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9
마차가 달리는 첫 번째 목적지는 남부의 작은 도시 일라였다.
일라는 1년 내내 기후가 온화했고 잔잔한 바람이 불어 바람의 도시라 불리는 곳이었다.
일라가 멀지 않았음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붙은 길을 지나치자 싱그러운 풀 향기, 나무 내음, 꽃 냄새가 열린 마차 창문으로 들어찼다. 코를 찌를 정도로 향긋하고 청량한 향기였다.
그리고 곳곳에서 활기차고 목청을 높여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현수막이 너무 그쪽으로 붙지 않았어?”
“아니야! 바람에 흔들려서 그렇지 중앙으로 잘 붙었다고!”
“이번에 만들 샌드위치엔 산딸기 잼을 더 넣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아까 건 달고 맛있긴 한데 새콤한 맛이 부족한 것 같은데.”
“그럼 레몬 꿀을 조금 넣어 보는 건?”
“아! 그것도 괜찮겠네요!”
일라는 오늘 저녁부터 열릴 축제 준비로 한창인 것 같았다.
제이논에게 들으니, 일라는 매년 이맘때쯤 축제가 시작된다고 했다.
제국의 봄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의 신인 ‘무즈’의 탄생을 기리고 올 한 해도 무탈하게 잘 보내기를 기원하는 축제가 일주일간 열린다고 한다.
로넨은 창문에 딱 붙어 활기차고 떠들썩한 밖을 내다보았다. 마차가 지날 때마다 한쪽으로 물러섰다가 마차가 지나가면 빠르게 다시 모여드는 사람들의 모습에 생기가 넘치고 즐거움이 가득했다.
마차는 축제 준비로 한창인 대로를 지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축제의 흥분은 오솔길에도 서려 있어 금박, 은박을 품은 종이들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걸려 있었다. 바람결을 타고 흐르는 종이가 환한 볕을 안고 반짝반짝한 빛을 뿌렸다.
말과 마치의 행렬이 멈춘 건 큰 규모의 저택 앞이었다.
저택 안에서 나온 관리인이 고개를 깊게 숙여 인사하며 커다란 철제문 안으로 말과 마차를 안내했다.
정비된 정원으로 들어선 마차에서 대공이 내리자 사용인들이 대공을 맞이하기 위해 저택 입구에서부터 도열해 있었다. 그중 가장 나이 지긋한 남성이 인사를 하며 대공에게 말했다.
“먼 길 오시느라 힘드시진 않으셨습니까? 대공 전하.”
“나 때문에 축제를 즐기고 쉬어야 할 시간에 부산스레 움직여야 했던 게 아닌지 모르겠군, 집사장.”
“아닙니다, 제이드 공작님의 별장에서 대공 전하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공 전하께서 머무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고맙군.”
“달리 불편한 부분이 없으시다면 식사를 준비하도록 할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대공 전하.”
대공이 정원에 들어선 말과 마차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그럼 식사부터 하도록 하지. 신경 써 줘서 고맙군. 제이드 공작에게 큰 신세를 졌다 전해 주게.”
“아닙니다, 공작님께서도 괘념치 마시라는 말씀 남기셨습니다. 저택 안에 쉴 곳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대공 전하. 우선 짐을 푸시고 휴식을 취하고 계시면 방으로 식사를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이논과 이르텔이 마차와 말에서 내린 기사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했다.
일라까지는 함께 움직였지만, 이후에는 황도로 올라가는 팀과 북부로 향하는 팀이 나뉘었다.
그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쓸 방을 나누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기사들과 대화를 마친 제이논이 에드와 세나 곁으로 다가오더니 열쇠를 나눠 주며 말했다.
“에드는 2층 세 번째 방을 쓰고, 에린과 세나는 2층 다섯 번째 방을 쓰면 돼. 에린의 동생들은 그 옆방을 쓰면 되고. 지내면서 불편한 점이 있으면 나한테 바로 말하고.”
“네, 알겠어요. 제이논.”
“알겠습니다.”
“에린은 동생들과 화장실에 갔다고 했으니 세나는 에린이 방에 들어오면 내게 알려 줘. 아, 그리고 식사는 30분 후쯤 먹을 텐데 배가 고프면 우유와 치즈를 줄 테니 말하고.”
“네, 알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세나와 에드가 나란히 대답하자 제이논이 손뼉을 짝, 쳤다.
“그럼 각자 방으로 올라가 쉬고 이따가 보자.”
에드는 짐가방을 챙겨 저택으로 들어섰다. 저택의 1층은 커다란 홀로 이루어져 있었다.
잠시 멈춰 서서 크고 높은 홀 천장을 올려다보던 에드는 고개를 돌렸다. 너른 창으로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둥글고 계획적으로 잘 관리된 정원 조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오가 봤으면 눈을 반짝반짝 빛냈겠는데?’
피식 웃은 에드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오르자 폭신폭신한 카펫이 구두에 부드럽게 눌렸다. 그 계단을 천천히 올라 방 앞에 도착한 에드는 짐가방을 추스르며 문을 열었다. 작고 아늑한 방이었다.
짐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에드는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몸이 흐늘흐늘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대로 뒤로 넘어가자 폭신폭신한 침대 매트리스가 보드랍게 에드의 등을 받쳤다. 침대 아래로 내려온 다리를 가볍게 달랑거리다 멈췄다.
‘이불이 더러워지면 곤란하니까.’
구두와 구두를 가볍게 맞붙이며 신발을 벗은 에드는 시원한 느낌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옅게 웃다가 시선을 돌렸다.
우아한 곡선으로 마무리된 침대 기둥과 잘 정리된 캐노피가 달린 침대 지붕으로 시선을 준 에드는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느꼈다.
‘피곤하긴 피곤했던 모양이다.’
대공과 마차에 마주 앉아 있는 내내 긴장을 한 탓이었다.
마차에서 잘만 자 놓고 대공 탓을 하긴 그랬지만 이렇게 혼자 남자 바로 몸에서 바로 신호가 왔다. 등을 쭉 펴고 어깨를 꼿꼿하게 세우며 신경을 쓰고 있던 것이 심신에 제법 부담이 되긴 했던 모양이었다.
에드는 팔목으로 눈을 가리며 눈을 감았다.
‘조금만 자고 일어나자.’
* * *
“어?”
다시 눈을 떴을 때 에드는 해가 가라앉고 달이 뜬 시간대임을 깨달았다.
방 안이 어두웠고 침대 지붕에 걸려 있던 캐노피가 침대 양옆에 쳐져 있었다.
작게 하품하며 침대 기둥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에드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바람에 온몸을 부드럽게 받치고 있던 침대 매트리스가 가볍게 흔들렸다.
에드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뭐지?”
분명 침대에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등만 기댄 채 잠들었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침대에 고이 눕혀진 것도 모자라 이불이 목까지 덮여 있었다.
캐노피를 걷어 잘 정리해 침대 지붕으로 올리며 에드는 주위를 살폈다. 얼마나 잘 자고 일어났는지 정신이 맑았고 무거웠던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 두었던 구두가 침대 아래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누가 이렇게 나를 신경 써 준 거지?”
방 안에 마련되어 있는 둥근 테이블에 음료와 함께 여러 가지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작게 타오르는 초 위에는 따뜻한 스튜가 들어 있는 조그마한 냄비가 올려져 있었다.
얼음물 통에 담긴 우유병은 여전히 시원한 물기를 머금은 채 따스한 차 옆에 놓여 있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에드는 자리에 앉은 후 먼저 따뜻한 수프를 입에 넣었다. 천천히 배 속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낀 에드는 이번에는 부드러운 빵을 스튜에 찍어 먹었다.
배 속에 음식이 들어가자 에드는 자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던 허기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마시기 좋은 따스한 차로 입을 축인 에드는 테이블에 잘 차려진 음식을 다시 하나하나 천천히 음미해 나갔다.
‘아, 배불러.’
양껏 먹고 나자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에드는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댔다. 배가 부르니 점점 몸이 늘어지고 정신이 멍해졌다.
‘자고 일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에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기를 정리했다. 그 후 테이블 옆에 높인 트레이에 그릇을 쌓아 문가로 움직였다. 주방에 가져다 놓을 생각이었다.
“…….”
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보이는 인영에 에드는 뒤로 스스슥 움직여서 도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문에 이마를 기대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왜 또 대공이 여기에 있어?’
환한 보름달이 내리 떨어지는 복도 창가 아래에 대공이 서 있었다.
어깨에 많은 짐을 들었지만, 인내로 감내하고 무결하게 일을 처리해내는 통솔자의 뒷모습이 저런 것일까?
“…….”
방문에 이마를 기댔던 에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놓고 이마를 긁적였다.
동시에 얼마 전 이마에 닿았던 대공의 입술이 생각나자 눈 밑이 잘게 떨렸다. 이마를 긁적이던 손이 멈췄다.
손끝이 간질간질하고 이마에 더운 열이 번지는 느낌이었다.
〈키스해 줄까? 에드?〉
〈결계를 무너뜨리면 키스하러 올 거야.〉
〈이번엔 입술에.〉
“……아니, 그건 또 왜 생각나는 건데?”
바지에 손바닥을 박박 문지르며 툭, 내뱉은 에드는 손을 들어 이마를 북북 문질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이마를 탁, 탁 치며 이마에 오르는 열을 내리려 해 봤다.
하지만 지워지라는 대공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방금 봤던 뒷모습이 눈앞을 장악하자 에드는 끄응,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을 손으로 짚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잠도 안 자고 밖을 내다보는 대공의 뒷모습이 왜 이렇게 눈에 밟히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