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20화 (120/198)

탁.

방으로 돌아오면 항상 책상으로 향하던 에드는 비척거리며 침대로 걸어가 그 위로 쓰러졌다.

그의 한쪽 손에는 조금 낡은 수첩이 소중히 들려 있었다.

‘전하께서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일까…….’

하지만 어렴풋이 이걸 다 채우면 전하와 저 사이에 있는 무언가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뭐…… 노트를 보니까 앞으로 3분의 1은 더 채워야 할 것 같은데. 이걸 전하랑 함께 채우려면 신전에는 못 내려가겠다.’

에드는 그제야 제가 북부에 계속 남기를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바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옳다구나 하고 고민을 접는 걸 보면 신전에 갔어도 금방 다시 돌아왔을 게 뻔하네. 로넨이 재채기했다는 편지라도 받으면 틀림없이 다시 짐을 쌌겠지.’

모든 생각을 마친 에드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나왔다.

‘신관님이 내일 점심때 떠나신다고 했으니까 지금쯤이면 짐 정리를 하고 계실 거야. 더 늦기 전에 말씀드려야겠다.’

똑똑.

신관이 머무르는 방의 문을 조용히 두드린 에드는 들어오라는 말에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신관은 에드가 올 줄 알았다는 듯 뜻밖의 방문에도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에드는 이곳에 남기로 한 건가요?”

신관의 말에 이곳을 찾은 에드가 되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간 에드를 많이 봐 왔으니까요. 만약 떠날 생각이었다면 저를 찾아올 게 아니라 그간 신세 졌던 사람들을 만나고 그다음 날 아침에 짐을 챙겨서 제 방에 왔겠죠. 하지만 지금 저를 만나러 왔으니 그건 곧 이곳에 남겠다는 뜻 아니겠어요?”

“신경 써서 권유해 주신 건데 거절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신관의 말대로였기에 에드는 그를 향해 작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런 에드를 작게 손을 휘저으며 만류한 신관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종이 뭉치를 들어 그에게 건넸다.

“그간 제가 다른 동료들과 함께 이곳의 약재들을 정리한 자료예요.”

에드가 황급히 손바닥을 앞으로 세우며 그에게 밀었다.

“이런 귀한 걸 어떻게 받겠어요. 이미 알려 주신 정보만으로도 정말 많은 도움이 됐는걸요.”

“이 기록 내용은 다른 동료들도 작성해 가지고 있으니 저는 그걸 보면 됩니다. 그러니 이건 에드가 유용하게 써 주세요. 혹시 약초 연구를 그만두시려는 건 아니죠?”

이 자료를 안 받는 이유가 그런 것 때문 아니냐는 신관의 눈초리에 에드는 감사를 표하며 그를 받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정보들만 정리해도 약초 연구가 훨씬 더 수월해질 것 같아요.”

“에드는 좋은 약제사가 될 것 같으니 미리 뇌물을 드린 거예요. 언제든지 막히는 부분이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대신전으로 편지를 보내세요. 받기까지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꼭 도움이 될 만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갱신된 최신 연구 자료도 공유해 드리고요.”

그 뒤로도 에드는 신관과 함께 한참을 약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다 새벽이 되어서야 방을 나섰다.

그리고 자신의 방 앞에 다다랐을 즈음에 복도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이 새벽에 누구지?’

에드는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제이논?”

“후우, 에드.”

복도 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제이논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채 에드의 목에 팔을 걸어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술 마셨어요?”

“그래, 마셨…… 우픕프.”

제이논이 쩌렁쩌렁하게 대답하자 에드가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제이논,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요.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

에드의 손을 치우며 대답하는 제이논의 눈동자가 에드의 옆구리에 끼인 서류를 확인하자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당연히 있지, 무슨 일이!”

“제이논, 목소리 좀 낮춰요.”

“내가 지금 목소리를 낮추게 생겼어? 어? 에드가 북부를 떠나려고 하는데?”

꽥, 내지르듯이 외친 제이논의 대답에 에드는 다시 제이논의 입을 막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북부를 떠나다니요?”

“우읍우으읍.”

제이논이 대답하려다가 에드가 제 입을 막은 것을 깨닫고 눈을 치뜨며 또다시 손을 치웠다.

“내가 다 봤어. 에드의 수첩에 적혀 있던 거! 이곳을 떠나 신전에 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잖아!”

“아, 그거요.”

“아, 그거요? 그 신관님과 몇 시간이나 대화를 나눴던 거랑 지금 옆구리에 끼고 있는 서류를 보니 확실해졌어.”

“그거 안 가기로 했는데요.”

“그래! 신전에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는……뭐? 안 가기로 했다고?”

“네.”

에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제이논이 입을 합, 다물었다. 에드가 씨익 웃으며 제이논과 시선을 맞췄다.

“제이논, 제가 북부를 떠날까 봐 걱정되었어요?”

“그럴 리가?”

“그런데 왜 이 야밤에 제 방 앞을 서성거렸을까요?”

“그냥 잠이 안 와서 걷다 보니 여기였는데?”

“제이논은 저를 많이 신경 쓰고 있었군요.”

“아니라고!”

에드는 뒤로 휙 돌아 제 방으로 걸음을 옮기는 제이논을 졸졸 뒤따르며 입을 열었다.

“아침에 제 얼굴은 어떻게 보려나 모르겠네요?”

“어떻게 보긴 어떻게 봐? 그냥 보는 거지?”

“제이논, 거기 조심해요. 계단이 하나 더 있어요.”

제이논을 추궁하기 위해서는 아니었고 그가 방까지 잘 들어갈 수 있게 챙기기 위해서였다.

휘청거리는 제이논의 팔을 붙잡고 나아간 에드가 방문을 열자 하품을 한 제이논이 침대에 털썩 쓰러지듯이 누웠다.

“잘 자요, 제이논.”

이를 확인한 에드가 인사를 하자 제이논이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에드, 네 앞길을 막으려고 하는 건 아니야. 그래도 혹시 북부를 떠날 마음이 생긴다면 미리 말해 줘. 이별에도 준비가 필요하니까. 갑자기 누군가가 사라지는 건 이젠 좀…… 아니, 많이 싫어.”

에드는 제이논에게 이불을 끌어 올려주며 답했다.

“네, 그럴 테니 걱정하지 말고 좋은 꿈 꿔요.”

“…….”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어느새 곯아떨어진 제이논을 보며 에드는 불을 끄고 방으로 나왔다.

‘요 며칠 제이논을 비롯한 이들이 왜 그렇게 묘하게 행동하나 했더니 그래서였구나.’

차가운 북부 성의 복도를 걸으며 에드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역시나, 한동안 제이논은 에드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저녁이었다.

에드는 품에 안은 책들을 추어올리며 복도를 걷다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텐스를 만났다. 에드를 먼저 알아본 텐스가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에드, 저녁 맛있게 먹었어?”

“네, 텐스. 그런데 제이논 못 봤어요?”

“제이논? 어…… 못 봤는데, 왜?”

“뭐 물어볼 게 있었는데 요즘에 통 볼 수가 없어서요.”

“뭔데? 제이논이 아는 거라면 나도 답해 줄 수 있는데.”

“아, 그러면요. 이 책을 보다가 궁금증이 생겨서 말인데요.”

에드가 안고 있던 책 중에서 맨 위의 책을 펴자 텐스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 이거……. 이건 말이지…… 이런! 나 마차 문을 손봐야 하는데 깜빡했다. 미안, 에드! 다음에 보자.”

그러고는 뒤로 돌아 쌩하니 사라지는 텐스의 모습에 에드는 눈을 껌뻑이다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누가 봐도 책과 척을 져서 도망치기에 바쁜 것 같은데.’

책을 갈무리한 에드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긴 복도를 지나 외성으로 향하는 구름다리를 걷자 며칠 사이 한층 더 쌀쌀해진 바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으으, 벌써부터 손이 시리네.”

책을 든 손을 꼼지락거리며 에드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이제는 익숙해진 돌계단을 올라 연구실에 들어섰다.

“잘 자라고 있나?”

테이블에 책을 내려놓은 에드는 창가에 쪼르르 놓인 화분을 살폈다. 얼마 전, 약초 협회에서 보낸 씨앗을 시험 삼아 대공과 함께 심은 것이었다.

‘추운 지방에서도 잘 자라는 것들이라고 했으니까.’

하나의 씨앗을 온실과 연구실의 각기 다른 환경에서 키우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저께 화분 흙 틈새로 잎이 쏘옥 나온 참이었다. 그게 무척 신기하고 즐거워 에드는 그 이후로 틈이 날 때마다 연구실을 찾았다.

손가락으로 화분의 흙을 콕 찍어 본 에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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