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46화 (46/198)

Chapter 46

로지와 담소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난 에드는 마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텐스에게 말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같이 갈까?”

“아닙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고개를 저으며 텐스에게 대답한 에드는 마차에서 꽃다발을 꺼내 보육원과 이어져 있는 구불구불한 길을 천천히 올랐다.

이 좁은 길 위로 빽빽하게 서 있는 나무들을 따라 들어가면 남부 시내에서도 보일 만큼 높고 가파른 헤일산으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그 굽이굽이 이어진 산길을 따라 오르면 산허리에 구름을 끼고 있는 중턱에 이르는데 작은 개울가 근처에 자리 잡은 빨간 지붕의 집이 에드가 살던 곳이었다.

이제는 말라 버린 우물과 적막함에 사람이 사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에드는 개의치 않고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익.

이음새가 제대로 맞지 않는지 철문이 소리를 울렸다.

“……저번에는 괜찮았는데.”

대문을 앞뒤로 움직여 보던 에드는 창고로 발길을 돌렸다. 꽃다발을 난간에 내려놓고 공구를 찾아 들고나왔다. 대문에 기름칠도 해 보고 이음새에 땜질도 하며 손을 봤다.

아스넬 대공에게 편지를 보낸다는 핑계로 오르막길 마을에 방문할 때마다 보육원에 들러 로지 얼굴을 보고 이 집에 꼭 들렀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집을 고쳤다.

처음엔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한쪽 벽이 허물어진 창고를 보수했고, 천장에서 물이 흐른 흔적을 발견하곤 지붕을 수리했다.

먼지만 가득한 주방도 청소하고 재로 막혀 있던 굴뚝도 정리했다.

호젓한 푸른 산 아래에서 퇴색되어 가던 빨간 지붕도 새로 칠했고 녹슬었던 대문도 파란색으로 옷을 갈아입혔다.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하기는 어려웠지만, 에드는 성심성의껏 집을 가꿨다. 휴가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들러서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대문을 손질한 에드는 빗자루로 마당을 가볍게 쓸었다.

그새 또 산에 사는 작은 친구들이 놀다 갔는지 새 발자국이며 고양이 발자국이 쓸어 놓았던 마당 위로 쫑쫑 박혀 있었다.

마당을 쓴 에드는 손을 탈탈 털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저분한 곳이 더 이상에 눈에 띄지 않았다.

빗자루를 내려놓은 에드는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작은 침상과 책상, 테이블과 의자가 가지런히 놓인 방을 둘러보았지만 깨끗하게 정돈되어 달리 손을 댈 곳은 없었다.

“…….”

모든 점검을 마친 에드는 마지막으로 창문들을 잘 걸어 잠갔다. 세찬 비바람이나 폭설에 손상되지 않게 단단히 확인하며 잠갔다.

잠시 방 안을 더 둘러본 에드는 밖으로 나왔다. 난간에 놔둔 꽃다발을 집어 들고 집 뒤쪽의 볕이 잘 드는 터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작은 무덤이 하나 있었다.

에드의 아버지, 덴의 무덤이었다.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은 에드는 묘비로 삼은 바위 주위로 자란 잡초를 정리했다.

로지의 말에 따르면 덴은 오르막길 마을에 들이닥친 마물을 상대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는 마물이 나타나자 망설임 없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나섰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마물을 죽임으로써 마을을 구했다.

에드는 덴을 자랑스러워했고 아버지가 자신을 떠난 것을 몹시 슬퍼했다. 글을 잘 쓰지 못했지만 그림으로 일기를 남겨 놓은 흔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들이었다.

그리고 오르막길 집 뒤편에 자신을 묻어 달라는 덴의 유언에 따라 무덤은 이곳에 자리했다. 그 옆에는 그가 그리워하던 에드의 어머니 자리도 함께 있었다.

무슨 일 대문인지는 몰라도 오르막길 마을에 오기 전에 그들은 헤어졌고, 덴은 그녀에 대한 건 에드에게도 말을 아낀 것으로 보였다.

로지의 말을 들어보면 그의 어머니는 이곳에 오기 전에 모종의 사고로 죽은 것으로 보였다.

에드는 덴의 무덤 앞에 서서 말했다.

“내일 남부를 떠나 황도로 향합니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시원했다.

“황궁에 들어가 황제 폐하께 인사를 드리고 나면 북부로 갈 예정이고요. 그러고 나면 오르막길 마을에 한동안 걸음을 옮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에드가 처음 빨간 지붕의 집에 들어섰을 땐 아무 말 없이 무덤을 정리했지만, 두 번째 걸음 했을 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세 번째 방문했을 땐 친아들처럼 살갑지는 못했지만 속에 있는 말을 조금씩 꺼내 놓았다.

“매해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2년에 한 번씩은 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때는 조금 더 여유롭게 머물다 가겠습니다.

덧붙이는 에드의 정수리 위로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가 분홍빛 색감을 수놓고 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는데요…… 그냥 저는 저답게 살아보고자 합니다.”

말을 마친 에드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았다. 이선유가 에드로 빙의한 이후 제 앞가림하느라 바빠서 생각할 여유가 없었으나 이제는 삶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는 겨를이 생겼다.

그래서 에드는 다짐했다.

아주 훌륭한 위인은 되지 못하겠지만 타인에게 손가락질받는 사람은 되지 않겠다고.

‘진짜 에드’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겉껍데기를 입고 신세를 지고 있는 이상 오르막길 마을 출신의 에드란 이름에 먹칠은 하지 않겠다고.

푸르고 붉은 아름다운 하늘을 올려다본 에드는 시선을 내렸다. 외로운 무덤가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푸릇푸릇하게 돋아난 풀들을 손으로 가볍게 쓸었다.

낮게 다짐하는 목소리가 무덤가 위로 울렸다.

“꽃을 들고 꼭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집을 나선 에드는 산등성이를 타고 짙어지는 노을을 머리에 이고 다시 로아 보육원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금방 오겠다며 나선 길이 생각보다 늦어져 내리막길을 걷는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텐스를 기다리게 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리고 로아 보육원 대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우뚝 발을 멈췄다.

“아스넬 형! 이 그네는 노란색으로 칠하면 어떨까요?”

“응, 그래. 그것도 좋을 것 같은데?”

“로넨 도련님, 노란색보다는 초록색이 좋지 않을까요?”

“음, 그럴까? 하지만 텐스는 색에 좀 민감하지 않은 것 같아서 신뢰하기가 어려운데…… 쿠키를 만들 때도 갈색이 나도록 태우는 것도 많았고.”

“그건 태운 게 아니라 더 맛있어 보이게 장식한 것이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로넨 도련님.”

목소리에도 색이 있다면 지금 들리는 이 목소리들은 분명히 명도와 채도가 모두 높으리라.

“아니던데, 제이논에게도 물어봤는데 태운 게 틀림없다고 하던데?”

“허억, 로넨 도련님! 그건 절대 비밀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셔서 목숨을 걸고 말씀드린 건데!”

“야, 제이논. 이리 와, 응? 이리 와 보라고. 목숨 걸고 말했다 하니 유언을 남길 시간은 필요 없겠지? 그러니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지 말고 빠르게 이리 튀어 오자?”

“앗! 잠깐만, 텐스! 제이논! 그, 그게 아니라!”

보육원 한편에 만들어진 놀이터에서 들리는 활기찬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시원한 바람결에 하늘하늘 휘날리는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얼굴을 마구 때리는 제이논을 필두로 붉은 머리를 지닌 텐스가 보육원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달리고 있었다.

그 뒤를 로넨이 부지런히 따라붙었다. 어린아이의 다리로 어른들의 뜀박질을 따라잡기 역부족이었을 텐데도 로넨은 포기하지 않았다.

“텐, 텐스! 제이논!”

시끌벅적했다.

‘……아니, 왜 이곳에 대공과 로넨이 있는 거지?’

로아 보육원으로 들어서다 멈칫, 했던 에드는 옅게 웃었다.

보육원 놀이터를 보수하기 의기투합한 것 같은데 어째 딴짓에 빠지는 시간이 더 많아 보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예민해지지 않았다.

빡빡한 일정에 맞춰 진행되는 일이 아니었고, 다들 노느라 바빠도 북부 대공이 묵묵히 손을 놀리고 있었으니까.

방금 로넨이 노란색으로 칠할까? 했던 그네도 이미 대공의 손에 노란색 도료로 물들어 말끔하게 정돈이 되었다.

주위를 훑으며 상황을 파악한 에드는 옷소매를 반듯하게 접어 올리곤 대공의 곁으로 다가갔다.

놀이터를 수리한다면서 자기 옷에 묻힌 도료가 더 많은 듯한 세 명은 여전히 운동장을 뛰어다니느라 바빴다. 오르막에 있는 보육원이라 경사가 있는 운동장이었는데도 평소에 얼마나 단련이 된 체력들인지 힘들어하는 기색도 없었다.

‘역시 아스넬 대공이었구나.’

마을로 올라오는 길목을 손질한 것도, 가시덤불을 정비한 것도, 로아 보육원을 수리한 것도…… 대공이 이렇게 신경을 써 줄 줄 몰랐던 에드는 인사를 꾸벅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이제부턴 제가 하겠습니다.”

“내 즐거운 일거리를 빼앗아 갈 생각하지 말고 같이 고민해 보지 않겠어? 에드? 이쪽 그네는 어떤 색으로 칠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말을 놓은 대공이 에드를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