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
연회홀에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그녀의 손을 쳐낸 에드가 대공을 지키듯 앞으로 나섰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황제가 대공에게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저들의 뜻대로 저 여자가 대공을 함부로 만지게 둘 수 없었다.
갑작스레 나선 에드에게 황제가 소리쳤다.
“무엄하다!”
연회장을 뒤흔들 정도의 노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에드는 황제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대공 전하의 치유를 제가 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길 요청드립니다.”
황제가 거절하려고 입술을 떼는 찰나 에드가 다시 한번 단호하게 덧붙였다.
“제가 대공 전하의 대공비이니 말입니다.”
그는 시종일관 대공의 앞을 든든하게 지키고 서 있었다.
황제가 비웃으며 물었다.
“네가 대공을 치유하겠다고?”
“그렇습니다.”
에드는 더 이상 황제의 대답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러고 비열하고 유치한 술수를 일삼는 황제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고 있던 대공의 손을 붙잡았다.
수석 마법사는 네까짓 게 뭘 하겠냐는 듯이 에드를 가소롭게 보았다.
“…….”
에드는 의미 없는 그 시선들을 무시하며 대공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푸른 빛줄기가 대공의 손목을 휘감았다.
푸른 빛은 마치 나무줄기처럼 그의 팔을 타고 천천히 올라갔다. 그 빛에 닿은 곳마다 검은 반점이 사라지며 대공의 본래 피부색인 새하얀 색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황제와 수석 마법사는 경악에 찬 얼굴로 그 푸른 빛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황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럴 수는 없어.”
사색이 된 마법사는 눈앞의 상황을 부정하고 싶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구속구 때문에 마법과 마력은 절대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인데……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이용해 만든 저주였는데 이렇게 쉽게 정화되다니! 설마 정말로……?’
마법사는 황제 쪽을 바라보았다. 마침 황제도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서로의 시선이 둘만이 아는 비밀을 담고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하지만 분명히 모두 멸족시켰는데.’
두 사람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 에드는 착실히 대공을 정화해 나갔다.
연회장 안의 모두가 성스럽게까지 느껴지는 푸른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웅.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아름다운 선율이 영혼을 공명시키듯 연회장에 아득히 울려 퍼졌다.
마치 바닷속에 있는 것 같은 차분하면서 기분 좋은 음률이었다.
모든 귀족들의 관심사는 이제 대공의 검은 반점이 아닌 신비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차기 대공비에게로 이동했다.
이를 의식한 대공이 사람들로부터 에드를 가리듯 커다란 몸으로 막아섰다.
홀린 듯이 대공의 손끝에 시선을 고정했던 에드가 그의 움직임에 고개를 들었다.
“에드.”
그가 황궁에서 처음 대공의 손을 잡아 치유했을 땐 빛 같은 건 흘러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대공과 교감을 나누고 감정이 깊어지며 사랑의 결실을 맺자 자신이 대공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이 더 강해졌다.
점점 커지는 푸른 빛에 대공의 눈동자가 일렁거리듯이 보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대공의 눈길에는 빛으로도 정화되지 않는 짙은 정염이 어려 있었다.
에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도 대공의 손을, 몸을 만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 내어 줄 수 없었다.
에드는 대공을 바라보며 치유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가 신의 천벌이라고 떠들던 검은 반점을 모두 정화 시킨 푸른 빛이 안식처를 찾아 대공의 몸으로 스며드는 순간, 에드와 대공이 동시에 전율하며 몸을 떨었다.
“…….”
“…….”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들리지 않는 대화를 나누었다. 같은 것을 느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둘의 숨결만 느꼈다.
몽롱하던 사람들은 빛이 사라지자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며 방금 본 장면을 곱씹었다.
“신탁의 주인공은…….”
“진짜 대공비는…….”
황제 때문에 말을 끝까지 할 순 없었으나 이 공간에 있는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했다.
북부의 검, 아스넬 린든. 그 운명의 짝은 저 남자가 확실하다고.
일이 돌아가는 걸 지켜보던 재무대신은 황제를 흘깃댔다.
파르르 경련하는 눈가. 굳은 안색. 분노로 일그러진 미간.
재무대신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능력이 출중하지 못한다 한들 자신의 주군이고, 이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신하로서 황제가 물러날 수 있는 틈을 만들어 주기 위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폐하, 아무래도 착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중간에서 일을 잘못 진행한 자가 있는 것 같으니, 오늘은 우선 연회를 마치고 천천히 조사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제의 잘못은 없으니 책임은 아래 것들에게 모두 떠넘기자는 얘기였다.
하지만 재무대신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황제에겐 용의 힘이 흐르지 않는다는 점과 대공을 향한 열등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는 것이었다. 신탁을 듣고 한 종족을 모두 몰살시키는 미친 짓을 저지를 만큼.
“아니다! 이 자리에서 틀린 놈들은 대공과 저 가짜뿐이다!”
황제의 노성에 재무대신의 얼굴이 불길한 예감으로 일그러졌다.
황제가 품에서 꺼낸 단검으로 자신의 손에 피를 냈다. 그러곤 왕홀에 달린 둥근 붉은 보석에 손을 대자 검고 어둑한 연기가 흘러나왔다.
우우웅…….
황제의 기이한 행동에 대공이 에드를 품에 안았다. 장내가 진동하는 소리는 끊기지 않았고, 연회장의 유리창까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전하.”
대공은 여차하면 에드를 대피시킬 계획을 짜며 황제를 주시했다.
사람들은 불안한 눈빛을 숨기지 못하며 당황스러워하는 동안 수석 마법사는 빠르게 속삭였다.
“폐하, 그건 아직 불안정해 사용하기 이릅니다.”
왕홀의 중간에 박힌 붉은 보석에서 나오는 기이한 연기가 더 진해지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아까 짐을 말린 탓에 이런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저 반역도들이 짐의 권위에 도전했을 때 바로 응징했으면 이걸 쓸 일도 없었을 것을!”
황제가 마법사를 쏘아붙이며 왕홀을 더 꽈악 쥐었다. 그러자 허공에 퍼져 있던 검은 안개가 구름처럼 뭉게뭉게 뭉치며 천장으로 떠 올랐다.
그걸 올려다보는 수석 마법사의 눈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러다 무슨 일이 생겨서 누가 죽기라도 한다면…….”
“그렇다면 일이 더 쉬워지겠군. 역심을 품고 짐이 찾은 대공비를 거절한 것뿐만 아니라 폭주해서 연회장의 모두를 몰살시켰다는 죄목이 붙을 테니.”
황제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덧붙였다.
“그것도 제국에서 금지된 마법을 이용해서 말이지.”
마법사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아직 완전하게 다룰 수 있는 힘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제국의 태양인 짐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있겠느냐?”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기까지 온 이상 발을 뺄 수 없었다. 궁중 수석 마법사 자리를 위해 젤다족을 멸족시켰고, 황제의 명을 따라 숱한 금지된 마법을 연구해 왔다.
마법사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젖혔다.
끼이익.
유리가 긁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며 천장에 쫙쫙 금이 가고 있었다. 위태로운 선이 위협적으로 빠르게 뻗어 나갔다.
연회장 곳곳에 놓인 마법 등이 불안하게 점멸했다. 사람들의 얼굴이 어둠에 잠겼다 모습을 드러내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황제가 끝났다고 선포하지 않은 연회에서 먼저 나갈 순 없었다. 그들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간신히 버티고 있던 순간.
황제가 왕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연회장 허공에 뭉쳐 있던 검은 안개가 기둥처럼 하늘로 세차게 솟구쳐 올랐다.
귓가를 찌르는 파열음과 함께 천장의 유리 파편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천장을 뚫고 치솟은 검은 안개에 사람들이 놀라 뒤로 물러났다.
“저, 저게 무슨…….”
혼란에 빠진 몇몇은 황제고 뭐고 출구를 향해 달려갔으나 문은 단단히 잠겨 열리지 않았다.
“하하하.”
그때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웃음소리가 연회장을 갈랐다. 사람들이 웃음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폐하…….”
그곳에는 황좌에 앉아 목젖이 다 모일 정도로 고개를 젖힌 채 신나게 웃고 있는 황제가 앉아 있었다.
‘황제께서 미치기라도 하신 것인가.’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떠올릴 때, 황제 가까이에 서 있던 마법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연회장이 어두워 멀리 있는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자신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소리높여 웃는 황제의 핏대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대공에게 번졌던 반점처럼.
‘……설, 설마.’
마법사는 대공비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에드의 활약으로 존재감이 희미해진 가짜 대공비가 구석에 얌전히 서 있었다. 그리고 베일을 살짝 걷어 올린 그녀가 씨익 웃는 게 보였다.
마법사는 발밑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삽시간에 치고 올라오는 소름에 지팡이를 꽉 쥐었다.
‘흑마법에 잠식당한 거야.’
평소 대공을 향한 열등감으로 자신도 용을 불러 위엄을 떨치겠다며 흑마법에 손을 댄 황제였다.
자연 친화적인 마법과 달리 흑마법은 대가를 필요로 했고, 무수히 많은 목숨이 황제를 대신해 제물로 바쳐졌다.
‘흑마법의 위험성을 알기에 누누이 경고해왔건만.’
황제는 마법이 안정화될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이 일을 함께 연구하는 자신조차도 모르게 힘을 써온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성을 잃고 귀족들까지 모두 죽이려 드는 게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