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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61화 (61/185)

61화

월요일 저녁, 청담동 동쪽 끄트머리의 골목은 인적이 드물었다. 최홍서를 태운 차는 빨간 벽돌 건물이 바로 보이는 자리에 10분째 정차 중이었다. 단독 주택을 개조한, 운치 있는 2층 건물은 다시 시작되는 <크림 맨션>의 첫 번째 회식 장소였다.

“어때요, 형? 사진 보셔도 기억 안 나세요?”

핸들 위에 엎드린 용재가 정면의 건물 입구를 주시한 채로 뒷좌석 최홍서를 향해 물었다.

박동하.

윤혜안과 같은 ‘티탄’ 소속이었고, 팀이 해체된 이후 배우로 전향한 멤버.

박동하는 ‘티탄’에서는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배우로서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아가 현재는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활발하게 활동 중이었다. 특정한 이미지에 가둬지지 않는 무난하면서도 호감 가는 외모와 이미지도 연기하는 데에 득이 되기도 했다.

눈길을 끄는 외모 덕분에 팀에서도 배우로서도 먼저 주목을 받은 것은 윤혜안이었다. 배우 일을 먼저 시작한 것도 윤혜안이었고, 드라마 주연을 맡고 영화에도 조연이나 단역으로 얼굴을 내밀었을 정도로 윤혜안의 배우 생활 시작은 화려했었다. 그에 비해 박동하는 작은 역할부터, 말 그대로 바닥부터 시작해 하나하나 쌓아 올려가야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더 탄탄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박동하였다.

박동하에 대해 대략 그 정도의 정보는 최홍서도 알고 있었다. 윤혜안이 박동하와 어떤 친분을 가졌었는지, 거기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을 뿐.

최홍서는 ‘티탄’ 시절 박동하의 사진을 모아놓은 포스팅을 죽 훑어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없네요...”

“그러실 것 같긴 했어요. 뭐, 형 지금 저나 사장님도 기억 못 하시니까.”

“......”

“아이돌 시절에 이름도 얼굴도 별로 안 알려졌던 게 결과적으로는 동하한테 잘된 일이었어요. 아이돌 출신 배우라는 편견이 없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연기를 봐주니까 오히려 자리를 빨리 잡은 거죠. 아예 확 인기 있는 아이돌이면 모를까, 어중간하게 얼굴이 알려진 쪽보다는 동하 같은 입장이 차라리 나은 것 같아요. 배우로 자리 잡기엔.”

잘됐다는 듯,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상황들이 씁쓸하다는 듯 얘기한 용재는 엎드려 있던 상체를 일으켜 뒤를 돌아보았다.

“어쨌든 ‘티탄’ 할 때는 동하가 형하고 제일 친했어요. 형 집에도 가끔 놀러 왔었고. 형이 벌써 본격적으로 일 시작하시는 거, 전 아직 불안하긴 한데... 그래도 동하가 같이 한다니까 조금 마음이 놓이네요.”

마음이 놓인다는 말과 달리, 최홍서를 보는 용재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첫아이를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처음 등교시키는 학부모 같은 표정이었다.

박동하가 윤혜안과 나름대로 친했으리라는 건 최홍서도 짐작하고 있었다. 윤혜안의 침실 협탁에 있었던 세컨드 폰의 연락처에 저장돼있던 얼마 안 되는 전화번호. 그중 ‘티탄’ 멤버일 거라고 생각했던 번호 하나가 박동하의 것이었으니까.

박동하는 이번 영화에서 ‘크림 맨션’ 거주자 중 유명 맛집을 운영하는 부부의 아들 역을 맡게 되었다. 주연급은 아니어도 출연 빈도가 상당히 잦은 비중 있는 역할이었다.

용재는 아직 기억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윤혜안’이 현장에서 박동하를 의지할 수 있도록 미리 박동하에 대해 인지시키는 중이었다.

“형 기억이 그... 그렇게 된 건 동하한테 미리 얘기해 놨어요. 걔도 성격이 워낙 시원시원해서 그런 일로 섭섭해하거나 어색해할 놈은 아니니까 그냥 편하게 대하시면 돼요.”

“그럴게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용재 씨.”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최홍서를 바라보던 용재는 쓴 입맛을 다시며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마침 골목 저쪽에서부터 짙게 선팅한 RV 차량 두 대가 앞뒤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어? 앞에 오는 건 동하 차 같고... 뒤따라오는 차는... 조원태 선배 차 같은데... 역시 조원태는 칼 같네요. 데뷔 연차도 꽤 되는데 회식 장소에 30분 전 도착이라니. 선배들은 좀 느긋하게 도착해 줘야 후배들이 편한 건데... 형 어떻게 하실래요?”

“나도 그만 들어가 볼게요.”

30분 일찍 도착한 박동하나 조원태보다 더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건 최홍서였다. 지나치게 일찍 도착하면 제작부 스태프에게 오히려 폐가 될까 봐 다른 배우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옆자리의 가방을 챙겨 드는 최홍서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용재가 불안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옛날이 어땠든 지금 형은 정말 달라졌으니까, 시간 지나면 사람들도 알아주겠죠.”

용재가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았다. 윤혜안의 평판이 좋지 않은 만큼,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까 봐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예전의 윤혜안이었다면 오히려 누군가를 괴롭히면 괴롭혔지 타인이 자기를 괴롭히도록 놔두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윤혜안은 상처를 받을 거라 생각하는 거겠지.

용재를 안심시키기 위해 최홍서는 일부러 웃음기 있는 얼굴로 물었다.

“예전의 나는 어땠길래 이 정도 일에 그렇게 일일이 놀라요?”

“...진짜 말씀드려요?”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자리는 스케줄 핑계를 대고 아예 참석 안 하시거나 뒤늦게 가서 얼굴만 비추는 정도였어요.”

예상한 그대로여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런 배우도, 그런 아이돌도 발에 차일 만큼 많이 만나봤었다.

“과거가 그랬으니 사람들이 날 싫어해도 어쩔 수 없겠네요. 다녀올게요. 이따 봐요.”

걱정스럽게 따라붙는 용재의 시선을 느끼면서 최홍서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의 직원이 바로 개별실로 안내해 주었다. 룸으로 들어가자마자, 대각선으로 보이는 자리에서 박동하가 소리 없이 반갑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에게 슬쩍 눈인사를 하고는 선배인 조원태에게 먼저 다가가 깍듯이 인사를 전했다. 최홍서를 한번 훑어본 조원태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을 뿐이었다. 최홍서로서 황지우 역을 맡았을 때는 똑같이 과묵하기는 했어도 다정하고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셨던 선배였기에 마음이 착잡했다.

“형! 이쪽으로 와! 여기, 여기!”

연차가 있는 조원태와는 다소 떨어진, 끄트머리 쪽 좌석에 앉아있던 박동하가 제 옆자리를 가리키며 열심히 손짓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사람을 그렇게 걱정시키더니, 윤혜안 진짜 다시 살아나서 걷고 말하고 다 하네? 나 꿈꾸는 거 아니지?”

“아...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자기를 기억하고 친근하게 말을 붙여주는 사람을 서먹하게 대하기란 생각보다 더 미안한 일이었다. 비록 그 ‘자기’란 것이 진짜 자신이 아니더라도.

“이 형 봐라? 진짜 남처럼 얘기하네. 존댓말까지 하고?”

그래도 용재가 미리 말해준 대로 박동하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조심스러워하는 사람보다는 박동하처럼 쾌활하게 받아들여 주는 사람이 더 편한 것 같기는 했다.

“용재 형한테 듣긴 들었는데, 진짜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거야?”

최홍서는 미안함을 담아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가 봤자 괜히 형만 더 혼란스럽게 할 것 같아서 연락 안 하고 있었는데. 삐진 거 아니지?”

“기억을 못 해서 내가 미안하죠.”

박동하는 갸름한 앳된 얼굴을 살짝 기울이고는 최홍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진짜 딴 사람 같다.”

“......”

“아니, 용재 형이 그러더라고. 형이 죽다 살아나더니 완전히 딴 사람 됐다고. 말로만 들었을 때는 무슨 소린가 했는데...”

뒷목을 슥 문지르면서 박동하는 변명하듯이 덧붙였다.

“실제로 보니까 진짜 딴 사람 같아서, 좀... 신기하네.”

박동하가 실은 신기하다는 말 대신 섬뜩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이후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속속 더 도착했다.

얼굴과 이름은 알고 있어도, ‘윤혜안’으로서의 친분은 없는 배우들이 도착할 때마다 최홍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눈인사만 나누었는데도 그들이 윤혜안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사실쯤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박동하를 포함해 그들끼리는 대부분 친분이 있는지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 최홍서는 제공된 차를 홀짝이면서 멀뚱히 앉아있었다.

“선배님, ARA 이해성이 이 영화 투자한다는 거, 그거 진짜예요?”

테이블 너머에서 누군가 흥분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낮게 억누르며 물었다. 이해성이라는 이름에, 차를 마시던 최홍서의 손이 흠칫했다.

“한번 엎어지기 전에도 그것 때문에 소소하게 이슈 됐었잖아요.”

“그랬어요? 난 왜 몰랐지?”

“그땐 캐스팅이 안 됐으니까 관심 없었겠지.”

“하하... 맞네요.”

조원태가 점잖게 핀잔하듯 얘기하자, 처음 얘기를 꺼냈던 배우가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근데... 그럼 오늘 이해성도 올까요?”

“에이, 설마 이런 자리까지 오겠어요?”

역시나 사람들의 관심사는 이해성이었다. 지난번 모임에서도 이런 비슷한 대화들이 오갔던 기억이 나서, 최홍서는 찻잔을 입술에 대고 씁쓸히 웃었다. 많은 것이 그날과 비슷한데, 그보다 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엎어지기 전에는 참석했었어. 좀 늦게 오긴 했었지만.”

조원태의 말에 배우들은 모두 크게 관심을 보였다. 옆자리의 박동하 역시 크게 뜬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정말요? 선배님 그럼 그때 이해성 보셨어요?”

“봤지. 격의 없이 구는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권위적인 양반은 아니었어. 거들먹거리며 왕 행세하려 드는 위인은 더더욱 아니고.”

“와... 궁금하다. 오늘도 오면 좋겠네요. 그 정도 재벌은 진짜 만날 일이 없잖아요. VIP 행사장 같은 데 오는 사람도 아니니까.”

“원래도 영화광으로 유명하긴 한데, 이번 영화에 유난히 애착이 강한가 보더군. 영화에 아주 진지한 사람이야. 주연 배우 새로 뽑는 마지막 오디션에는 직접 참석하기까지 했다니까.”

말을 마친 조원태는 최홍서를, 윤혜안을 슬쩍 쳐다보았다. ARA의 이해성이 직접 참석했다는 바로 그 마지막 오디션에서 발탁된 배우가 윤혜안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네깟 놈이 뽑혔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시선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핑계를 대고 룸을 빠져나갔다.

“이런 자리도 얼굴 내미는 분이셨어? 배우병 말기라며? 안 올 줄 알았더니 뭐야? 불편해 죽겠어.”

기다렸다는 듯이, 최홍서가 등 뒤에서 문을 다 닫기도 전에 누군가가 불평했다. 들으라고, 들리라고 하는 말이 확실했다. 그래서 최홍서는 문에 등을 기대고 귀를 기울였다. 윤혜안의 실제 평판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기억 안 나는 거 진짜래요?”

“진짜는 무슨 진짜.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다고 기사 났던데?”

“스폰서한테 버림받고 자살 시도해서 의식 불명까지 갔으면 죽을 생각 확실했던 거잖아. 근데 깨어났으니 지도 쪽팔리겠지. 의사는 아무 이상 없다는데도 기억 잃어버렸다고 뻔뻔하게 치고 나오는 거 보면 딱, 윤혜안이지 않아?”

스니커즈의 앞코를 내려다보며 룸 안에서 터져 나오는 요란한 웃음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기억 안 나는 척, 죽었다 살아난 김에 과거 세탁까지 하려나 보죠.”

“그 대단한 연기력이 작품 할 땐 왜 안 나오는지 모르겠네.”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한 번 더 이어졌다. 윤혜안이라는 공공의 적 덕분에 룸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억울해할 것도 없었다. 어쩌면... 윤혜안이 벌여놓은 일들의 뒷감당을 함으로써 자신이 벌인 일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한 대가...

“안 들어갈 겁니까?”

“......”

스니커즈의 한 걸음 앞으로, 시야에 불쑥 들어온 고급스러운 가죽 로퍼 한 켤레. 보통 사람보다 좀 더 작게 얘기하는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

그 주인을 알아챈 심장이 목구멍에서 날뛰고 있었다. 최홍서는 자기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가는 길이었는지, 들어가려는 길이었는지 몰라도, 그쪽이 문을 막고 있어서요.”

이해성이었다.

아찔하게도, 공교롭게도, 함께 남산을 걸었던 그날, 그날 밤 입고 있었던 것과 같은 니트를 입은 이해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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