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텔과 기사들의 눈에도 손위에 있는 꽃은 보이는 건지 그들의 시선이 날카로워지며 대공의 주위를 살폈다.
‘이건 일반적인 마력을 통한 마법의 흐름과 다른 종류군.’
대공은 에드가 자리를 뜬 테라스를 올려다보았다. 분명히 그도 무언가의 기척을 알아차렸었다.
자신과 에드를 대상화한 마법이란 걸 확신한 그는 다시 새 부리에 손을 대고 뭔가를 가늠하다가 몸을 펴며 말했다.
“에드에게 방에서 나오지 말고 몸에서 루비를 떼지 말라고 일러. 아니, 그냥 로넨이랑 함께 방에 있으라고 전해. 로넨에게도 차고 있는 목걸이를 빼지 말라고 하고.”
“네, 알겠습니다.”
명령을 내린 대공이 살짝 걸음을 떼자 고개를 번쩍 뜬 새가 허공으로 폴짝 날아올랐다.
그걸 따라 대공의 시선이 움직이자 이르텔이 수풀 속에서 무언가가 위로 솟았다는 걸 깨닫고는 대공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고개를 갸웃한 새가 도로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하, 하며 짧게 웃은 대공이 미동도 하지 않는 새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이대로 있겠다는 뜻이군.’
대공이 이르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앞으로 나섰다.
“여긴 내가 알아볼 테니 모두 돌아가 이 소란을 틈타 침입자가 들어오지 않도록 무도회장을 지키도록 해.”
“하지만 대공 전하,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기사 하나가 옆으로 바짝 다가붙자 대공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성에는 무도회가 한창이다. 우리는 무도회가 열리는 동안 초청객들을 안전하게 수호할 의무가 있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도회가 무사히 끝날 때까지 인명 피해나 사고가 일어나는 건 절대 안 돼.”
“…….”
“그러니 모두 자리로 돌아가 임무를 수행하도록 해. 북부의 건재함은 북부를 이루는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보인다는 것을 잊지 말고.”
대공은 자신이 움직이자 다시 하늘로 뽀르르 솟아오르는 새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이 새의 둥지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러 가 볼까.’
* * *
대공은 빠르게 발을 옮겼다. 밤길을 재빠르게 날아가는 그림자 같은 새를 따라가며 숨을 죽였다.
성 후문을 향해 비행하던 새의 날갯짓이 점차 느려졌다. 보리수와 담쟁이덩굴, 커다란 보호수로 둘러싸여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울타리 근처였다.
새가 고목 가지에 내려앉는 걸 확인한 대공은 마법 등으로 앞을 비추었다. 커다란 나무에 몸을 숨긴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가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자 나무 뒤에서 머뭇거리던 사람이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
후드를 깊게 눌러쓴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눈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자신의 기척을 느끼는 것 같았다.
“마법을 쓴 사람이 너니?”
대공의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아이가 조심스레 지팡이로 앞을 더듬더듬 짚으며 다가왔다.
“마, 마법이요? 아, 아닙니다. 저는 그런 걸 쓸 줄 모릅니다.”
‘그렇다면 나무에 앉은 저 새를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다는 것인가.’
대공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아이가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그는 저 품에서 단도라도 나오는 게 아닐까? 하고 주의하며 아이를 응시했다.
그러나 아이의 손에 들린 것은 붉은색 편지 봉투였다. 그에 박힌 노란 수선화와 은색 인장에 대공이 고개를 기울였다.
“어떤 여행자분께서 이를 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행자가 누구지?”
“그,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작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대공이 떠보듯이 물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도 알지 못하면서 받을 사람은 어떻게 알아본다는 거지? 내가 수신인이라는 걸 확신하는 이유가 있나?”
“그 여행자분께서 말씀하시길, 자신이 편지를 전해 주려는 당사자가 아니면 어차피 읽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기다리다가 오는 사람이 있으면 주라고요.”
대공은 팔짱을 꼈다. 그리고 아이를 만났을 때부터 들던 위화감에 물었다.
“시력은 언제부터 좋지 않았지?”
그녀는 지팡이를 쓰는 게 익숙해 보이지 않았다.
“아, 그게 원래는 앞이 잘 보이는데요…… 여행자분께서 이번 심부름을 할 때만 눈을 가리는 약을 쓴다고 하셨습니다.”
노란 수선화, 은색 실링, 빨간 편지 봉투와 조심스러운 행태. 이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선황제의 재혼 상대이자 현 황제의 새어머니인 황태후 ‘젠스 네이트런’이었다.
* * *
아이가 길을 헤매지 않게 성 밖으로 데려다주고 집무실로 올라온 대공은 편지를 꺼내 읽었다.
오랜만이오, 공. 북부에 지진이 났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어 이렇게 편지를 쓰네. 북부는 괜찮은지 궁금하군.
그곳에 있는 오래된 벽화도 훼손되지는 않았을지 염려되고.
이렇게 편지만 보내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그곳으로 가고 싶지만 이미 늙어서 그런지 먼 거리를 떠날 기력은 이제 남지 않은 거 같네.
조만간 황도에 들를 때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군.
그럼 그때까지 잘 지내게, 공.
편지를 다 읽자 편지지 끄트머리부터 타들어 가며 내일 새벽, 가렌다 산 동굴 앞이라는 글자가 검게 그을려 재로 남았다가 사라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대공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도회의 열기가 식지 않는 성내를 살피다가 커튼을 쳤다.
그리고 깊은 밤, 며칠 동안 이어질 무도회가 잠시 쉬어가는 시간에 북부 성을 나서는 말 한 마리가 있었다.
조이였다. 그 등에 올라탄 대공이 빠르게 말을 몰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홀로 성을 빠져나온 그는 어두운 길을 지나 가렌다 산으로 향했다.
황태후가 말한 동굴의 벽화는 자신과 에드 외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에드와 동굴을 빠져나온 후에 대공은 여진이 올 것을 대비해 그 근처에 결계를 쳐 놓았었다. 누군가가 그 결계를 건드렸다면 자신이 알지 못할 리가 없었다.
찾아오는 사람 없이 황궁에서 숨을 죽이고 지냈을 황태후가 벽화에 대해 어떻게 알아낸 건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산 중턱에 다다르자 평지에 조이를 세운 대공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에서 내려 고삐를 나무에 맨 그는 빠르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동굴 앞에 쳐 놓은 결계가 훼손되지 않고 잘 유지되는 것을 확인한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때, 동굴 주변의 커다란 나무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기사 한 명이 대공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
대공이 거리를 둔 채 우호적인 행동을 하는 그를 살피는데 기사 뒤에서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네, 공.”
대공은 어둠에 거의 가려진 여성을 바라보다가 예를 갖췄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황태후 폐하.”
“이렇게 만나니 반갑고 좋군.”
오랜만에 본 그녀의 모습은 대공의 기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지난 세월 동안 녹록하지 않았던 그녀의 삶을 짧게나마 엿볼 수 있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황태후 폐하.”
“그새 훌쩍 자라 이렇게나 눈높이가 올라가다니.”
대공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어 있던 그녀가 주위를 살피다 말을 이었다.
“말이 길어질 것 같은데 시간 괜찮은가?”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자리를 옮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폐하.”
그녀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북부에 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아. 그러니 지금 이대로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어.”
“하지만 날이 춥습니다.”
“이 정도 추위는 가뿐하다네, 공.”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를 바라본 대공이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이러면 공이 춥지 않은가? 나는 괜찮아.”
황태후가 옷을 다시 대공에게 건네려고 하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북부에서 오래 살다 보면 이 정도 날씨는 더울 정도입니다. 오히려 제 짐을 폐하께 떠안긴 셈이죠.”
“……여전히 따뜻하군, 공은.”
간단한 안부 인사를 마친 황태후는 본론을 꺼낼 모양인지 호위 기사에게 손짓했다. 고개를 끄덕인 기사는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대공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황제의 눈을 피해 이곳까지 오실 정도로 급한 일이 생기신 겁니까?”
죽은 선황제의 두 번째 부인.
현 제국의 주인인 ‘페즈 네이트런’의 계모.
출신도, 이름도 흐릿해지고 오로지 이런 수식어들만이 남은 그녀가 대공을 올려다보다가 동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 이 안에 있던 벽화를 보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