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쟤 진짜 조그맣다. 무릎에도 안 올 거 같지 않아?”
원재의 말에 사월이 창밖으로 고개를 틀었다. 공원에는 막 걷기 시작하는 어린아이 둘이 보였다. 엄마의 양손은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아이 옆을 어정쩡하게 서성였다. 발을 땅에 디딜 때마다 신발에서는 빨간 불이 켜졌다.
“그러게.”
감흥 없는 시선을 거둔 사월이 운전석을 힐끔 살폈다. 원재는 핸들을 쥔 채 상체까지 기울여 창 너머 아이들을 빤히 바라본다. 의외로 애들 좋아하나 보네. 사월은 그렇게 생각하곤 정면에 시선을 뒀다. 신호등은 아직도 아이들 신발에서 나오는 불과 같은 색이었다.
“모자 쓴 애는 꼭 너 같다.”
그 말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연한 회색 니트 모자를 쓴 아이를 말하는 듯했다. 사월은 가만히 작은 아이를 관찰했다. 옆의 친구는 걸을 때마다 양손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며 웃고 있는데, 모자 쓴 아이는 발을 땅에 댈 때 나오는 불만 빤히 내려다본다. 작게 발을 떼었다 디뎠다 하며 큰 움직임 없이.
“너도 어릴 때 저랬을 거 같아. 속 안 썩이고 얌전하고.”
“저랬는지는 모르겠는데……, 말썽 피운 적은 없어.”
어린 시절을 뒤져 보면 김 사장한테 꾸중을 듣거나 혼나거나 싸웠던 기억은 없다. 그냥……, 그냥 무던했다. 아니, 무던해야만 했다.
“버릴까 봐, 말 잘 들었거든.”
원재의 시선이 사월에게로 돌아간다. 슬픔도 외로움도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말이었다. 원재는 손을 뻗어 사월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리 사월인 어릴 때부터 착했네.”
내가 착했었나. 사월은 가만히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사실 모든 애들이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버림받고 싶지 않아서, 외면당하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눈치껏 예쁜 짓을 하면서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지. 부모라는 튼튼한 울타리 안에 있는 애들이 그런 걸 왜 걱정하고 살았겠어. 사월은 자조했다. 어린 시절을 대략적으로 정의한다면, 착한 게 아니라 오히려 약은 쪽에 가깝지 않았을까.
“난 어릴 때부터 사고 치고 다녀서 형한테 엄청 많이 맞았어. 맷집은 다 형 때문에 생긴 거야.”
“얼마나 까불었으면.”
말끝에 웃음이 묻어났다. 한껏 가라앉았던 분위기의 무게가 조금 덜어졌다.
“형 그림에 낙서하고, 붓 부러트리고.”
“맞을 만했네.”
비스듬히 올라간 사월의 입꼬리를 보고 난 뒤에야, 원재가 웃었다. 신호가 바뀌고,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월의 뒤통수를 지분대던 손이 목덜미를 한 번 주무르고 나서야 떨어졌다.
“너랑 나랑 반씩 닮은 애 있으면, 딱 적당하겠다.”
“……뭐라는 거야.”
“적당히 얌전하고 적당히 말썽 부리고. 그치?”
사월은 그냥 조용히 웃기만 했다. 원재는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애들 싫어해?”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고. 그냥…… 관심이 없는데.”
“왜? 보고 있으면 귀엽지 않아?”
방금 전 보았던 두 아이를 떠올렸다. 입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웃던 아이 하나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발의 불빛을 보던 아이. 왜 사랑스럽지 않고 귀엽지 않겠어.
다만, 그렇게 말하면 너무도 치열하고 건조했던 내 유년시절과 너무 비교되니까. 내가 좀 불쌍하고 초라해지는 거 같아서 그래.
사월은 그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착함과는 거리가 먼 치졸한 감정이라서.
끝내 대답 않는 사월을 보고 원재는 아무 재촉도 하지 않았다. 대신 신호가 걸릴 때마다 사월의 손을 꾹 잡아 줄 뿐이었다.
***
두 사람의 저녁은 평소와 같았다. 늦은 저녁을 챙겨 먹고, 차를 한 잔씩 들고 거실에 앉았다. 조명 하나만 켜 두고, 영화를 튼 채로. 사월의 시선 또한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용은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만 만져.”
등허리를 가로질러 감싸 안은 손이 자꾸만 허벅지 사이를 지분댔다. 사월이 팔꿈치로 밀어내도 원재는 꿈쩍하지 않았다.
“우리 어제도 안 했어. 알아?”
“어제만이잖아.”
하루도 안 거르고 하다가, 겨우 어제만 못 한 거면서. 사월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원재를 흘겼다.
“눈 그렇게 뜨면 꼴리는 거 알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원재는 아예 상체를 틀어 사월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목덜미 부근에 눅진한 숨결이 흐른다. 간지러움을 꾹 참으며 사월은 간신히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불쑥 목에 뜨거운 혀가 갑자기 닿아 신음이 터질 뻔했다.
“아니야, 비켜. 비키라니까…….”
원재의 손이 가슴팍 안으로 쑥 들어왔다. 은근한 손길로 단단해진 젖꼭지를 잡아 살살 돌린다. 사월의 상체가 점점 반대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무너질 것 같은 몸을 팔로 겨우 버텼다.
“하자, 응? 기분 좋게 해 줄게.”
사월이 뺨이 달아오른다. 밀어내던 손길에서도 점점 힘이 빠진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을 뱉는다.
“아, 하지 말……, 읏.”
입술을 깨물지만 이미 신음은 터진 이후였다. 원재가 티를 완전히 밀어 올렸다. 그러곤 비스듬히 기운 사월의 가슴을 입에 물었다. 흥분에 겨운 사월의 눈가가 잘게 구겨진다.
뜨거운 혀가 유두 위를 지분거렸다. 꼿꼿해진 젖꼭지를 이로 살짝 물고 빨고. 타액으로 질척해질 때까지 괴롭혔다. 등 뒤로 뻗은 사월의 팔이 후들댔다.
사월은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겨우 팔을 뻗어 원재의 목에 감았다. 순식간에 한 사람분의 무게가 늘어나자, 원재의 상체도 앞으로 기울었다. 원재가 급하게 사월의 등을 받쳤다. 다급히 입술을 떼서 그런지, 입가가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
“……안아 줘?”
젖은 입술이 비스듬히 올라간다. 그러고는 사월의 허벅지를 당겨 제 위에 앉힌다. 마주 보고 끌어안은 자세가 되자 사월이 목을 감은 팔에 더 힘을 준다. 빈틈없이 맞물려, 원재가 더 애무할 수도, 만질 수도 없게 되었다.
“뒤 만져 달라는 소리였어?”
사월이 퍼뜩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바지 안으로 손이 침범한 뒤였다. 손가락은 거침없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벌써 뻐끔대고 있는 구멍 주변을 살살 문지른다. 사월이 허벅지에 힘을 주고, 원재의 어깨를 단숨에 밀었다.
“그런 소리 아니었거든…….”
겨우 원재의 품을 빠져나온 사월이 흘러내린 바지를 올리며 등을 돌렸다. 오늘도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건가 했는데. 분위기가 자꾸 이런 쪽으로 흐르면 곤란했다.
안 그래도 요즘 작업 시간이 길어져서 오래 앉아 있어야 했다. 허리도 허리지만, 아래가 존나 아프다고. 사월은 등 뒤로 원재가 따라붙을까 걸음을 빨리했다.
“아!”
침실로 들어가기 위해 막 몸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허리에 단단한 팔이 감겼다. 곧바로 불쑥 바지가 내려갔다.
“사월아, 이렇게 섰는데. 왜 아닌 척해.”
혀가 귓바퀴를 진득하게 핥는다. 반쯤 선 아래를 움켜쥐는 손길까지. 사월이 다급하게 벽을 짚었다. 발목에 걸린 바지와 속옷 때문에 걸음을 디딜 수도 없었다. 사월이 허리에 감긴 팔을 풀어내려 몸을 버둥댔다. 그럴 때마다 엉덩이에 닿는 묵직한 감각에, 좆은 더 꼿꼿이 선다.
“읏! 야, 성원재…….”
“돌아 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월의 몸을 휙 돌렸다. 말보다 손이 먼저였다. 하지만 마땅히 눈앞에 보여야 할 가슴팍이 보이지 않았다. 사월의 시선이 허공을 헤매다 아래로 떨어졌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허리춤에 닿아 있었다.
“뭐, 뭐 해.”
“안 할게. 그래도 풀긴 해야 할 거 아냐. 여기.”
원재의 손가락이 귀두를 툭 건드린다. 그러자 퉁, 하고 튀어 오른 성기가 더 꼿꼿이 선다. 귀두는 스며 나오는 액으로 번들대는 중이었다.
“됐, 아니. 안 풀어도 돼.”
어깨를 밀어내려는 움직임보다 좆을 머금는 동작이 더 빨랐다. 사월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고 상체를 기울였다. 등이 둥글게 말렸다. 원재의 뒷목을 움켜쥐었다.
원재의 펠라는 언제고 집요했다. 삽입을 할 때처럼 깊고 빠듯하게 좆을 삼켰고, 사정을 할 때처럼 뜨겁게 빨았다.
“으…….”
골반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붉게 피가 몰릴 만큼 꾹 잡아채는 손길. 목구멍까지 좆을 삼켰다가 부러 이를 세워 기둥을 살살 긁는다. 마른 다리가 휘청댄다. 사월은 원재의 머리를 온통 감싸 안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만, 너무…….”
자꾸 무너지려고 하는 탓에, 원재가 마른 허벅지를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가깝게 당겨 좆을 억지로 입 안에 쑤셔 넣었다. 가득 들어차는 뜨거운 체온. 원재는 혀를 세워 기둥을 훑었다.
“하아, 하…….”
사월의 숨이 가빠지는 만큼 좆을 빠는 행위는 더 뜨거워졌다. 음낭을 입에 넣어 굴리더니 다시 단단한 기둥 위로 입을 맞춘다. 쪽쪽. 낯간지러운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원재의 입가엔 타액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나오겠어, 그만…….”
“입에 싸.”
원재는 사월의 얼굴에서 사정감을 읽었다. 그러곤 작정한 듯, 혀를 뾰족하게 세워 귀두 위에 둥글게 돌렸다. 연한 피부 사이사이로 혀가 침범했다.
한 손으로 엉덩이 아래를 휘어 감고, 다른 한 손으로 좆 기둥을 잡아 위아래로 쓸어 댔다. 좆을 물고 볼이 쏙 들어갈 만큼 강하게 빨았다. 그리고 이윽고.
“으…….”
사월은 온몸의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무릎을 굽히고 앉은 너른 어깨를 잡고, 겨우 버티는 중이었다.
“하아.”
결국 원재의 입에 사정을 했다. 사월은 기운 없는 손으로 넓은 어깨를 뒤로 밀었다. 그러곤 손을 펼쳐 원재의 입 앞에 댔다.
“뱉어……, 삼켰어? 그걸?”
원재가 혀를 내밀어, 입술에 묻은 희뿌연 액체를 슥 훑는다. 시뻘건 혀가 다시 입 속으로 돌아간다. 사월이 당황한 낯을 하더니, 주먹으로 어깨 위를 내리쳤다.
“그걸 왜 먹어, 왜.”
“맛있기만 한데.”
사정 후 늘어진 좆 위에 입을 쪽 맞춘다. 사월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얘 때문에 진짜, 미치겠네.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는 사이, 원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월이 먼저 들어가 있어.”
티슈 몇 장을 뽑은 원재가 사월의 좆을 꼼꼼히 닦아 냈다. 타액과 남은 정액 따위를 정리하곤 속옷과 바지까지 입혀 준다.
“……너는.”
“빼고 올게.”
원재가 턱짓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시선을 내리자 볼록해진 원재의 사타구니가 보였다.
“…….”
사월은 순간 갈등했다. 하자고 할까?
그런 고민을 알아챈 건지, 원재가 사월의 몸을 돌려 침실로 슬쩍 떠민다.
“지금 하면 애기 생길 때까지 하자고 달려들 거 같아.”
“…….”
“너랑 나랑 반반씩 닮은 애.”
사월은 알고 있다. 웃음이 덕지덕지 묻었지만, 저 말은 농담이 아니라는 걸. 그래서 떠미는 대로 밀리는 걸 택한다.
등 뒤로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침대 위로 푹 쓰러졌다. 뜨거운 얼굴은 좀처럼 식지를 않는다. 욕실 너머로 들리는 물소리에 눈을 질끈 감는다.
***
찬물로 샤워를 한 건지, 원재의 몸은 차게 식어 있었다. 사월은 꾸물꾸물 이불을 더 끌어 올렸다.
“나이트 주방에서 일하는 여자가 있었어.”
갑자기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사월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이트 주방이면, 관리하던 곳을 말하는 건가?
“웨이터랑 눈이 맞은 거야. 구질구질한 뒷골목에서 기어코 짝을 찾은 거지.”
사월은 멍청히 눈을 깜빡댔다. 지금 원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두운 방에는 원재의 낮은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골 빈 깡패 새끼들 싸움에 억울하게 껴서 웨이터는 죽었어. 그걸 알게 된 여자는 따라 죽으려고 했지. 그 남자 없으면 사는 게 의미 없었을 테니까.”
쿵쿵. 일정하게 뛰던 가슴이 조금 더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무엇인가를 직감했다는 듯이. 이불을 쥐고 있는 사월의 손등에 힘줄이 불거진다.
“그런데 죽을 수도 없었어. 배 속에 아이가 있었거든. 두 사람의 전부였을 아이 때문에 여자는 죽지도 못하고, 하루하루를 견뎠어.”
“……”
“아이마저 죽일 순 없잖아. 아이는……, 둘이 서로 사랑했다는 뜻이고, 둘이 세상에 살아 있었단 흔적이 될 테니까.”
사월은 원재의 품을 파고들었다. 등 위를 일정하게 두드리는 손길을 느꼈다. 하지만 제멋대로 날뛰는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여자는 죽었어. 기다렸단 듯이 남자를 따라갔지.”
“……”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작은 아이를 뒷골목에 두고 가면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듯했다. 사월은 몇 번이고 떨어지지 않는 입술에, 머뭇대다 말을 꺼냈다.
“그거 설마……. 내 얘기야?”
“네 얘기 같아?”
“…….”
그게 아니라면 원재가 부러 꺼냈을 리가 없다. 사월은 방금 전 들었던 이야기를 몇 번이나 더 되짚었다. 애초에 듣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정작 듣고 나니, 마음이…… 이상했다.
어쩌면 그간은 부모의 이야기를 회피하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세상에 태어날 필요도 없던 존재라서 길바닥에 버린 거라고 할까 봐. 그게 진짜 사실일까 봐. 그런 말을 듣기가 무서웠던 걸지 모른다.
원재의 팔뚝이 축축하게 젖기 시작한다. 사월은 소리 없이 꾸역꾸역 눈물을 흘려 댔다. 자기가 울고 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
무슨 생각을 했을까. 슈퍼에서 가져온 박스에 아이를 담으면서. 4월이라 그리 춥지도 않았을 텐데, 이불로 꾸역꾸역 아이를 감싸면서. 엄마를 보고 방긋방긋 웃는 아이를 보며, 무슨 말을 했을까.
주차된 차들 사이로 박스를 내려놓으면서. 길고양이가 주변에서 대신 울어 주는 걸 보면서. 마냥 죽음만 떠올렸을까? 넌 잘살아, 우리 몫까지. 그렇게 말했을까?
“……흐으.”
사월은 결국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렸다. 원재는 눈을 감았다. 고요한 어둠 속을 파고드는 서글픈 울음을 토닥였다.
“…….”
아마도 여자는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미안해.
***
새벽 내내 울었던 탓인지, 눈꺼풀이 무겁기도 하고 이물감마저 느껴졌다. 사월은 힘없는 팔을 뻗어 얼굴을 매만졌다. 눈 위에 얇은 수건이 얹혀 있었다. 식은 걸 보니, 올려 둔 지 시간이 꽤 지난 듯했다. 수건 때문인지 눈이 완전히 붓지는 않았다. 사월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성원재.”
부름에 돌아오는 답이 없다. 보통은 작게만 불러도 곧장 눈앞에 나타났었는데. 사월이 눅눅한 눈두덩을 꾹 누르며 이불을 걷었다. 그제야 탁자 위에 놓인 노란 포스트잇이 보였다.
최 비서가 새벽부터 찾아 대서. 나 없다고 놀라지 말고, 먼저 나가서 미안해.
사랑해, 내 우주.
사월은 몇 번이고 쪽지를 읽었다. 그러고 나니 탁자 위에 올려진 하얀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목 안이 까끌대는 것을 느꼈다. 무엇인지 확인해야 하는데,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한참이나 주저했다. 그걸 보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월은 마른침을 삼키고 팔을 뻗었다.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두께감이 있는 종이를 뒤집자, 검은 잉크 사이로 드문드문 희게 번진 사진이 보였다. 검은 종이 위, 물을 잔뜩 머금은 붓을 주욱 그은 것 같기도 했다.
사월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진다. 글자를 읽는 동공이 잘게 떨린다. 어느새 뺨은 축축하게 젖은 채였다. 마른 손가락이 바랜 글자 위를 찬찬히 훑는다.
너는 우리의 우주♥
사월은 언제고 누군가의 우주였다.
그걸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