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93화 (193/198)

손바닥에서 움직이는 입술이 간지러운지 아이가 꼼지락거렸다.

옅게 웃으며 고개를 든 에드는 아이의 눈동자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전하도 함께 보면 좋았을 텐데.”

진한 아쉬움도 들었다.

그 순간, 바람이 에드의 주변에 휘몰아쳤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어보자 목적지에 도달했는지 용이 천천히 땅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춥겠다.”

주변에 휘몰아치는 바람에 에드는 아이의 머리를 손으로 감싼 채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이가 놀라지 않게 외투 밖으로 만져지는 엉덩이를 토닥여 줬다.

용은 눈이 쌓인 북부 성의 공터에 내려앉았다. 그런 다음 에드가 내리기 쉽게 용이 고개를 숙여 줬지만, 그의 두 손은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기에 홀로 내려가기가 쉽지 않았다.

‘머리를 밟고 내려가면 되려나? 근데 그러다가 앞으로 엎어지기라도 한다면…….’

고민하는 사이, 아이가 옹알거렸다.

“뿌뿌, 뿌뿌뿌.”

“뿌뿌뿌?”

아이의 입에서 나올 법한 귀여운 말이었다. 에드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 말을 따라 하자 아이의 발이 통통통 움직였다. 에드의 외투 옆 부분이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뿌뿌.”

용은 아이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머리를 들고 꼬리를 아래로 동글동글한 모양새로 늘어뜨렸다. 마치 이걸 타고 내려가라는 행동에 에드는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빠, 이거 타고 내려가라고 한 거구나? 고마워.”

에드는 아이의 말에 따르기로 하며 용의 꼬리를 타고 주르륵 내려왔다. 너무 속도가 빨라 아이가 무서워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품 안에서는 꺄르륵 거리는 웃음만이 흘러나왔다.

“재미있어?”

“뿌우!”

그는 입술이 동그랗게 오므라지며 제 말에 대답하는 아이를 신기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때 용이 에드의 뒷덜미를 입으로 낚아챘다. 허공으로 쑤욱 올라가는 몸에 눈이 동그랗게 떠진 사이, 다시 용의 등에 안착하자 에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놀랐잖아.”

에드의 말에 장난스레 콧잔등을 찡긋한 용이 머리로 에드의 등을 살살 밀며 제 꼬리 쪽으로 유도했다.

아이도 발을 동동 구르며 기대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자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그는 용의 꼬리를 타고 주르륵 내려왔다.

“뿌우우!”

그 후로도 뒷덜미를 낚아채는 용 덕분에 몇 번이나 빙글빙글, 아이와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낸 에드는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한 용의 몸을 아이와 함께 쓰다듬어 준 후 손가락으로 눈이 쌓인 정경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에드는 아이와 시선을 맞추며 말을 걸었다.

“여기는 북부고, 저기 보이는 게 북부 성이야. 제국의 북부는 전하께서 손수 가꾸고 이끌어가는 곳이야.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북부 성의 후원이고, 여기 보이는 작은 창고는…….”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에드가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때마다 아우, 아우 소리를 내며 똑같이 손을 뻗어 왔다.

“아마 네가 태어날 때는 많은 것이 변해 있을 거야. 로넨이, 그러니까 삼촌은 너를 만나기 위해서 많은 것을 준비할 테고…….”

조카를 만난다는 설렘으로 바지런히 뛰어다니는 로넨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조곤조곤 이어지는 제 말에 아이가 귀를 기울이는 것이 느껴졌다. 여전히 동동거리는 발을 에드는 두 손으로 가볍게 쥐어 보며 생각했다.

‘훗날 전하와 나 사이에 태어난 이 아이가 한 손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발로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겠지.’

이 일이 제 바람이 만들어 낸 환상이라서 금방 깰 수도 있는 꿈이었지만, 그래도 에드는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래서 북부 성의 뒤꼍을 느릿하게 걸으며 그는 눈에 보이고 담기는 곳곳을 아이에게 소개해 주었다.

대공과 함께한 추억이 깃든 후원과 로넨과 함께 만들었던 로아의 집, 제이논과 텐스랑 부지런히 뛰어다녔던 길목 등등.

아이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그 설명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자 에드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해가 기울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발에 아이의 머리를 손으로 가린 그는 다음 목적지를 눈에 들어오는 온실로 잡았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는 그 순간, 아이가 외투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에 하얀 꽃잎처럼 내려앉았다가 녹아내리는 것을 보니 신기한지 뺨을 발그레하며 웃었다.

“신기해?”

“뿌우.”

“차갑진 않고?”

“뿌우우.”

“눈이라는 건데…….”

에드는 눈에 대해서도 알려 주며 차가운 눈발을 피해서 창가에 뽀얗게 김이 서린 온실로 들어갔다.

“……어?”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온실 안에는 대공과 로넨을 비롯하여 익숙한 북부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차를 우리고 케이크를 내려놓으며 문가에 선 에드를 격하게 반겼다.

“에드!”

“왜 이렇게 늦었어? 한참이나 기다렸다고?”

“조금만 더 늦었으면 우리끼리 시작할 뻔했잖아.”

에드는 빙그레 웃으며 아이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이곳에 모여 계신 줄 몰랐죠. 다들 우리만 따돌리고 너무하다, 그치?”

“뿌뿌!”

우렁찬 아이의 대답에 그것 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던 에드는 귓가 바로 옆에서 뿌뿌? 하고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겹쳐서 들리는 걸 깨달았다.

“……아.”

동시에 깊은 물 속에서 순식간에 위로 끌어올려지는 것처럼 정신이 든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품 안에서 느껴지던 무게와 눈앞의 장면들이 사라진 채였다.

잘 잡히지 않는 초점에 에드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그러자 검고 단정한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 에드. 잘 잤어?”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이제는 익숙해 에드는 바로 옆에서 누워 있는 대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슬며시 웃었다.

“네, 잘 잤어요.”

“그리고?”

“아이와 함께 여행을 했는데요.”

에드는 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장작이 타들어 가는 따스한 방, 제 배 위에서 꼬리를 물고 자는 새끼 용,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겨주는 대공, 자기 이야기가 나오자 기운 좋게 발로 배를 통, 차는 아이.

언젠가는 눈을 감았다 뜨는 게 싫고 두려울 때도 있었다. 금방 휘발되는 꿈속에서는 얼굴도 모르는 부모와 함께 할 수 있었지만, 눈을 뜨면 이 세상에 저 혼자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는 눈을 뜨면 차가운 적막과 냉기가 아닌 따스한 대공과 온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북부로 돌아간다면 언제나 활기차게 그를 반겨 주는 로넨과 북부의 사람들도 그들이 오기를 오매불망 바라고 있겠지.

그때 마치 아이가 에드의 이런 생각을 알아챈 듯 그의 배를 다시 한번 찼다.

‘너도 잊어먹지 말라고? 우리 뿌뿌도 아빠 많이 사랑해 줄 거지?’

에드는 옆으로 누운 대공의 목에 팔을 걸어 끌어당기며 씨익 웃었다.

“어서 빨리 북부로 돌아가고 싶어졌어요. 그리고 아이가 나오기 전에 이것저것 꾸미고 싶어요.”

* * *

에드가 잠에서 깨어난 난지 며칠 후, 황궁은 오전부터 떠나는 이들을 배웅하느라 분주했다.

대공이 황궁으로 들어올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대공이 탈 마차는 근위대가 양옆에서 지키고 있었고, 짐수레에는 황실에서 준비한 하사품이 가득 실려 있었다.

중앙 성문까지 나온 황태후가 북부로 길을 나서는 대공과 에드를 찬찬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조금 더 황궁에서 머물다 가면 좋을 텐데 이렇게 서두르다니.”

“황궁에서 지내는 동안 황태후 폐하께서 신경 써 주셔서 북부에서 지내는 것처럼 편안히 보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이 그렇게 말하니 마음이 한결 놓이네. 황도는 항상 공에게 문이 활짝 열려 있으니 마음이 내킨다면 언제든 오게. 두 팔 벌려 환영하니.”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는 대로 이번엔 조금 더 여유 있게 일정을 잡고 내려오겠습니다. 황태후 폐하도 그때까지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건강 관리에 더욱 신경 쓰십시오.”

“공이 협력해 주어서 까다로운 일은 많이 해결되었으니 나머지는 천천히 매듭을 풀어나갈 예정이야. 한동안 시끄러울 텐데 벌써 쓰러지면 안 되지.”

“항상 제국 아인드의 영광과 가호가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대공에게도 제국 아인드의 축복이 있기를 바라네. 그나저나.”

대공의 곁에 선 에드를 힐끗 바라본 황태후가 대공을 팔을 살짝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결혼식을 준비하는데 내가 정말 도울 일은 없겠나?”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단 한 가지 요청드릴 것이 있다면…….”

“그게 뭔가 대공. 부디 사양하지 말고 얼마든지 편하게 말해 주게.”

“대공비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의 대모가 되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두 사람의 아이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 있는 한 대공가의 모든 자식들의 대모가 되어 주고 말고.”

황태후가 작게 미소 짓다가 에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새파란 눈동자가 도열한 근위대들을 둘레둘레 바라보다가 황태후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잘 가게, 대공비. 대공이 속이라도 썩이면 언제든 황궁을 친가라고 생각하고 도망 오게. 내가 얼씬도 못하게 막아 줄 테니.”

타인에게 듣는 대공비라는 표현이 아직은 어색한지 쑥스럽게 웃는 그의 눈동자가 휘어지는 눈매에 부드럽게 갇혔다.

“폐하, 그간 보살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꼭 건강하시고 조만간 다시 찾아뵐 때는 즐거운 소식과 함께 들고 오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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