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3화 (13/198)

Chapter 13

‘나는 대공과 로넨의 인생에 지나가는 등장인물 1로 남고 싶은데.’

에드는 그물을 끌어 올리듯이 이불로 하체를 감쌌다. 머리 아픈 생각은 뒤로 미뤄 두고 조금 더 잘 생각이었다.

“……로넨 도련님, 그건 나중에 대공 전하와 상의하…….”

그때 똑, 똑,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울렸다.

“네.”

로넨이 대답하자 방문이 열렸다.

에드는 실감했다. 로넨의 환경이 변했다는 것이. 전에는 로넨이 있든 말든 아무나 문을 벌컥벌컥 열지 않았던가.

동시에 에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연보라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낯설지 않았다.

‘아, 저 머리카락 색이라면 물어볼 것도 없이 제이논이네.’

에드의 시선이 제이논에게서 떨어지지 않자 로넨이 소개했다.

“아, 에드. 저분은 아스넬 형의 부하인데, 에드가 나을 때까지 곁에서 도와주실 거야.”

“저를 말입니까?”

“응. 수프도 직접 끓여 주고, 침구도 갈아 줄 거야.”

원래 제이논은 이렇게 누군가의 시중을 들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머리는 좋았고 충성심도 높았다. 능력과 함께 임기응변도 좋아서 일찌감치 대공의 왼팔을 차지한 인물이었다.

평소라면 그가 저 같은 하인에게 발이 묶일 일이 없었다. 자기도 전쟁터에 나가겠다며 떼를 써도 북부를 지키라며 대공이 떼어 놓고 갈 정도였는데…… 에드는 그의 이마에 커다랗게 붙은 반창고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보낸 편지를 감춘 것이 대공에게 딱 걸린 모양이구나.’

“수프를 직접 끓여 주신다고요?”

“네, 에드 님. 저는 아스넬 대공 전하의 부하인 제이논입니다. 앞으로 에드 님의 건강이 호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모시겠습니다.”

트레이에 담긴 식사를 내려놓으며 제이논이 대답했다.

그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 냉랭하고 예민했다. 시니컬한 면모도 가지고 있었기에 남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은 없었다. 아스넬 대공이 고아인 그를 구해 주지 않았다면 일찌감치 뒷골목에서 생을 마쳤을지도 몰랐다.

“그렇습니까?”

“네.”

트레이를 내려놓느라 허리를 숙이며 대답하는 그에게 에드는 속삭였다.

“그래서 편지는 몇 통을 감췄습니까?”

제이논이 편지를 감추지 않았다면 독을 먹지 않아도 되었을 터. 그랬으면 지난밤에 그런 망측한 꿈을 꾸는 일도 없었을 거였다.

그래서 에드는 제이논을 첫 번째 타깃으로 삼았다. 차갑고 달콤한 첫 번째 복수의 상대로.

“…….”

“30통도 넘게 보냈는데.”

“8통을 보내셨겠죠.”

“당신이 감춘 게 맞긴 하군요?”

제이논의 미간이 작게 찡그려졌다.

“그럼 감춘 편지들 중에 대공 전하는 몇 통이 걸리셨습니까?”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감춘 편지들을 다 걸린 건 아닌 모양이었다.

대공에게 더 걸릴 편지가 남아 있다면 그러잖아도 갑인 에드가 슈퍼갑이 되어 버린다. 그가 대공에게 진실을 밝힌다면 제이논의 이마에 붙은 반창고의 크기가 더 커질 수도 있었다.

에드는 로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로넨 도련님, 아까 말을 하다가 멈췄는데 말입니다. 제가 3달 정도 요양을 하고 북부에 가면 어떨까 합니다.”

물론, 말만 이랬지 헤린스 백작가에 그렇게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어! 알았어. 에드.”

“저도 함께 간다면 몸이 다 나은 뒤에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북부로 가는 길이 가까운 것도 아니니까요.”

에드의 말을 들은 제이논의 미간이 파사삭 구겨졌다.

대공이 북부성을 오래 비워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길어야 열흘, 조금 더 길어 봐야 보름 정도로 생각했을 일정이 예상보다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로넨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알았어. 그렇게 하자.”

이유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로넨을 보며 제이논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제이논의 멍한 표정에 위로 올라가려는 입매를 달래며 에드는 숟가락을 들었다. 이번에는 제이논이 가져온 수프를 맛볼 차례였다.

어릴 때 혼자 컸고, 대공 몰래 따라나선 전쟁터에서 식사를 담당했던 제이논은 요리에 일가견이 있었다. 손도 빠르고 맛도 잘 냈다.

수프를 떠먹자 소설 속 설명이 바로 이해되었다.

‘따뜻하고 맛있네.’

그러나 에드는 바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제이논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음, 수프가 너무 짭니다.”

“……네? 간을 전혀 하지 않은 수프가 짜다고요?”

“네, 그러니 다시 끓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

짧게 신음한 제이논이 이마를 긁적였다.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다음엔 수프가 싱겁다고 하실 예정이시고요?”

역시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빨랐다.

“아뇨, 너무 묽다고 하려고 합니다.”

동시에 제이논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아, 하하. 난처하게 웃으며.

에드의 첫 번째 복수 상대, 제이논의 수난기였다.

* * *

욕조에 거품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가슴까지 올라온 물이 따뜻했다.

‘너무 심술을 부렸나.’

내 것도 아닌 권력을 가지고.

그러나 에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며칠이나 정신을 못 차리고 누워 있었는데 그에 비하면 가벼운 벌이었지. 겨우 어제 하루 제이논을 괴롭힌 것뿐이었는데.’

돌을 씹은 것 같은 제이논의 얼굴에 독에 중독된 일이 보상받는 건 아니었지만 마음속의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불행을 보며 즐거워하는 악당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 사이다는 먹어도 될 것 같았다.

그러게 대공께 편지를 바로 보여 드렸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을.

물론, 로넨을 미끼로 가짜 정보를 주는 놈들도 많았고 황실에서도 로넨을 데리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곤 했으니 그 마음이야 이해가 가긴 했지만.

에드는 욕조에 몸을 깊게 담갔다. 분홍색 입욕제가 생크림 같은 거품을 몽글몽글 풀어냈다.

별채 오두막이 아닌 백작 저 본관의 큰 방 욕실이었다.

갑작스럽게 에드를 찾은 백작 부부는 방을 바꿔 주었다. 평소엔 백작 저의 방이 펑펑 남아돌아도 절대 내주지 않았을 본관 2층에 있는 방이었다.

로넨의 방 역시 본관 2층으로 옮겨진 상황이었다. 크고 넓은 방이었다.

〈에드가 건강을 회복하는 동안 신세를 지겠습니다.〉

알고 보니 대공의 말에 알아서 빌빌 기느라고 바꿔 준 것이었다.

대공이 이 정도만 신경 써 주면 됐다고 손을 내저어도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손발이 다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석 달까지는 아니더라도 당분간 백작가에 머물면서 백작 부부의 속도 좀 태우고, 로넨을 괴롭힌 사람들을 손봐 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입욕제 장미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평소라면 점심 식사 준비로 바빴을 시간인데 이러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뭐라도 손을 놀려야 할 것 같아 에드는 물을 찰박였다.

로넨을 괴롭힌 이들에게 쓴맛을 보여 주기로 시동을 건 날이었다.

* * *

방 밖에선 제이논이 대기하고 있었다. 적성에 맞지 않는 시종 일을 해서 그런지 눈 밑으로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오늘부터 식사를 본관 대식당에서 하기로 했기에 에드가 6일 만에 침대 생활을 청산할 수 있게 되었다.

“에드, 대식당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제이논.”

그를 따라 움직이자 매끈한 대리석 바닥이 구둣발에 착착 감기는 것 같았다.

‘본관은 계단부터 다르구나.’

끼이익, 소리도 안 나고.

정돈된 계단을 밟고 1층 복도에 내려가자 본관 대식당의 커다란 문 앞에 로넨이 서 있었다.

“와.”

멀리서 봐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옷이 날개라더니 그 말이 맞았다.

대공과 로넨이 다시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았건만, 그사이 로넨은 살이 올랐고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거기다 후줄근한 옷이 아니라 정장을 쫙 빼입으니 미모가 제빛을 되찾았다.

원작에서 서브 캐릭터들은 물론이거니와 세기의 미인들도 로넨의 미모에 상대가 안 된다고 했는데 이제야 실감이 확 났다.

에드를 발견한 로넨이 뽀르르 뛰어왔다. 복도 끝에서 여기까지 단숨에 뛰어와도 몸에 제대로 맞지 않는 옷자락이 그의 앞길을 방해하는 일은 없었다.

“로넨 도련님, 진짜 멋지십니다.”

에드의 칭찬에 로넨의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뛰어오느라 그러잖아도 발갛게 달아올랐던 뺨도 더 붉어졌다.

“에, 에드도 진짜 멋져!”

“감사합니다.”

에드는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로넨이 그 모습을 빤히 올려다보며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손에 쥐고 달려온 선물을 내밀었다.

“자, 이거.”

“이게 뭡니까?”

“사탕이랑 초콜릿으로 만든 꽃다발이야. 다 나은 축하 선물. 내 건 이르텔 경과 함께 만들었고, 이건 아스넬 형이 만들어 주신 거.”

두 손 가득 쥔 사탕 꾸러미를 넘기는 손길에 에드는 잠시 말을 잃었다. 아팠다 나은 걸로 선물을 받다니…… 이런 이유로 선물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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