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넬 형의 콧대는 이렇게나 높은데 나는 왜 그렇지 않을까? 형의 반도 안 되는 것 같아.”
에드는 작게 웃으며 담요를 가방에 접어 넣었다.
“도련님은 아직 성장기시니까요. 곧 하루하루 쑥쑥 자라 어른이 되시면 콧대도 오뚝하게 솟을 겁니다.”
“정말 그럴까?”
“네, 게다가 지금도 엄청 높으신걸요? 다른 어떤 귀족 자제분들을 보아도 도련님만큼 콧대가 살아 있는 분들이 없었습니다.”
그 말에 기분이 좋아져 씨익 웃은 로넨은 그의 베개를 들고 와 가방에 넣었다. 헤린스 백작가에 있을 때부터 쓰던 것이라 그에게 퍽 소중한 모양인지 이것만큼은 꼭 그가 챙겨 넣었다.
에드는 방을 둘러보며 더 빠진 게 없나 살펴보다가 가방 뚜껑을 덮었다.
황궁을 들어왔을 때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같았는데 나선다고 생각하니 짐이 가득 든 가방을 들어도 전혀 무겁지가 않았다.
“아, 맞다. 에드. 그런데 오늘 일찍 일어났어?”
갑작스러운 로넨의 말에 가방이 잘 닫혔는지 살펴보던 에드는 뒤로 돌았다.
“네?”
“아침에 일어나서 방에 가 보니까 에드가 없더라고.”
“……아.”
“그래서 대신 텐스에게 머리를 넘겨 달라고 했는데, 어때? 괜찮아?”
에드는 무릎을 짚고 로넨과 시선을 맞추며 대답했다.
“네, 아주 멋지십니다.”
로넨은 발그레해진 볼을 숨기지 못한 채 웃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럼 오늘 나랑 어디 좀 가 주면 안 돼?”
에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를요?”
로넨은 까치발을 들고 에드의 귀에 입을 붙이며 작게 대답했다.
“어…… 지금은 비밀로 할래.”
“어…… 지금은 비밀로 할래.”
로넨이 속삭이는 말에 에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어디를 가고 싶어 하는 걸까? 궁금했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답했다.
“네, 함께 가요. 도련님.”
“응, 응. 같이 가는 거다?”
“네, 도련님. 손가락 약속을 할까요?”
“어, 그러자!”
오랜만에 등장한 손가락 걸기에 로넨이 환하게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손을 흔들 정도로 신이 난 로넨에게 에드가 새끼손가락을 걸자 로넨이 엄지를 까딱이며 도장을 찍으라고 재촉했다.
“얼른 엄지도 꾹꾹 찍고.”
이것까지 해야 완벽한 약속을 하는 것이라는 걸 기억해 낸 로넨을 바라보며 에드는 손도장을 꾹꾹 눌러 찍었다.
그제야 안심한 로넨은 에드와 손가락을 굳게 걸고 있다가 한참 만에 손가락을 뗐다. 그러더니 쫄래쫄래 걸어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설치한 가림막으로 향했다.
‘뭘 하려는 걸까?’
눈으로 로넨을 따르다 그가 가림막 안으로 몸을 쏘옥 들이미는 걸 보고 에드는 부러 그를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가림막 사이로 고개를 빠끔 내밀고 밖을 내다본 로넨은 에드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 도로 안으로 들어가더니 손을 허공에 몇 번 휙휙 휘둘렀다. 손에 힘을 싣고 움직이는 동작이 검술 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
에드는 반투명한 가림막 위로 흐릿하게 비치는 로넨의 모습을 바라보다 그가 동작을 멈추는 것을 보고는 다 챙긴 가방 뚜껑을 괜스레 열었다 닫으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로넨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오자 에드가 짐가방을 들었다.
“에드, 이제 나가자.”
“네, 도련님.”
“그런데 가방이 무겁지 않아? 내가 도와줄까?”
“아니에요, 도련님. 전혀 무겁지 않아요.”
“혹시 이따가 힘들면 말해 줘야 해?”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에드, 약을 먹으니 좀 튼튼해진 것 같아?”
로넨은 에드의 빈손을 잡으며 물었다. 제 손을 감싸는 작고 따스한 감각을 느끼던 에드는 로넨의 질문에 “윽.” 소리를 냈다.
“왜, 왜요? 도련님? 약을 드시니 몸이 좋아지신 것 같으세요?”
“그게 말이야,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스넬 형처럼 쑥쑥 크려면 식사도 거르지 않고 약도 잘 챙겨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에드는 가림막 안에서 검술을 연습하던 로넨을 상기하며 그가 조바심을 느끼고 있음을 짐작했다.
‘황궁에 들어온 이후 생긴 일들로 뭔가 초조해진 모양인데.’
그래도 약이 늘어나는 건 반대였다. 로넨이 먹는 약이 늘어난다면 그 여파가 자신에게 미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에드는 로넨의 조바심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로넨 도련님께서는 이미 쑥쑥 자라고 계시는데요? 지난달에는 분명히 제 배쯤에 정수리가 닿았는데요, 지금은 이것 보세요. 명치까지 올라오는걸요?”
“진짜로 큰 거 같아?”
“네,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로넨 도련님은 나이에 맞는 속도로 성장하고 계시니까요.”
* * *
에드가 로넨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을 때 대공은 이르텔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에드는 밝은 햇살 아래에 선 대공을 슬쩍슬쩍 살피며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어제보다 얼굴이 좋아지셨어.’
환한 밖에서도 여지없이 대공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자 마음을 내려놓은 에드는 짐수레에 짐을 정리했다.
그리고 마차에 오르기 위해 뒤로 돌자 로넨이 마차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손으로 머리를 짚어 잰 키를 펜으로 마차 문에 표시하려다 뭔가가 마음에 안 드는지 다시 머리에 손을 올리며 끙끙거렸다.
에드는 로넨에게 다가가 물었다.
“뭐 하세요? 도련님?”
“아, 내 키를 표시해 두려고. 내일은 얼마나 컸나 보게. 그런데 자꾸만 틀리는 것 같아.”
“그럼 제가 해 드릴까요?”
“그럴래?”
에드에게 펜을 넘기며 로넨이 빙글 뒤로 돌았다. 펜을 든 에드는 신중하게 로넨의 키를 마차에 표시했다. 표시가 끝나자 뒤를 돈 로넨이 마차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너무 작은데.”
하며 고개를 갸웃하던 로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에드 키도 표시할까?”
“제 키요?”
“응, 에드의 키부터 따라잡으려고.”
목표를 설정한 로넨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대공은 사이좋게 대화하는 로넨과 에드를 바라보며 이르텔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저번 사냥제 때 있었던 일은 기사가 자결해 정확한 증거나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상한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어쨌든 황제의 계략에서 무사히 벗어나 그곳에 모인 귀족들에게 로넨을 친동생으로 인정받았으니 황궁에서의 일은 잘 마무리한 듯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 입지만 좋아졌으니 앞으로 황제는 더 신중하게 움직이겠지.’
“알겠다. 그 일은 에드에게 말하지 말고 지금은 대신전으로 출발할 수 있게 준비해.”
“네.”
이르텔과 대화를 마친 대공은 마차 앞으로 갔다. 에드를 마차에 기대 세운 로넨은 까치발을 들고 손을 위로 치켜들고 있었다.
“에드의 키를 재는 거야?”
“아, 아스넬 형!”
“내가 해 줘도 될까?”
“네!”
대공은 펜을 손에 쥐며 에드의 머리에 손을 짚었다.
그에 에드는 기분이 묘해졌다. 정수리에 느껴지는 이 열기가 햇볕 때문인 게 확실한데 대공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점점 가슴이 두근거려 마법이라도 걸린 기분이었다.
‘침대에서 함께 자기까지 했으면서 새삼스럽게 무슨.’
스윽스윽, 하는 소리와 함께 대공이 마차에 펜을 그었다 떼자 에드는 빠르게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직도 이만큼 더 커야 하네.”
마차에 그어진 표시를 올려다보며 로넨은 에드와의 키 차이를 가늠했다. 그리고 에드를 마차로 이끌어 자신의 옆에 앉히며 손을 잡았다.
“에드의 기운을 듬뿍 받아서 쑥쑥 클 거야.”
로넨의 말에 마차에 들어와 맞은편에 앉던 대공이 옅게 웃었다. 그러더니 에드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내 손도 잡아 줘, 에드.”
“……네?”
“나도 에드의 손을 잡아서 기운 좀 받게.”
* * *
한참이나 형제에게 손을 잡혀 있던 에드는 수도와 대신전 중간에 위치한 제류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해서야 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두가 마차에서 내려 숙소에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로넨이 에드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에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