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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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귀여운데요, 왜? 나랑 만난다고 괜히 차려입는 것보다 좋잖아요. 직장 상사 만나는 것도 아닌데.”

“……”

“우리가 정말 나이 차이가 꽤 있구나 싶어서 조금 여기가 찔리긴 하지만.”

자신의 왼쪽 가슴을 가리키면서 표정을 잠깐 찡그린 이해성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최홍서 쪽으로 좀 더 몸을 틀었다.

“배고프진 않아요?”

“쉬는 시간에 간식 먹어서 괜찮아요.”

최홍서가 무슨 재미있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이해성은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턱을 받친 채 계속 웃고 있었다.

“…왜 웃으세요?”

“홍서 씨가 우리 집에 있으니까 신기해서요.”

“전… 제가 부사장님 댁에 와있다는 게 더 신기한데요.”

뉴스에서의 무표정한 모습이나 첫인상과 달리, 감정 표현에 굉장히 솔직한 사람이라고 이전부터 생각은 했는데, 그날은 유난히 더 그랬다. 너무 쳐다보면서 웃으니까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이 상황이 어색한 건 최홍서뿐인 것 같았고,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 할 것 같았다.

“뭐 하고 계셨어요?”

“일찍 퇴근한 김에 취미 활동 좀 하고 있었어요.”

“……”

“웬일이지? 궁금하다는 얼굴이네.”

작은 관심을 보일 때마다 의외라는 듯이 얘기하는 그의 말에 최홍서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최홍서의 뺨을 살짝 건드렸다.

“뭐 하고 있었는지 보여줄까요?”

이 자리에서 바로 그에게 새 숙소 얘기를 꺼낼 배짱은 없었다. 마침 잘됐다 싶어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성은 위층의 안쪽 깊숙이 자리한 어느 방으로 최홍서를 데리고 갔다. 그리 넓지 않은 작은 방은 창문이 없는데도 쾌적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천장까지 빼곡히 들어찬 유리 진열장 속에 한 점씩 소중하게 전시되어 있는 것은 모두 카메라였다.

“이게 내 취미예요.”

조금 전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 일인용 안락의자 앞 테이블 위에는 두세 대의 카메라와 분리된 배터리, 에어 블로어, 붓 등이 놓여 있었다.

“자주 사용하지 않는 카메라들은 주기적으로 한 번씩 작동 상태를 점검해 줘야 하거든요. 홍서 씨 기다리면서 여기서 혼자 놀고 있었어요.”

“영화 말고 카메라도 좋아하시는지 몰랐어요.”

“그야 위키백과에는 안 나오는 취미니까.”

벽을 따라 빙 둘러선 진열장으로도 모자라, 방의 중심에는 낮은 쇼케이스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투명한 케이스 안에 박물관의 유물처럼 모셔져 있는 카메라를 구경하고 있던 최홍서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테이블 위에 있던 카메라 중 하나를 손에 들면서 이해성이 말했다.

“영화를 좋아하고, 개인적으로 몇몇 신인 감독들의 영화에 투자하기도 했다는 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데. 내가 카메라를 모은다는 건 아무도 몰라요.”

“……”

아무도 모른다는 표현이 최홍서를 멈칫하게 했다. 이해성이 그것을 놓쳤을 리 없었다.

“왜 그런 비밀을 나한테 말해주는 거지? 그렇게 말하고 싶은 얼굴이네.”

비밀 공유에 마냥 설렜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이해성 부사장의 비밀. 아무리 취미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은 최홍서에게 무겁게 다가왔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가 부드럽게, 그러나 진지하게 시선을 맞춰왔다.

“반품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인 거예요, 나 지금.”

“………”

“홍서 씨하고 비밀을 공유할 만큼 이 관계에 진심이라고. 어필하는 거라구요.”

“……”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나라는 사람의 진심은 잘 전해지지 않는다는 거. 경험상 잘 알거든요.”

마지막에는 그의 표정에서 약간의 쌉싸래한 맛이 느껴졌다.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고 싶어도,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아무도 모른다는, 공개되지 않았다는 그의 취미. 그것을 공유해 주었다는 사실로 그의 진심을 좀 더 믿을 수 있게 된 건 사실이었다.

쇼케이스의 가장자리를 손으로 훑으면서, 최홍서는 계속 궁금했던 질문을 꺼내놓았다.

“부사장님은 제 어떤 점이 좋으세요?”

“……”

예상치 못한 공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가 굳어버렸다. 잠시 동안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듯했다.

이번만큼은 이해성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됐다. 지금까지 최홍서는 그의 말을 거의 듣고 있기만 하는 편이었고, 가끔 하는 질문들도 피상적이었으니까.

그의 굳었던 표정이 한순간 느슨하게 풀어지면서, 과묵해 보이는 한 일 자의 입술이 씨익 웃어 보였다.

“드디어 조금은 날 의식해 주는 건가?”

“부사장님이 절 마음에 들어 하실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요.”

“홍서 씨에게 끌리는 이유는 아주 상세하게 얘기했던 것 같은데.”

“전 고등학교도 겨우 졸업했고… 가정 환경도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고… 부사장님하고는 너무 안 어울리잖아요.”

ARA의 이해성, 그리고 할 줄 아는 건 춤과 노래뿐인 아이돌. 서로 수준이 안 맞는다는 건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잠깐 즐기는 스폰 관계라면 차라리 모를까. 이해성 같은 사람이 대체 자신의 무엇에 끌려서 연애를 하고 싶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누구라도 그의 말이 진심이라고 믿지 못했을 것이다.

“홍서 씨, 혹시 아웃포커싱이 뭔지 알아요?”

최홍서는 고개를 저었고, 그는 웃으면서 카메라를 손에 쥐고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커다랗고 단정한 손안에서 카메라는 실제보다 작게 느껴졌다.

렌즈가 최홍서를 겨냥했다. 조금 전까지도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잡고 있었고, 카메라 앞에 서는 것으로는 더 이상 어떤 긴장도 느끼지 않게 되었는데, 그의 카메라는 뭐가 다른 건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렌즈가 앞뒤로 움직이며 바쁘게 초점을 잡는 소리가 들리고, 찰칵, 그가 셔터를 눌렀다.

“간단히 말하면, 원하는 대상이 또렷하게 나오도록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상대적으로 배경은 흐릿하게 나오도록 촬영하는 기법이에요.”

그가 가까이 다가와 디지털카메라의 화면을 보여주었다.

액정 속에는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렌즈를, 이해성을 쳐다보고 있는 최홍서가 찍혀 있었다. 그의 설명대로 최홍서는 또렷했고 주변은 흐릿했다. 아웃포커싱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훨씬 가까워진 거리에서 그가 호소하는 눈빛으로 최홍서를 내려다보았다.

“강 감독님 댁에서 처음 만났던 날.”

“……”

“홍서 씨 외에 주변 모든 게 아웃포커싱 돼버렸어요. 그게 첫 번째 이유.”

그는 쇼케이스 위에 가만히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두 번째는…”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는 홍서 씨를 보는게 못 견디겠어서.”

하관 전체를 손바닥으로 감싸고 거칠게 쓸어내린 그는 신중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평소의 나였다면, 그냥 일어나서 그 자리를 나가버렸을 거예요. 그런데 그날은 화가 나서 한소리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홍서 씨를 그렇게 대한 사람들에게.”

“……”

“원래 정말 안 그러는데.”

변명하듯 덧붙이며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던 그가 다시금 웃음기와 함께 눈을 맞춰왔다.

“그날 평창동에서 내려오는 차 안에서 처음으로 아이돌 이름을 검색해 봤어요.”

그러려던 게 아닌데, 최홍서의 입술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실없는 웃음이 새어버렸다. 어떻게든 숨겨보려고 헛기침을 하는 척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고 고개를 돌려봤지만, 그의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왜 웃어요? 난 아이돌 이름도 검색해 보면 안 되나?”

“솔직히… 어울리는 게 아닌 건 부사장님도 인정하시잖아요.”

“맞아요. 안 어울리는 짓이었어. 한 번도 그런 적 없으니까.”

그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최홍서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엘리베이터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던 것보다는 더 과감한 손길이었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간 그의 손바닥이 최홍서의 뒷목을 넓게 감쌌다. 지금까지 그와의 스킨십 중에 가장 접촉면이 넓은 스킨십이었다.

그의 시선 안에 가두어진 듯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고작 손바닥과 목이 닿아 있을 뿐인데, 그의 앞에 전라를 드러내기라도 한 것처럼 겨드랑이 밑이 조여들었다.

천천히 피부 위를 쓰다듬는 그의 엄지가 느껴졌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오랫동안 노력해온 모습들을 보면서, 성실하다고 했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 사람의 다양한 모습이 더 많이 궁금해졌고.”

“……”

“다음 날 오전 회의가 있었는데도, 새벽까지 그 사람 영상을 찾아봤을 정도로.”

“아…”

최홍서의 입술이 벌어지고, 감탄 같은 신음이 가늘게 새었다.

그래서 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던 거구나. 영화 투자 때문에 조사해 봤던 게 아니라, 호감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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