리어 태오에게 반문했다. 은겸의 말에 태오는 입을 꽉 다물었다. 같은 회사에 소속된 선후배 사이, 심지어 은겸은 누차 SNS나 라디오를 통해 솔과 돈독하다는 뉘앙스를 계속 풍겨 왔다. 심지어 솔은 은겸의 뮤직비디오에도 특별 출연하지 않았던가.

친분이 있는 두 사람의 포옹은 그리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 태오는 머릿속에 붉은 등이 켜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벌어진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은겸, 그런 은겸의 품에 안긴 솔의 모습이 태오에게 침착함을 앗아가고 몸을 움직이게 했다.

가람은 요즘 들어 솔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지호와 득용은 종종 솔을 와락 끌어안고는 했다. 처음엔 그런 접촉을 불편해했던 솔도 이제는 익숙해져 도리어 쪼르르 저 스스로 멤버들의 품에 기어들어 가기도 했다. 완전히 편해진 지금은 숙소에서 득용과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 뒤엉켜 누워 있기도 했다.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으면서 순간 은겸에게 안긴 솔을 보니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하필이면 은겸이라서. 은겸이 왜? 라고 누군가 물으면 왜 그에게 이토록 적대적인지 이유 수십여 가지를 말해 줄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간 아무 말도 없이 지냈던 건 은겸에 대한 의리 같은 것도 아니었고, 그저 이제야 세상의 좋은 모습을 바라보게 된 솔에게 괜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태은겸은 남들 앞에선 세상 착한 척 굴지만 제 이득을 위해서라면 누구든 이용할 수 있고 누구든 가차 없이 끊어 버리는 인간이었다. 그뿐일까? 제 입맛대로 상황을 만들 수만 있다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기까지 했다. 그런 인간이 이따금 솔의 앞에 나타나 사람 좋은 척 이것저것 챙겨 줄 때마다 태오는 마음 한쪽으론 늘 불안했다.

그가 혹, 자신이나 다른 멤버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솔을 제 밑에 두려 할까 봐. 실컷 이용하고 상처를 줄까 봐. 이렇게 그에게서 솔을 때어 놓아야 할 이유를 끝없이 늘어놓을 수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윈 다 필요 없고 태오는 그냥 태은겸이 솔의 가까이에 있는 것 자체가 싫었다. 태오는 이게 제 옹졸하고 유치한 질투임을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게 싫은 어린애 같은 마음.

제 행동의 원인을 깨달은 태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부끄럽다 못해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온갖 어른스러운 척, 믿음직한 척이란 척은 다 해 놓고 감정하나 숨기지 못해 이렇게 충동적으로 굴다니. 태오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솔을 바라보았다.

“태오야?”

솔도 그런 태오의 모습에 적잖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솔과 눈을 마주친 태오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대치하고 선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솔은 태오의 반응을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은겸 형은… 아마, 그 스토커 소식 듣고 날 걱정해서….”

왜 이런 변명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었지만 왜인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아 솔은 손짓까지 해가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솔은 ‘그렇죠?’ 하며 은겸에게 동의를 구했지만 은겸은 여전히 삐딱한 자세로 태오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토록 감정을 드러내는 태오의 모습도, 저토록 날카로운 은겸의 모습도 처음 마주하는 것이라 그 가운데서 솔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두 사람 모두 노골적인 적대심을 드러내는 상황에 솔은 허둥지둥거렸다. 태오는 솔이 은겸 대신 해명하는 것이 불편했고 은겸은 말로는 저를 싸고돌지만, 손과 몸은 태오 쪽으로 기울어 있는 솔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사가 뒤틀렸다. 태오는 은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린애 같은 제 질투심에 부끄러워했던 것도 잠시, 은겸의 얼굴을 보니 불편한 감정이 다시 새록새록 떠올랐다.

“허락도 없이 함부로 끌어안지 마세요. 선배님.”

태오는 솔을 살짝 잡아끌어 은겸과의 거리를 더 벌리며 구차한 변명을 입에 올렸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태오는 보다 정중하게 은겸에게 말했지만, 그 발언에 은겸은 오히려 눈을 치켜뜨고 더욱 맹렬히 비아냥거렸다.

“허락? 누구 허락? 설마 네 허락?”

은겸은 코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심사가 뒤틀린 두 사람은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든 지금은 그게 뭐든 고깝게만 들렸다. 앞서 제 발언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음을 깨달은 태오가 급히 설명을 덧붙였지만 그의 변명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성솔 허락 말입니다. 스토커 사건도 있었는데, 그렇게…!”

“태오야, 나 괜찮아.”

은겸이 갑자기 끌어안은 탓에 놀라기는 했지만, 그것도 다 저를 걱정했기에 무사한 제 모습을 보자 안도감이 들어 벌어진 일이었다. 그 문제를 떠나서 어쨌든 여긴 회사였고 태오는 지금 복도 한복판에서 소속사 선배와 감정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혹여나 누가 보게 되면 절대로 태오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솔 다음 피팅 차례는 태오였다. 필시 솔이 막 빠져나왔던 방에서 스타일리스트들이 태오를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솔아, 난 그냥 걱정했는데 너 보니까 너무 마음이 놓여서….”

태오의 말에 은겸은 아차 싶었는지, 뒤늦게 미안한 얼굴로 솔에게 해명했다. 태오의 말대로 스토커가, 그것도 칼을 든 미친 사람이 숙소까지 찾아와 접촉한 일을 겪은 사람한테 갑자기 달려들어 끌어안은 건 확실히 솔이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이게 다 저 혼자 마음이 급해서, 안달이 나서 그런 거란 걸 은겸은 알고 있었다. 솔은 제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혼자 걱정하고 혼자 조급해서.

솔은 제게로 한 발짝 다가오는 은겸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만하자는 신호. 솔은 그대로 몸을 획 돌려 태오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은겸에게서 온전히 등을 돌린 채 태오와 눈을 맞추고 눈으로 ‘괜찮아?’라고 물었다. 태오는 제 행동이 퍽 이상하게 비쳤을 거란 걸 알고 있기에 눈짓으로 묻는 솔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 질투와 화로 감정이 뒤범벅되었었는데,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그 동그란 눈동자를 마주하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솔아….”

그저 제 멤버를 챙기며 등을 돌렸을 뿐인 그 행동이 은겸에겐 마치 단호한 거절처럼 느껴졌다. 태오와 솔, 서로 팔을 붙잡고 마주 보고 서 있을 뿐 별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은겸은 그 모습에 이상하리만치 불안감이 들었다. 솔과 그의 멤버들이 스토커의 습격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큰 불안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에 은겸은 나지막이 솔의 이름을 부르며 한 발짝 더 다가갔다.

“미안한데요, 은겸 형. 나중에 연락할게요.”

은겸이 더 다가서기도 전에 솔은 고개를 돌려 작별 인사를 통보했다. 그러고는 은겸이 더 붙잡을 새도 없이 태오의 손을 잡고 그에게서 멀어졌다. 은겸은 멀어지는 두 사람을 그 자리에서 바라보는 것밖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은겸은 깨달았다. 솔에게 확고한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제 고백에 대한 답은 결국 듣지 못하게 될 거라고.

***

솔은 태오보다 앞장서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처음엔 분명 솔이 앞장서고 있었으나 어느새 보폭이 원체 넓은 태오가 앞서가고 솔이 그를 따라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조금 전 솔이 빠져나왔던, 피팅으로 정신없었던 그 방을 지나쳐 그 옆의 비어 있는 작은 방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괜찮아?”

탁, 문이 닫히고 은겸의 시선에서 벗어나자마자 솔은 태오에게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태오는 솔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 대체 뭐가 괜찮냐고 묻는 걸까 싶었다. 솔직히 하나도 안 괜찮았다. 이렇게 치졸한 질투를 하고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자신도 안 괜찮았고 그걸 알면서도 여전히 질투하는 것도 안 괜찮았다. 이런 작은 공간에 단둘이 이렇게 밀착하고 서 있는 것도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럼에도 태오는 솔이 자신을 걱정하는 듯 물어 오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은 영 이상한 태오의 반응에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조금 전 그 상황에서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본래도 썩 은겸을 탐탁지 않아 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항상 선배로서 예의를 깍듯이 갖추고 어지간해선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태오였다. 솔은 혹 태오가 최근 겪은 일들로 제가 그랬듯이 감정적으로 지친 상태가 아닌지 걱정되어 재차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진짜 괜찮은 거지?”

“너야말로 괜찮은 거야?”

솔의 물음에 태오는 대답 대신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나? 나는 괜찮은데….”

엉뚱한 답이 돌아오자 솔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순진해 빠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무방비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태오는 허탈해져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안 괜찮을 건 뭐람. 솔은 아무 생각도 없는데, 저 혼자 질투하고 전전긍긍하는 꼴이 퍽 우스웠다. 태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대고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하아. 안 괜찮아.”

“응?”

조금 전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여 놓고 갑자기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태오의 행동에 솔은 혼란스러웠다. 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 서늘한 벽에 등을 기대고 몸에 힘을 빼니 태오와 솔의 눈높이가 얼추 비슷해졌다. 태오는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솔을 똑바로 응시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순진한 얼굴을 보며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태오는 솔에게 제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았다.

“안 괜찮아. 미안, 애처럼 유치하게 질투한 거야.”

“으응?”

쉽사리 이해되지 않은 듯, 두 귀로 똑똑히 듣고서도 솔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얼마나 더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해 줘야 하는 건지. 태오는 벽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얼추 맞았던 시선이 다시 높아지자 솔의 머리도 자연스레 그를 따라 올라갔다. 태오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하얀 얼굴을 보며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솔, 너랑 태은겸을 질투한 거라고.”

솔이 만화의 주인공이었다면 ‘펑’하는 효과음이 붙었을 것이다. 태오의 그 한마디에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솔은 순식간에 얼굴을 붉혔다. 뽀얗다 못해 하얬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가 되는 게 꼭 물감을 탄 것 같았다. 미숙한 감정 처리에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태오인데 솔이 더 부끄러워져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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