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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1화 (11/198)

Chapter 11

생각해 보면 빙의하기 전에 그는 아플 겨를도 없었다.

〈이선유!! 정말로 돈이 이게 다야?〉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입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 죽은 누나의 아들이라고 이렇게 키워 주는 사람이 있는지! 키워 준 값을 달라는 건데 눈깔을 부라리긴 뭘 부라려?!〉

〈아, 그렇게 억울하면 보육원에 맡겼던 기간은 빼고 계산하든가?〉

〈하! 야, 너 나한테 형이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아빠! 엄마!! 얘 좀 봐! 형이라고 부르라고 지랄해!〉

〈야, 네가 아프다고? 웃기시네. 엄살일 게 뻔하지, 뻔해.〉

빙의를 하기 전에 그에게 상처를 너무 쉽게 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국 집에서 나와 자취를 할 때도 아픔은 혼자 견뎌야 할 몫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앓고 있을 때 텅 빈 공간에 홀로 누워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게 뭐랄까. 굉장히 위로가 되고 가슴 안쪽이 뜨거워졌다.

주치의와 대화를 나눈 대공은 당연히 방을 나설 줄 알았다. 그는 바쁜 사람이었고, 자신은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다. 옆에 하인을 붙여 두는 약간의 수고만 한 뒤 주치의의 보고만 받아도 될 일이었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았던 건데.’

당연히 아무 관심 없이 등을 돌릴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데 다시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사람이 대공인 것도 놀랐지만 이렇게 직접 병간호까지 하는 것을 보자 에드는 기분이 이상했다.

이마에서 머물던 따스한 손길이 떨어져 나가자 에드는 감고 있던 눈을 더 질끈 감았다. 이제는 대공이 정말로 가시려나 보다 하면서.

하지만 미지근해진 수건을 물에 담가 짠 대공이 이마에 수건을 다시 올리고 자리를 지키자 에드는 더 이상 숨을 죽이지 않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대공이 옅게 웃었다.

“잘 잤어요? 에드.”

“아, 안녕하…….”

제대로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목이 아파서 잘 나오지 않을 테니까.”

정말 그랬다. 숨을 쉬는 것도 괴로운데 말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었다.

독이 든 쿠키를 너무 야무지게 쥔 탓이었다.

이제 와 후회한다 해도 별수 없었지만 독의 효과가 최대한 빨리 나오게 하려고 손에 상처가 나도록 움켜쥐고 있었더니 독성에 제대로 치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말이 나오지도 않을 만큼 목이 아프다니.

“몸은 어떻습니까? 많이 무겁고 힘듭니까?”

에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많이 부어 약을 제대로 못 넘겨 그렇다고 하더군요.”

대공이 꼼꼼한 시선으로 에드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니 일어나 앉아 볼까요? 힘들더라도 약을 좀 넘겨 보게.”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뜨거운 숨결이 코끝을 스쳤다. 온몸이 아파서 그냥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마르기도 했고 약을 조금이라도 삼켜야지 빨리 나을 것 같았다.

에드의 등에 손을 밀어 넣은 대공이 그대로 힘을 실어 일으켰다. 부드러운 힘에 위로 쑤욱 딸려 올라가 앉혀지자 에드의 입매가 움직거렸다.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쉽게 앉혀지니 좀 허탈했다.

대공이 숟가락에 옮긴 물약을 에드의 입가에 가져왔다. 쓴 약 냄새가 훅 올라오자 에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대공이 옅게 웃으며 숟가락으로 입술을 살짝 두드렸다.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는 것 같은 움직임에 잠시 머뭇거린 에드는 먹이를 받아먹는 새처럼 입을 벌렸다.

그리고 주르륵.

의지는 넘쳤으나 입으로 들어온 약은 제대로 넘어가지 못했다. 입가로 힘없이 흘러내렸다. 흐음, 작게 침음한 대공이 한 번 더 시도했으나 땡땡 부은 목구멍은 물 한 모금, 약 한 모금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숟가락을 치운 대공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에드.”

“……네.”

“20살이라고 했던가요?”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대답을 하는데도 목이 아프고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벽난로에서 화르륵 혀를 내미는 불길이 대공의 얼굴을 밝게 밝혔다가 어둡게 가라앉혔다. 에드는 그 음영의 잔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럼 현재 사귀는 사람이나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까?”

결단코 대공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잠, 잠깐만요. 뭐, 뭐가 있냐고요?

침대 헤드에 깊게 기대고 있던 에드의 몸이 삐끗, 했다.

“네?”

“이런 분위기에 과거를 파헤치자는 건 아니지만.”

이런 분위기가 아니더라도 파헤칠 것은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에드의 속살을 탐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뭘, 뭘 한다고요?

“약을 넘기기 힘드니 몸에 마력을 불어 넣어 몸의 자가 회복력을 끌어올렸으면 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힘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다르거든요.”

“…….”

“그러니 살결과 살결을 맞대 찾아야 하는데 에드는 몸이 쇠약해진 상태라 움직이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 접촉이 깊어질 수밖에 없어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대공이 가볍게 손을 풀며 말했다.

“그럼, 준비되었습니까? 에드.”

장난스러우면서도 박력이 넘치는 언사였다. 전장의 선봉에 서서 승리를 향해 외치는 울림이 이런 느낌일까?

에드는 괜찮다고 고개를 저으려 했으나 대공이 손을 잡아채는 게 더 빨랐다. 붕대가 감기지 않은 왼손을 부드럽게 잡아 가볍게 주무르자 차가운 손끝에 온기가 오르며 꽁꽁 뭉친 몸이 풀리는 것 같았다.

“……아.”

손목을 타고 오른 대공의 손이 팔꿈치 안쪽을 건드리자 에드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대공은 그런 에드의 반응을 꼼꼼히 살폈다.

“그럼, 에드.”

어깨까지 부드럽게 타고 올라온 손이 에드의 몸에서 떨어졌을 때 대공의 붉은 눈동자가 에드를 직시했다.

“조금 더 실례.”

그리고 셔츠 안을 파고드는 손에 에드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불편한데 좋고 어색한데 몸에 따뜻한 기운이 도니 대공의 기운을 더 받고 싶은…… 부드럽게 아랫배를 문지르는 손바닥의 감촉에 몸이 풀리면서도 움찔움찔하며 얼어붙자 대공이 옅게 웃었다.

“긴장하지 말고.”

이 상황에 긴장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어떻게 긴장을 안 할 수 있을까?

남의 손, 그것도 처음 보는 대공의 손으로 배가 살살 문질러지는데.

그 순간, 아랫배를 찌르르 관통하는 아픔이 느껴지자 에드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리고 그 아픔이 점점 더 커지자 에드는 이를 악물었다.

“아.”

참으려 했는데 대공이 에드의 턱을 엄지로 가볍게 짚어 눌렀다. 그 힘에 입술이 살짝 벌어지자 짧게 신음이 샜다.

“자꾸 참으려고 하지 말고.”

“……으읏.”

“몸에 퍼진 독이 모이는 거니까 무서워하지도 말고.”

대공이 흘려보내는 힘에 반응을 하는 건지, 점점 속이 꼬이는 느낌에 에드는 저도 모르게 대공의 팔을 붙잡으며 매달렸다.

‘어?’

그리고 그 순간, 이마에 무언가가 닿았다. 에드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대공과 지척에서 시선이 맞닿은 에드의 동공이 흔들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짧은 접촉…… 그건 입맞춤이었다.

이마에 닿았던 대공의 따뜻한 감촉에 배 속을 괴롭히던 기분 나쁜 아픔이 흐려졌다. 대공이 입술을 통해 불어 넣어 준 힘 덕분이었다.

마법으로 힘을 불어 넣는 방법 중 이마를 통하는 건 신성하다고 알려져 있는 만큼 효과가 좋았다. 그보다 더 빠르고 깊은 효과를 보기 위해선 점막을 통하는 경우도 있었고…….

에드의 이마를 가볍게 문지른 대공이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 붉은 입술이 눈에 박힌 것처럼 에드의 시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반응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

“…….”

“그럼, 한 번 더.”

다시 이마에 닿는 따뜻한 기운과 함께 에드의 달아오른 뺨이 벽난로의 불길에 따라 발갛게 드러났다가 어둡게 삼켜졌다.

이번엔 조금 더 긴 입맞춤이었다.

* * *

〈그럼, 한 번 더.〉

순간, 에드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귓가를 타고 흐르는 대공의 목소리가 가슴골에 고이더니 아랫배를 찌르르 울렸다. 그리고 그, 그곳으로 피가 쏠리는 것이 느껴지자마자 찬물을 확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으로 소름이 확 번졌다.

동시에 퍼억, 옆구리를 들이받는 강력한 힘에 눈을 번쩍 떴다.

“…….”

하아, 하아, 하아.

소리를 죽인 숨을 몰아 내쉬며 에드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높다랗고 묵직한 침대 기둥 아래로 푸른색 얇은 장막이 쳐져 있었다.

벽난로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장작을 넣은 지 시간이 꽤 지났는지 불씨만 살짝 살아 있는 상태였다.

눈을 팍 뜨기 전 에드가 느꼈던 것처럼 방 안을 살라 먹을 듯이 이글이글 타오르게 불을 피운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봄이었다, 봄.

제국 남부에 자리 잡은 헤린스 백작가는 보름 전부터 벽난로를 때지 않아도 긴 밤을 보낼 수 있을 만큼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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