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99화 (99/198)

집무실 문을 노크하자 들어오라는 대공의 허락이 떨어졌다. 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선 에드는 대공의 곁에 선 집사장에게도 인사를 꾸벅 했다.

“이쪽으로 앉아, 에드.”

“네.”

대공의 안내에 따라 소파에 앉자 집사장도 곁에 앉았다. 대공은 에드에게 하얀색 종이를 내밀었다. 도톰한 종이에 수놓아진 금박이 인상적이었다.

“에드, 약초 협회가 설립되었다는 안내서가 도착했어.”

“약초 협회요?”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퍼지는 걸 바라보며 입을 뗐다.

“남부에서 오랫동안 약방을 운영해 온 원장이 협회장을 맡았다고 해. 지역에서 인망이 두텁고 실력 또한 좋아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군.”

“……제가 안내장을 살펴보아도 될까요?”

“그럼.”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북부에서 후원한다고 하니 어떤 식으로 운영하면 좋을지에 대한 조언이나 요청 사항이 있으면 보내 달라며 의견서를 동봉했더군.”

안내서를 확인하던 에드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에드가 원하는 방향이 있다면 말해 줘. 의견을 적어서 보내도록 하지.”

“그럼 혹시 제가 말하는 약을 만들어서 북부로 보내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을까요?”

“어떤 약을?”

“삼색제비꽃으로 만든 약을 협회에서 제약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삼색제비꽃이라면 남부에 흔히 피는 꽃인 걸로 알고 있는데.”

“네, 남부에서는 차로 끓여 먹거나 말려서 가루로 쓰기도 하는데요, 가래나 기침과 같은 호흡기 질환에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군.”

“네, 그걸 북부에서 상비약으로 쓰면 어떨까 해서요. 아무래도 북부는 추위가 심해 매년 감기가 기승일 테니까요.”

에드는 원작에서 대공이 폭주를 했을 때 하필이면 제국에 전염병이 퍼져 그가 누명을 썼던 장면을 떠올리며 말했다.

초기에는 가벼운 감기 증세였지만 증상이 심해지면 기침을 할 때 피가 나오며 몸에 검은 반점이 생기다 사망에 이르는 병이었다. 남부는 다른 곳에 비해 피해가 적어 후에 알아보니 삼색제비꽃이 이 전염병에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을 미리 만들어 두면 대공이 누명을 쓰는 일도 막고, 북부의 추위를 견디기 힘든 이들도 유용하게 쓸 거야. 협회를 통하면 약을 만들고 유통하는 일에 어려움은 없겠지.’

에드의 제안에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협회 측에 요청해서 알아보도록 하지. 그 외 다른 요청은 없어?”

“음.”

하며 잠시 생각한 에드는 입을 뗐다.

“위급한 상황일 때 흔히 볼 수 있는 들꽃이나 풀로 응급 처치를 할 수 있도록 책자를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완성되면 영지 내 촌장이나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게요. 변두리에 있는 마을에 배급해 돈이 없어서 의원에 갈 수 없는 사람들도 간단한 질병은 치료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대공은 조곤조곤한 말투로 말하는 에드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협회에 요청해 볼게, 에드.”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이외에도 다른 의견 없을까?”

에드는 대공의 반문에 조금 더 생각하다가 말했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은 없는데요, 혹시 나중에 떠오른다면 그때 말씀드려도 될까요?”

대공은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지, 에드.”

* * *

대공과 대화를 마친 에드는 방으로 내려왔다. 약초 협회가 설립되었다고 하니 마음이 설렜다. 책상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을 수첩에 만년필로 가볍게 정리하는데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의아함을 품은 에드가 방문을 열자 집사장이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나, 에드?”

“네, 물론입니다.”

집사장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에드는 의자를 정리해 자리를 만들었다. 집사장이 가볍게 감사를 표하며 자리에 앉자 에드도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헤린스 백작 저에서 하인 일을 했었다고 했지?”

“네, 집사장님.”

“그럼 앞으로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나?”

“네?”

에드가 반문하자 집사장이 인자하게 웃었다.

“에드가 나와 손발이 잘 맞을 것 같아서.”

에드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그를 바라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건 혹시 집사장님을 도와 북부 성의 일을 하라는 말씀이신가요?”

집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도 에드가 원한다면 내가 맡아서 일을 가르쳐 보라고 허락해 주셨어.”

옅게 웃은 에드는 바로 답했다.

“무슨 일이든 맡겨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대답이 시원시원해서 좋군. 그럼 우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걸 먼저 한 번 읽어 보면 도움이 될 거야.”

에드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집사장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커다란 책들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제국의 역사서와 북부의 의례에 대한 책이야. 우선 제국과 북부에 대해 잘 알아야 북부 성도 잘 살필 수 있을 테니.”

에드는 눈을 끔뻑이며 책을 내려 보다가 크게 외쳤다.

“네, 집사장님.”

“도련님께 글을 배웠다고는 했지만 혹시 책을 읽을 때 어려움이 있으면 부담스러워할 것 없이 나를 찾도록 하고.”

“네, 감사합니다. 집사장님.”

그렇게 에드가 제국과 북부 생활에 대해 공부하고 나자 집사장은 재무와 재정관리 및 세금에 대해 가르쳤다. 그 후에는 예산 집행 계획을 짜는 법과 회계 감사 등을 교육했고 북부 도서관의 서지 정보도 알려 주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나 가을이 깊어갈 무렵, 에드는 정원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어째 반년이 넘도록 일을 배운 게 아니라 공부에 파묻혀 산 것 같은 기분인데.’

창밖을 내다보던 대공이 에드를 발견하고 살포시 미소 지었다. 에드는 정원을 거닐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무슨 생각을 하려나.’

요 몇 달간 집사장은 시간을 내서 에드의 공부를 봐주고 있었다. 이에 대공이 그 이유를 묻자 집사장이 웃으며 답했다.

〈에드는 가르치는 보람이 있거든요.〉

에드에게 공부량이 너무 많은 건 아닐까? 대공은 걱정스러웠으나 다행히 그렇진 않은 모양이었다. 에드의 안색은 밝았고 눈빛엔 생기가 돌았다.

생각을 모두 마쳤는지 가볍게 고개를 저은 에드가 북부 창고로 걸음을 떼는 걸 내려다본 대공이 자리를 옮겼다. 그는 의자에 앉아 책상에 올려둔 서류를 읽으며 생각했다.

‘치유 마법사는 존재하나 시동어를 걸지 않거나 표식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타인의 손을 잡는 것만으로 치유력을 보이는 경우는 없는 게 확실하군.’

대공은 에드가 자신의 손을 잡았을 때 느껴졌던 온기와 치유력을 상기하며 턱을 가볍게 쓸었다.

에드가 자신의 비밀을 밝혔던 그날 이후로 대공은 자체적으로 그의 능력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간 찾은 기록들을 살펴본 대공은 작성한 자료를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에 넣어 태웠다.

어쨌든 간에 에드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자신과 그, 두 명이 전부여야만 했다.

* * *

“에드, 피곤하지 않아?”

도서관에서 책을 읽던 에드가 시선을 들자 로넨이 인형 두 개를 들고 손을 까딱이고 있었다. 뒤에 손가락을 넣어 움직일 수 있는 인형은 로넨을 위한 세나의 작품이었다.

로넨이 손을 까딱여 사자와 독수리 인형의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던 에드는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회중시계를 확인해 보니 시간은 밤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도련님.”

어느새 로넨이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책과 노트를 정리한 에드는 만년필을 케이스에 잘 넣어 보관했다. 에드가 자리를 정돈하자 로넨이 다시 인형을 움직이며 물었다.

“에드는 내일 사자와 독수리 중 어느 팀을 응원할 거야?”

내일은 북부의 가렌다 산에서 2박 3일간 무투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북부 성에서는 매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에 기사단원들이 사자와 독수리, 두 개 팀으로 나누어서 대결을 한다고 했다. 기사단원들의 체력을 단련하고 협동심을 키우기 위한 행사였다.

검술과 기마, 활쏘기와 창술 등 많은 종목이 개최되었고 마지막에는 사냥 대회도 열렸다. 특히 사냥 대회는 어떤 사냥감을 얼마나 잡아 오는가에 따라 점수가 매겨졌으므로, 대회의 승패를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종목이었다.

우승한 팀에게는 푸짐한 상이 주어졌으며, 우승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명예까지도 거머쥘 수 있었다.

기사 단원들은 무투 대회를 준비하며 체력을 길렀고 팀을 나누어 훈련하며 의지를 불태웠다.

내일 오전에 대회가 시작되는데 벌써 짐을 싣고 야영을 나선 성격 급한 기사단원도 있었었으며 아직도 연무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에드는 로넨과 함께 참관인으로 대회에 참가해 점수를 매기는 일을 맡았다.

“저는 두 팀 다 응원하려고요. 공정하게 점수를 매기려면 어느 한 팀에 마음이 기울어서는 안 될 것 같아서요.”

“그건 그렇긴 하지만.”

로넨이 인형을 까딱이며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나는 이르텔 경이 있는 사자 팀에 마음이 조금 더 가는데…… 그래도 심판으로서 그러면 안 되겠지?”

에드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음, 도련님께서 공평하게만 점수를 매겨 주신다면 마음속으로 어떤 팀을 응원한다고 해도 문제가 될 건 없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인형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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