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꿈에 횟집 부부가 나왔다. 물살을 가르고 밤바다에 들어갔던 자신을 끌어 올리던 손길과 목소리가 생경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꾹 눌렀다. 힘이 쭉 빠진 손가락이 저릿했다.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펴자 하얗게 질렸던 손에 피가 돌았다.
“아…….”
불안한 가슴은 쉽게 진정되질 않았다. 이럴 때면 늘 원재의 체온으로 안정을 찾았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없으니 그런 듯했다. 사월은 후회했다. 빨리 오라고 할걸. 일은 나중에 하고, 그냥 나를 보러 오라고 할걸. 그래도 된다고 했는데.
사월이 저린 손으로 휴대폰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 가장 위에 있는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지만 바라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월은 잇새로 손톱을 깨물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
결국, 원재는 받지 않았다. 다시 한번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사월은 머뭇대다 손을 뗐다. 오늘은 매일 아침 와 있던 연락도 없었다. 원재가 연락이 안 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였다. 사월은 더 재촉하지 않고 기다릴 생각이었다.
원래도 깨끗했던 집을 더 깨끗하게 치우고, 이불 빨래를 돌렸다. 몸을 바쁘게 움직이니 시간 또한 빨리 지나갔다. 점심시간에 맞춰 사월은 식탁에 앉았다. 오늘따라 식탁이 더 넓어 보였지만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거의 일을 해치우다시피 식사를 했다. 그리고 나니 더는 할 게 없어졌다. 어제 내내 밖에 있었으니 오늘은 집에 있어야겠다. 그림을 그릴까 하다 사월은 찌뿌듯한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도대체 어디서 사 오는 건지 욕실엔 알록달록한 입욕제가 한가득이었다. 원재는 사월이 입욕제를 풀어 놓고 욕조에 앉아 있는 걸 좋아했다. 매번 욕조에 물을 채워 자신이 고른 입욕제를 풀었고, 욕조 끄트머리에 앉아 내내 지켜보기도 했다. 처음엔 민망했던 일이지만 이젠 그 시선 하나 없다고 허전하기까지 했다.
보랏빛 물에 몸을 담근 사월은 물살 위를 손바닥으로 훑었다.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피곤이 노곤하게 풀렸다. 욕조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포근한 느낌에 잠이 솔솔 오는 듯했다.
수마의 경계에 발을 걸친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열린 틈으로 훅 끼쳐 들어오는 찬바람에 사월이 눈을 떴다.
“보기 좋네.”
낮음 음성이 욕실에 울렸다. 허상이라도 본 것처럼 사월은 눈을 깜빡였다. 헝클어진 차림을 한 원재는 셔츠 단추 하나를 툭 풀어내며 거리를 좁혔다. 젖은 채로 늘어진 사월에게 꽂힌 시선은 형형했다.
“전화 안 받길래 또 밖에 놀러 갔나 했는데.”
“……너 올까 봐 안 나갔어.”
사실 피곤하다는 건 핑계였다. 눈을 뜬 순간부터 내내 기분이 가라앉아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원재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몸을 바쁘게 움직이고 맛있는 걸 먹어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원재가 나타나자 마음속 어둠은 금세 걷혔다.
“나 기다렸어?”
사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댔던 상체를 바로 세우고 앉았다. 욕조 근처로 다가온 원재가 축축한 머리칼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뒤로 단정하게 넘기고는 욕조에 걸터앉았다. 코끝에 느껴지던 달콤한 향은 뒷전으로 밀린 지 오래였다. 원재의 묵직한 향수 잔상만 남았다.
“……같이 씻을래?”
“그러고 싶은데. 시간이 없네.”
“다시 가야 돼?”
원재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젖은 뺨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혀 아래에 침이 고이고 아랫배가 저릿해졌다. 당장이라도 욕조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욕심을 잠깐 접어 두었다. 사월과 보내는 첫 휴가가 이미 엉망이 된 터라 얼른 출발해야 했다.
“우리 휴가 더 짧아지면 안 되니까.”
원재는 물속에 잠긴 마른 팔을 꺼냈다. 셔츠 소매가 젖는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손목에 새겨진 네임을 엄지로 느릿하게 문질렀다. 지문으로 글자의 굴곡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원재가 팔을 끌었다. 조용한 욕실 안에 물이 주르륵 흐르는 소리만 울렸다. 젖은 손목 위로 뜨끈한 입술이 닿았다. 사월은 두 체온이 맞닿는 순간을 빤히 바라봤다. 꼭 의식을 치르듯 경건한 표정과 행동에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보고 싶었어.”
의식하지 못한 사이 진심을 뱉어 버렸다. 작은 중얼거림이라 해도 원재가 그 말을 놓칠 리 없었다. 새빨간 혀가 입술 주변을 훑었다. 입가에 눅진하게 남아 있는 사월의 체온을 다 핥아 버릴 듯 느릿한 움직임. 마른 몸을 스치는 눈길은 더욱 농밀해졌다.
키스는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마치기가 무섭게 상체를 기울였다. 축축한 입술을 가르고 다급하게 혀가 뒤엉켰다. 원재의 고개가 기울어지고 입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이가 부딪칠 만큼 거칠게 몰아붙이는 힘에 사월의 상체가 뒤로 밀렸다. 그 바람에 질척한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졌다. 입 안을 헤집던 원재의 혀가 입술 위를 느릿하게 핥았다. 작은 틈으로 거친 호흡이 오고 갔다.
“나 잡아 봐.”
원재의 손바닥이 목덜미를 훑고 어깨를 지나 팔꿈치를 가볍게 쥐었다. 사월이 고개를 저었다.
“옷 젖어.”
“괜찮아.”
원재가 상체를 기울이더니 물속에 잠겨 있던 두 팔을 끌어 올렸다. 물기가 흥건히 묻어 있는 사월의 팔을 자신의 목에 감았다. 그러곤 등허리를 세게 당겨 품에 안았다. 셔츠는 삽시간에 축축해져 피부가 고스란히 비쳤다. 손가락 한 마디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
원재의 눈동자가 사월을 샅샅이 훑었다. 젖은 옷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 눈에 담겼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를 숨기지 않은 원재가 입술을 떼었다.
“우리 젖는 게 한두 번이야?”
낮은 목소리는 욕실을 크게도 울렸다. 사월의 뺨은 욕조 속 물과 같은 색이었다. 달아오른 양 뺨을 지그시 누르자, 입술이 벌어졌다. 시뻘건 입 안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원재가 뾰족하게 세운 혀를 밀어 넣었다. 삽입하듯 버겁고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춥, 추웁. 질척한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원재의 목에 감긴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원재의 상체가 더 낮게 기울어지자 조그만 입은 더 크게 벌어졌다. 굶주린 혀가 입 안을 거칠게 헤집었다.
“흐읍…….”
숨이 찬 듯 사월이 고개를 뒤로 물렸다. 원재는 입술만 살짝 뗀 채로 눈을 깔아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살짝 찡그린 미간과 붉게 젖은 입술, 습기가 맺혀 가라앉은 속눈썹. 모든 게 마음을 동하게 했다. 원재는 호흡을 고르는 사월의 뺨에 입을 맞추고 몸을 세웠다. 여기서 더 했다간 여행이고 뭐고 휴가 내내 달라붙을까 봐.
“씻고 나와. 준비하고 있을게.”
작은 머리가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는 몸을 돌렸다. 단추를 풀러 젖은 셔츠를 벗어젖혔다. 몸에 가득 찬 열기는 쉽게 빠지지 않을 것 같았다.
***
사월은 영문도 모른 채 차에 올라탔다. 원재가 트렁크에 뭘 싣는 것 같긴 했는데 어떤 걸 챙겼는지도 몰랐다.
가까운 데로 향하는가 했는데 차는 고속도로를 타고 한참이나 달렸다. 어딜 가냐고 물어도 원재는 어깨만 으쓱이더니, 사월의 끈질긴 시선에 짧게 대답하는 거였다.
“최 비서 고향.”
사월이 눈을 깜빡거리며 말을 곱씹었다. 최 비서 고향에 왜 가는 거지?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꼭 지금 가 봐야 된대. 조금 더 늦으면 사람들 몰린다고. 사람 많은 거 싫어하잖아.”
“그렇긴 한데……. 최 비서는 같이 안 가?”
고향이면 길도 더 잘 알 텐데. 사월의 말에 원재가 웃음을 흘렸다. 최 비서는 같이 가자고 해도 갈 사람이 아니었다. 사월과 원재 사이에 있는 걸 극도로 피곤해하는 탓이었다. 정확히는 원재 때문이겠지만.
“형은 많이 봤을 테니까 안 와도 돼. 혼자 집에서 쉬는 쪽을 더 좋다고 할걸.”
도대체 뭘 보러 가는 거지. 점점 궁금증이 켜졌다. 원재는 힐끔 사월을 살피고는 티 나지 않게 웃었다. 궁금해하는 속내가 티가 나는데 묻지는 않는 게 꽤 귀여웠다. 온전히 자신을 믿고 있는 것 같아서 괜히 뿌듯하기도 했다.
“어두워지는데. 갔다가 금방 와야 되겠네.”
창밖으로 시선을 둔 사월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바쁘니까 오래 있지도 못할 테고. 음성에서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원재는 이정표를 확인하곤 천천히 핸들을 돌렸다.
“휴가 끝날 때까지 거기 있을 건데.”
“숙소 예약했어?”
“그럼. 사월이랑 휴가 거기서 보내려고 했으니까.”
휴가 기간을 꽉 채워 예약해 둔 곳이었다. 이렇게 늦게 갈 줄은 몰랐는데. 원재는 남은 시간이라도 꽉 채워 좋은 기억을 심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사월은 다시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궁금하기는 해도 불안하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이제는 원재가 옆에 있으니까.
해가 어둑하게 지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둠을 가르고 철썩대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바람에 익숙한 바다 내음이 섞여 있었다. 리셉션에 들어갔던 원재가 조금 떨어진 곳으로 사월을 데려갔다.
룸에 들어서자 사월은 홀린 듯 거실을 가로질렀다.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움직이자.”
“…….”
“저녁 뭐 먹을까.”
사월은 벽 한 면을 다 채운 널따란 창가에 서서 바깥을 구경했다. 뒷모습에서도 설렘이 읽혔다. 원재는 작게 웃으며 짐을 소파에 올려 두었다. 그러곤 사월의 뒤로 바짝 붙어섰다. 고개를 기울여 사월의 머리에 이마를 툭 기댔다.
“또 나 안 보이나 봐.”
“아니…….”
원재의 음성에 사월이 어깨를 들썩이며 놀랐다. 무언가에 집중하면 주변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까닭이었다. 오늘 꿈에 나왔던 것처럼 깊고 검은 바다에 눈을 빼앗긴 게 잘못이었다.
사월은 허리에 감기는 팔을 느끼며 눈을 느릿하게 굴렸다. 그제야 주변이 시야에 들어왔다. 발코니에는 월풀이 있었고, 티 테이블도 놓여 있었다. 조용하고 깔끔한 분위기였다.
“마음에 들어?”
웃음 섞인 목소리였다. 원재는 품에 안긴 사월을 끌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곳곳에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침대에서도 욕조에서도, 거실에서도. 사월은 원재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응. 좋네.”
여긴 사월이 좋아할 만한 것들로 가득했다. 철썩이며 거품을 일으키는 파도, 부드러운 이불, 두 사람은 충분히 들어갈 욕조.
그리고 성원재.
“그래? 다행이네.”
원재가 고개를 틀어 사월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촉. 축축한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졌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큰 손바닥이 옆구리를 느릿하게 쓸었다. 전화할 때마다 밥을 챙겨 먹었다고 하긴 하던데. 살이 붙지는 않은 것 같았다. 여기 있는 동안에는 많이 먹어야겠다고 다짐한 원재는 오면서 봐 두었던 레스토랑들을 떠올렸다.
***
“입에 맞아?”
“응.”
한 입 크기로 자른 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원재는 먹는 둥 마는 둥 작은 입이 오물대는 것만 빤히 보고 있었다.
“와인 더 줄까.”
사월은 고개를 저었다. 술은 별로 잘하지 못했고, 오늘 같은 날 취하고 싶지도 않았다. 느릿하게 턱을 움직이던 사월이 툭 건조한 목소리를 뱉었다.
“넌 왜 안 먹어?”
“너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불러서.”
사월이 미간을 찌푸렸다. 뭔 개소리래. 딱 그 표정이었다. 원재는 웃음이 헤픈 사람처럼 실실 웃었다. 남은 휴가를 사월과 온전히 보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렇게 예쁘게 웃는 얼굴을 못 볼 뻔했잖아.
원재는 이제 턱을 괴고 본격적으로 사월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렇게 음식을 꼭꼭 씹지? 씹는 소리도 안 들리게? 입이 짧아서 그렇지 가리는 것도 없고. 아마 최 비서가 옆에 있었다면 학을 뗐을 생각들. 지금 원재의 눈에 사월은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나 다름없었다.
“……그만 보고 먹어.”
원재의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입가에 가깝게 다가온 고깃덩어리를 한 번, 사월의 얼굴을 한 번 확인했다. 사월은 부끄러운지 시선도 맞추지 않고 자신이 들고 있는 포크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원재가 입을 벌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재촉하듯 손을 작게 흔들었다.
“안 먹어?”
“와. 사월이가 나 먹여 주는 거야?”
능글맞은 목소리에 사월의 귀가 빠르게 달아올랐다. 말 사이사이에 웃음이 짙게 섞여 있었다.
누가 볼 것 같은데……. 먹지는 않고 자꾸 웃고 난리야. 나보고 살이 빠졌다는 둥, 밥 잘 안 챙겨 먹는다고 뭐라 하더니. 원재도 마찬가지였다. 살이 내렸는지 얼굴선이 날카롭게 벼려 있다.
사월이 힐끔 홀을 바라봤다. 다행히 이쪽에 시선을 두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고기를 먹여 주겠다고 이러고 있는 꼴이 민망하기는 했다.
“먹기 싫으면 말아.”
사월이 내밀었던 팔을 거두려던 참이었다. 단숨에 팔목을 휘어잡은 원재가 고개를 기울였다.
“누가 싫대?”
웃으면서 포크 끝에 야무지게 꽂혀 있는 고기를 베어 물었다. 원재가 힘을 풀자 사월은 빠르게 손을 거뒀다. 그러곤 거의 접시에 얼굴을 파묻을 기세로 포크질을 시작했다.
원재는 사월이 더 부끄러워하지 않게 소리 없이 웃었다. 방금까지 제 손으로 잘라 먹던 것과 똑같은 건데. 기분 탓인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또 줘?”
계속 빤히 쳐다보는 눈길을 향해 사월이 툭 말을 던졌다. 고개를 저은 원재는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들었다. 이러다간 사월의 식사를 다 받아먹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얼른 먹고 숙소로 돌아가 하고 싶은 게 생겼다.
“쉬는 동안 잠은 좀 많이 자 뒀어?”
긍정의 뜻으로 끄덕이는 얼굴. 원재는 일말의 죄책감을 덜어 냈다. 아직 휴가가 사흘은 남았으니 마지막 날만 푹 쉬면 되겠지. 작게 자른 고기 몇 점을 사월의 접시 위로 옮겼다.
“너나 먹어.”
사월은 남은 와인을 홀짝이느라 이채를 띠는 원재의 눈동자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
야경을 보며 로맨틱한 식사도 했고, 돌아오는 길엔 바닷가도 거닐었다. 4월 중순을 향해 가는 터라 꽤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10분 남짓 걸려 숙소에 도착했다.
그때부터 사월은 미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왜인지 원재는 아까부터 말수가 적어졌는데, 닿는 시선은 무섭도록 뜨거웠다. 굳이 밤바다를 보자고 시간을 끄는 동안에도 원재는 바다 대신 사월을 눈에 담았다. 거기서 읽히는 노골적인 감정을 더는 피할 수가 없었다.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서자 원재가 바짝 몸을 붙여 왔다. 어깨를 가로지르며 감싸는 단단한 힘에 사월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고개를 기울인 원재가 귓가에 입을 맞췄다. 촉―. 물기 어린 소리가 맴돌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이제 잘 시간이네.”
낮은 음성에서 전해지는 파동에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사월이 작게 몸을 움찔하자 원재는 꽤 순순히 팔을 풀었다.
“같이 씻을까?”
대답은 듣지도 않고 앞장서 룸 안으로 들어선다. 약간 다급하게까지 느껴지는 뒷모습을 보며 사월은 뜨거운 숨을 뱉었다. 보이지는 않겠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물음에 거절은 어울리지 않았다.
옷도 하나 벗지 않고 곧장 욕실로 향한 원재는 물을 틀었다. 욕조 앞엔 바다가 훤히 보이는 창문이 크게 나 있었다. 사월이가 좋아하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셔츠 단추를 풀어냈다. 습관처럼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느릿하게 문질렀다. 왠지 허리 쪽이 뜨끈해지는 기분이었다.
“더워?”
욕실에 나란히 등을 대고 창문이 난 방향으로 앉아 있었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사월의 뺨이 갈증을 부추겼다.
원재가 그 위를 손등으로 쓸었다. 사월은 대답 없이 시선을 멀리 두었다. 검게 일렁이는 바다가 시야에 들어찼다. 얼마나 칠흑 같은지, 두 사람의 모습이 창에 고스란히 비쳤다. 꼭 거울처럼.
“아니면, 나랑 있어서 그래?”
“……더워서.”
사실 둘 다 맞는 이유였다. 열이 많은 사월에게는 물 온도가 꽤 높았다. 젖은 머리를 넘긴 채 자신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길 역시 지나치게 뜨거웠다. 움직일 때마다 물살이 철벅대는 소리를 내며 일렁였다.
“자기야, 긴장했어?”
왜 이렇게 눈을 귀엽게 굴려. 원재가 욕조 턱에 팔을 걸친 채 상체를 틀었다. 가슴팍에 사월의 마른 어깨가 툭 닿았다. 팔을 뻗은 원재는 고집스레 정면을 향한 고개를 살짝 당겼다.
“아무리 바다가 좋다고 해도 그렇지. 눈길 한 번 안 주네.”
온통 젖은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했다. 한번 얽힌 시선은 뜨겁게 뒤엉켜 서로를 옭아맸다. 원재의 눈동자가 사월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 내렸다. 고작 며칠 못 본 것뿐인데. 그게 꽤 타격이 컸다. 뭘 먹고 뭘 마셔도 갈증과 굶주림은 도통 채워지지 않았다. 사월이 없는 시간은 그랬다.
“난 지금 사월이밖에 안 보이는데. 나만 이런가 봐.”
말엔 웃음이 맺혀 있었다. 사월은 고개를 푹 숙였다. 김이 얕게 퍼지는 물 아래로, 두 사람의 살결이 고스란히 비쳤다. 입욕제도 풀지 않아 투명한 물속. 두 사람의 아래는 이미 서로를 갈구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아닌 거…, 알잖아.”
얼굴이 붉어졌으면서도 사월은 꾹꾹 글자를 눌러 발음했다. 기분을 표현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았던 사월에게 이런 말은 아직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원재에겐 숨기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할 때마다 좋아하는 원재의 모습을 보는 게 나쁘지 않았고, 또 그에게 감정을 감추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알지. 근데…….”
붉게 젖은 입술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원재가 고개를 기울였다. 점차 그림자가 내리는 시야에 사월은 눈을 감았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음성이 낮게 가슴에 울렸다.
“내가 다 알아도. 그래도 말해 줘.”
사월이 입술을 뗐다. 대답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원재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작게 벌어진 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뜨거운 살덩이가 닿자마자 급하게 뒤엉켜 왔다.
원재는 완전히 상체를 틀어 팔을 뻗었다. 양팔에 사월을 완전히 가둔 채로 거칠게 입을 맞췄다. 그간 굶주렸던 것을 채우듯 다급하고 절박한 입맞춤이었다.
사월의 고개가 점점 뒤로 넘어갔다. 다물리지 못하는 입술에선 타액이 흘러내렸다. 자꾸 아래로 가라앉는 사월 때문에 원재의 미간이 깊게 팼다. 결국 원재는 몸을 일으켜 사월의 앞에 마주 앉는 자세를 취했다. 이어 그대로 마른 몸을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그 과정 내내 입술이 떨어지면 안 되는 것처럼 계속 빨고 핥아 댔다.
늘 한 템포 빠른 원재의 페이스에 맞춰 혀를 움직이던 사월이 넓은 어깨 위에 팔을 둘렀다. 고개를 틀자 더 깊게 입술이 맞닿았다. 아래로는 뜨겁고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는 욕조 안. 거친 숨소리가 초침처럼 들렸다.
“아….”
원재의 큰 손이 바짝 선 좆을 쥐었다. 아랫배 사이에 맞닿은 두 개의 성기가 이리저리 부대꼈다. 사월은 어깨 위에 이마를 기댄 채 바들바들 떨었다. 몇 번을 겪어도 이 감각은 늘 생경했다. 물이 스치는지 아래가 간질거렸다. 사월이 밑에 힘을 주자 몸이 작게 들썩댔다.
“한 발 빼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아. 성, 원재…….”
신음에 자신의 이름이 녹아내렸다. 사월은 제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연신 흐느끼듯 이름을 부르며 몸을 비트는 걸 보면.
어깨를 움켜쥔 손끝이 붉어졌다. 꽤 강한 힘을 느낀 원재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이라도 아래를 들쑤시고 싶지만 이게 사월이 덜 힘든 방법임을 알았다.
“원, 원재. 아읏…….”
“후으.”
원재는 숨을 길게 쉬었다. 제법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도 손바닥 아래 느껴지는 열기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길이가 다른 좆을 한 손에 쥐고 빠르게 위아래로 흔들어 댔다. 그럴 때마다 사월이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왜 이렇게 흥분했어.”
“아, 빨리…….”
어깨에 기댄 이마를 이리저리 비비적거리며 졸라 댔다. 이렇게 사월이 보챌 때마다 원재는 인내심을 시험당하는 기분이었다. 안 아프게 해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우리 사월이는 도통 협조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네.
원재는 목에 힘줄이 설 만큼 강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엄지로 귀두 끝을 비볐다. 얇은 피부가 밀리며 뿌연 액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좆을 더 빠르게 흔들자 물결이 세게 일렁였다. 파도 같은 물살이 욕조 끝에 닿아 부서졌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온통 붉은 사월의 몸이 시야에 잡혔다.
“하아….”
탄식 같은 신음을 흘려야 했다. 한동안 하지 못해서인지 일전에 남겨 두었던 흔적이 대부분 희미해졌다. 하얀 피부 위를 엉망으로 만드는 상상을 했다. 아랫배가 저릿해지며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원재는 고개를 틀어 사월의 귀를 잘근 씹어 버렸다.
“읏.”
혀로 귓바퀴를 핥고, 이로 씹고. 자극을 줄 때마다 사월은 흐느끼는 소리를 뱉었다. 원재는 손에 힘을 주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좆 기둥을 비벼 댔다.
엄지 끝으로 뜨끈한 감각이 느껴졌다. 사월의 몸이 축 늘어지면서 바르르 떨렸다. 안 그래도 뜨끈했던 물의 온도가 조금 더 높아졌다. 그래도 성기를 흔드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물면서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아, 아읏.”
사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사정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원재의 흥분이 고스란히 넘어온 탓이었다. 뜨겁게 팽창한 좆이 배꼽 위를 쿡쿡 찔러 왔다. 질척한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지자, 그 위로 붉은 울혈이 남았다. 살결을 혀로 핥던 원재가 미간을 구겼다.
“읏.”
툭 터지는 감각과 함께 정액이 섞여 들었다. 부둥켜안은 두 사람은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을 흘렸다.
“아, 잠깐만…….”
엉덩이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손가락에 사월이 상체를 일으켰다. 어깨를 잡고 몸을 작게 뒤로 물렸다. 원재의 눈은 이미 초점이 어긋나 있었다. 완전히 흥분에 취한 모습에 사월은 버둥대던 것을 멈추었다.
“왜.”
“으읏…….”
손가락 하나를 더 짓쳐 넣으며 원재가 물었다. 낮은 목소리에 배 속이 다 근질거렸다. 사월은 대답하지 못하고 아랫입술만 깨물었다.
“손가락으로 하는 거 싫어서 그래? 응?”
길쭉한 손가락 두 개가 안을 들쑤시며 가위질하듯 입구를 넓혀 댔다. 엉덩이를 감싸 쥔 나머지 손가락 끝에도 힘이 잔뜩 들어가 붉어진 채였다. 물살이 안으로 빨려 들어오듯 하며 속살을 간질였다.
뜨거운 내벽을 가른 손끝은 익숙하게 안을 훑었다. 곧 안쪽 깊숙한 곳에 닿았다. 원재는 눈을 번뜩이며 그곳을 미친 듯이 자극하기 시작했다.
“아, 으응, 읏!”
사월이 몸을 크게 들썩이며 신음을 내질렀다. 자극하는 손길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무릎을 세우기까지 했다.
원재는 사월이 더 빠져나가지 못하게 허리를 세게 끌어안고는 안을 푹푹 쑤셔 댔다. 사월의 하반신은 욕조에 담긴 물인지 아래에서 나온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온통 젖어 있었다.
고개를 든 원재가 판판한 가슴을 베어 물었다. 혀끝으로 유두를 굴리다가 쪽쪽, 진득하게 입을 맞췄다.
사월은 눈앞이 하얘지는 감각을 느꼈다. 발끝이 안으로 말려들고, 몸이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 단단히 버티고 선 어깨를 밀어내려 발버둥을 쳐도 원재는 꿈쩍하지 않았다. 가슴을 아프게 빨아 대고 씹을 뿐.
“아, 아파……. 원재, 원재야.”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 바짝 조여도, 손가락은 너무도 쉽게 안을 들쑤셔 댔다. 약지 하나가 더 밀려 들어오며 입구가 완전히 빠듯해졌다.
“힘 빼.”
유두를 입술로 물면서 하는 말은 그거였다. 사월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차라리 좆으로 안을 찔러 줬으면 좋겠는데. 손가락은 집요하게도 한곳을 비비고 눌렀다.
“읏, 아니…….”
이거 안 하고 싶어. 울먹이는 목소리를 용케 알아들었으면서도 원재는 반대편 가슴을 빠는 행위에 집중했다. 양쪽에 똑같이 잇자국과 붉은 울혈을 남기고 나서야 입술을 떼었다.
“그래도 해야지.”
어린애를 달래는 투였다. 말을 하면서도 젖은 입술은 바쁘게 쇄골 위에 흔적을 그렸다. 빠듯한 내벽은 손가락 세 마디를 전부 삼켜 냈다. 끊어질 듯 조이기는 해도 어느 정도 좆을 받아들일 만큼 풀린 듯했다.
원재는 내벽을 긁어내듯 구부리면서 손가락을 빼냈다. 지문이 스칠 때마다 사월은 몸을 떨었다. 금방이라도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허리를 억세게 틀어쥔 힘은 풀리지를 않았다.
“어떻게 해 줄까.”
“하아…….”
원재는 다시금 빳빳하게 세워진 제 좆을 느릿하게 쓸면서 물었다. 엄지로 귀두를 몇 번 문지르고는 뻐끔대는 입구에 가져다 댔다. 기둥을 잡은 채 삽입을 할 듯 말 듯, 끄트머리만 겨우 걸친 채였다. 사월의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응?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천, 천….”
허리를 그러쥐었던 팔을 풀어냈다. 그러곤 온전한 대답도 하지 못하는 사월의 마른 허벅지를 몇 번 쓸었다. 손바닥은 허벅지를 스치고, 엉덩이를 살짝 쥐었다가 종국엔 골반을 꽉 틀어잡았다. 몸을 낮추지 않으려고 힘을 주는 사월의 골반을 아래로 끌었다.
“읏, 으…. 천천히…….”
겨우 머리만 삼켰으면서도 사월은 천천히 하라는 말만 반복했다. 여기서 어떻게 더 참지. 관자놀이 옆에 힘줄이 다 설 지경이었다. 원재는 좆 기둥을 대충 훑고는 사월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몸이 아래로 훅 떨어졌다.
“으읏!”
짧은 신음과 함께 사월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내벽을 꽉 채운 성기 때문에 숨을 쉬기도 버거웠다. 원재는 마른 허리를 움켜쥐고 아래를 쳐올렸다. 낮게 요동치던 욕조 안에는 어느새 거센 물결이 이리저리 부딪혀 댔다.
“으응. 읏, 아.”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아 접합부를 끈덕지게 바라봤다. 검붉은 좆 기둥이 손가락 한 마디쯤 드러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야살스러운 장면을 계속 눈에 담았다. 씨발, 오늘은 천천히가 안 되겠는데.
며칠 만에 하는 섹스라 그런지 안이 더 버겁게 달라붙어 왔다. 빠져나가지 말라는 듯 완전히 좆을 에워싸고 삼켜 낸다. 짧게 호흡을 뱉은 원재가 허리를 빠르게 짓쳐 올렸다. 축 늘어졌다 다시 빳빳하게 서기 시작하는 사월의 중심을 보니 눈동자에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원, 재야…. 읏.”
사월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도 애타게 원재를 불러 댔다.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탄탄한 몸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 가슴팍 사이로 거센 물결이 빠르게 움직였다.
사월은 흥분을 담아 무거운 눈꺼풀을 느릿하게 밀어 올렸다. 넓게 난 창으로 겹쳐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정확히는 원재의 움직임에 따라 힘없이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이.
“아….”
“사월아, 사월아…….”
원재의 손바닥이 사월의 뒤통수를 꾸욱 눌렀다. 둘은 빈틈없이 서로를 안은 꼴이 되었다.
사월은 검은 바다가 비치는 유리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원재와 섹스를 할 때, 자신은 늘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달아오른 뺨, 찡그린 눈과 잔뜩 구겨진 미간. 그럼에도 눈에는 욕망이 가득 차 있었다. 잔뜩 젖은 채 벌어진 입술에선 뜨거운 숨과 함께 신음이 터졌다.
허리를 박아 올릴 때마다 원재의 등 근육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사월을 더 세게 끌어안으면 굵게 굴곡이 진 날개 뼈도 요동을 쳤다. 그 움직임이 사월에게는 선정적으로 느껴졌다. 자신이 움켜쥔 어깨 위에, 손끝 모양을 따라 움푹 패는 걸 보니 좆이 욱신대는 것 같았다.
“더, 더어, 빨리.”
사월은 거친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뒤로 누르듯 흔들었다. 더 깊은 자극을 갈망하는 사람처럼.
“후으.”
원재는 턱이 단단해질 만큼 이를 세게 악물었다. 사월의 마른 다리를 제 허리에 감았다. 자신에게 완전히 매달린 자세가 되자, 엉덩이를 받치고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물줄기가 욕조 아래로 요란하게 추락했다.
“읏.”
우리 사월이가 더 빨리해 달라는데 자세가 영 불편한 탓이었다. 욕조 밖으로 나가는 동안에도 원재는 연신 아래를 쳐올려 댔다. 손가락으로 엉덩이 사이를 더듬어 접합부를 슥 훑기까지 했다.
사월은 그의 목을 세게 껴안았다. 걸음을 디딜 때마다 내벽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감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뒤통수를 안정적으로 감싸 쥔 손이 세게 끌어당기는 힘을 느끼면서 사월은 사정했다.
“……하아.”
두 사람이 지나는 길에는 뿌연 액체와 함께 물이 흥건했다. 원재는 배에 흩뿌려진 뜨끈한 액체를 뒤늦게 깨달았다. 멈칫 걸음을 멈추곤 뻑뻑한 눈동자를 굴렸다. 침대까지 가기엔 길이 너무 멀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보채.”
“으응….”
“존나 흥분되게.”
잇새로 억누른 목소리였다. 흥분이 머리끝까지 치달아 정상적인 사고가 되지도 않는 기분이었다.
침대에서 해야 사월이 덜 힘들다는 걸 알지만 지금은 그런 것까지 생각해 낼 여유가 없었다. 의자에 대충 걸쳐 놓은 자신의 코트를 아일랜드 바에 깔았다. 자신에게 엉겨 붙은 몸을 그 위에 조심히 눕혔다. 원재는 상체를 세워 하얀 허벅지를 제 쪽으로 세게 끌어 당겼다. 몸이 아래로 끌리는 속도에 맞춰 허리를 거세게 찍어 눌렀다.
“후, 여기서 한 번, 만 하고. 침대로 갈게, 한 번만.”
“아읏.”
이미 사월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두 번째 사정해서 축 늘어진 제 성기를 잡아 흔들고, 원재의 허리를 감싼 다리에 더욱 힘을 주기까지 했다. 원재는 그 야해 빠진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더 세게 안을 들쑤셔 댔다.
좆이 빠듯해질 만큼 조이기 시작하자 원재는 몰려오는 사정감을 느꼈다. 입술을 세게 짓씹으며 꾸욱 밀어 넣었다. 더 닿을 곳도 없을 것같이 깊은 곳까지. 사월의 마른 배 위로 굴곡이 지는 것을 보고는 끝내 사정했다. 뜨겁게 들이차는 정액에 사월은 몸을 떨었다.
사정하고 난 뒤 좆을 천천히 빼는 순간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는 원재는 마지막 정액까지 뱉은 뒤에야 느긋하게 허리를 물렸다. 힘이 풀린 사월의 허벅지를 단단하게 쥔 채로.
잔뜩 젖은 성기가 빠져나올 때 뜨거운 액체도 함께 흘러나왔다. 엉덩이 사이로 뿌연 액이 덩어리처럼 울컥 새어 나왔다. 코트 위를 흠뻑 적시는 것을 보면서 원재는 더 느릿하게 성기를 빼내는 일에 집중했다.
사월이 미간을 구기며 입술을 깨문다. 자신의 좆을 흔들던 행위도 멈추고 온전히 아래에 정신을 쏟는 것 같았다. 뻐끔대는 구멍이 원재의 것을 느릿하게 물었다가 놔주기를 반복했다. 아래에 가득 찼던 부피감이 완정히 사라지자 사월은 낮은 한숨을 뱉었다. 감긴 속눈썹은 물기를 머금은 채 파르르 떨렸다.
“자는 거야?”
“…….”
붉은 입술 사이에선 대답 대신 뜨거운 호흡만 흘러내렸다. 원재는 상체를 기울였다. 감긴 눈두덩 위에 입을 맞췄다.
“자는 척해도 오늘은 소용없는데.”
작게 웃은 원재는 늘어진 사월의 팔을 잡아 자신의 어깨 뒤로 넘겼다. 마른 몸을 손쉽게 안아 들었다. 작은 키도 아닌데 품에 푹 기대 오는 체온. 다시금 흥분이 밀려왔다.
“이틀 동안 못 한 거, 다 할 거야.”
“……미쳤어?”
사월이 약한 힘으로 등허리를 툭 쳤다. 입꼬리를 올려 보인 원재는 침대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티는 안 냈어도, 이틀 내내 혼자 있으면서 사월이 얼마나 서운했을지 모르지 않았다. 제 앞에선 그래도 표현한다고 해도, 아직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 이제 눈치껏 사월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데는 도가 텄다.
“진짜야. 그만하고 싶으면 내가 듣고 싶은 말, 해 주면 돼.”
사월이 눈을 질끈 감았다. 매번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몰아붙였다. 원재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은 때에 따라 달랐다. ‘사랑한다’일 때도 있고 ‘보고 싶다’는 말일 때도 있었고. 어디를 찔러 줘야 좋다고 실토해야 놓아주기도 했다. 오늘은 또 어떤 말이지.
“성원재 진짜 짜증 난다.”
잔뜩 늘어진 목소리에 원재는 크게 웃었다. 겨우 다다른 침대에 사월을 눕히고는 그 위에 올라탔다.
“그래서 나 싫어?”
머리 양옆으로 손을 짚고 내려다봤다. 이리저리 눈을 굴려 피하던 사월이 미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짜증은 나는데 싫지는 않다는 뜻이었다.
원재는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감각을 느꼈다. 고개를 틀어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마른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원재는 사월의 입에서 섭섭했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놔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도 사랑해.”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질 만한 거리에서 원재가 나직하게 고백했다. 둘의 시선이 다시 맞물렸다. 물기가 말라 가며 몸이 차가워질 법도 한데, 두 사람 사이엔 뜨거운 열기만이 존재했다. 아득한 정신으로 사월은 생각했다. 아마 남은 휴가 내내 이렇게 잠들지도 모르겠다고.
***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뜬 뒤였다. 사월은 부은 듯 뜨거운 눈두덩을 손바닥으로 꾹 누른 후에야 뻐근한 몸을 일으켰다. 목이며 허벅지며 허리, 어느 한 곳도 괜찮지 않았다. 상체를 일으키니 목 끝까지 덮여 있던 시트가 허벅지 위로 무너져 내렸다.
“……성원재.”
부은 입술 사이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겨우 얼굴 앞에 머무를 만큼 작은 음성이었다. 사월은 헝클어진 옆자리 시트를 느릿하게 거둬 냈다.
“원재야.”
아까와 다르지 않은 부름이었다. 오히려 몸을 뒤척이는 소리에 더 희미하게 묻혔을 터였다.
“깼어?”
하지만 원재는 사월의 작은 기척을 놓치지 않았다. 대기라도 하고 있던 사람처럼 곧장 문턱을 넘어왔다. 그에게선 미약한 봄바람 냄새가 났다.
“하도 안 일어나서 뽀뽀라도 해 줘야 하나 했잖아.”
침대에 걸터앉은 커다란 몸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뻗어 오는 손에 사월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길을 가만히 느끼면서 며칠 새 느꼈던 엉망이던 감정을 모두 씻어 냈다. 밤새 서운함을 털어놓고 울어 댔더니 목구멍마저 까슬했다.
지난밤 원재가 듣고 싶었던 말은 섭섭했다는 단어였다. 휴가 며칠을 혼자 보낸 게 서운하긴 했지만 최대한 티를 안 낸다고 하긴 했는데. 원재는 늘 자신의 작은 감정의 조각도 귀신같이도 알아챘다.
“…일어났으니까 안 해 주겠네.”
쉰 목소리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 쪽― 입술끼리 짧게 닿았다. 쪽쪽. 뺨과 눈가까지 입맞춤이 내리고 나서야 사월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긴 속눈썹 위로 늦은 아침 햇살이 조각처럼 걸려 있었다.
“예쁘네.”
원재는 자신이 말을 뱉었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했다. 달아오르는 사월의 뺨을 보곤 그저 ‘귀엽네’라고 생각했을 뿐. 눈동자가 꼼꼼하게 사월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이윽고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맘마 먹자, 사월아.”
장난스러운 음성이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사월은 목덜미까지 붉어져 고개를 푹 숙였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올리는 꼴을 보면서 원재는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딴 말 하면, 안 민망해?”
눈도 마주치지 못하면서 간신히 꺼내 놓은 말이었다. 내가 지금 나이가 몇 갠데 저런 소릴 해 대.
“다 참고 하는 거지.”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얼굴 빨개지는 게 꼴리잖아.”
원재는 사월의 팔목을 잡아끌어 내렸다. 그러곤 네임이 새겨진 손목 위에 짧게 입맞춤을 했다.
“…말을 말자.”
어차피 하지 말라고 해도 원하는 대로 할 사람이란 걸 이제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고양이 같다느니, 귀엽다느니, 맘마가 어쩌고저쩌고…….
그딴 소릴 듣지 않으려면 자신이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래? 자신과 어울리지도 않는 낯간지러운 단어들을 그렇게 갖다 붙이는데? 사월은 결국 오늘도 열이 오른 얼굴 위로 손부채질을 해야 했다.
“오늘 날씨 엄청 좋아. 얼른 먹고 나가자. 형이 꼭 가 보라고 한 데가 있거든.”
“어딘데?”
원재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사월이 자는 사이 탁자 위에 잘 개어 둔 옷과 속옷을 침대 맡으로 옮겼다.
“우리가 한 번도 안 가 본 곳.”
짧게 말을 남기고 원재는 문턱을 넘어갔다. 사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가 본 곳이 너무 많아서 어딘지 추측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래도 원재가 데려가는 곳이라면 그게 어디든 상관없었다. 당연히 좋은 곳이겠지. 짧은 고민을 끝낸 사월은 얼얼한 다리를 움직여 욕실로 향했다.
***
간단한 메뉴로 배를 채우고 둘은 차에 올랐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거리는 한적했다. 바람도 적당히 시원했고 햇볕도 따스했다. 사월은 나른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얼굴에 닿는 볕을 고스란히 느끼는 중이었다. 바람에 흐트러진 앞머리가 뺨을 콕콕 찔러 대도 눈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휴가는 두 사람 인생에 없던 쉼표와 같은 일이었다. 누구와 만나고 어딜 가고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노하우도 요령도 없는 건 당연했다. 아는 거라곤 둘이 있고 싶다는 생각뿐. 그랬기에 사월에게 더없이 완벽한, 진정한 휴가의 첫날이었다.
“날씨가 이래서 그런가. 기분 좋아 보이네.”
불쑥 건네 오는 낮은 물음에 사월이 눈을 떴다. 물론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았다. 둘 다 가 보지 않은 장소로 향한다는 것도 꽤 설렜고. 그간 바쁘게 지냈던 일들이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평온했다. 지현이 왜 그렇게 휴가를 손꼽아 기다렸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좋아.”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성원재였다.
사월은 주어 없는 말을 던져 놓고는 혼자 민망한 듯 고개를 틀었다. 두 사람 사이에 더는 말이 오가지 않았다. 쿵쿵, 작은 심장 박동만 사월의 귓전을 울릴 뿐이었다.
“사람이 꽤 있네.”
목적지로 가는 길 내내 크고 단단한 벚꽃 나무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흐드러지는 꽃잎을 카메라에 담거나,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도 많았다. 사월도 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벚꽃이 흩날리는 거리를 관찰했다.
벚꽃은 타투 디자인에 참고할 사진으로 본 일이 더 잦았다. 예전 스토크가 있던 곳 근처에는 벚꽃 나무가 없어서 출장을 갈 때나 스치듯 본 게 다였으니까.
구경을 목적으로 마주한 벚꽃은 하얀 도화지 위에 물먹은 분홍빛 잉크를 툭 떨어트린, 달콤한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 사월의 눈동자가 따스한 색의 향연을 정신없이 쫓았다.
말없이 창에 붙어 있는 사월을 보고 원재는 부러 속도를 늦췄다. 그 덕에 사월은 벚꽃으로 둘러싸인 터널에서 한참을 넋을 빼고 있었다.
“내리자.”
“여기야?”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한적한 공원이었다. 산 초입에 있는 공원이라 아까 지나쳐 온 곳보단 인적이 드물었다.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댔다.
차에서 내리고 먼저 원재가 익숙한 듯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사월 또한 자연스럽게 팔을 내밀었다. 굵기가 다른 두 손이 부드럽게 얽히고 빈틈없이 맞닿았다.
선선한 바람이 두 사람을 기분 좋게 이끌었다. 둘은 낮은 언덕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
서른 개 남짓한 계단을 오르고 나니 탁 트인 공간이 드러났다. 사월의 입술이 나직하게 벌어졌다. 와.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감탄사였지만 얽힌 손에 힘이 스르륵 풀렸다.
원재가 힐끔 그를 내려다봤다. 상기된 얼굴에서 두근거림이 고스란히 읽혔다. 원재는 소리 없이 웃었다. 사람 많은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월을 생각해서 고르고 고른 곳이었다. 최 비서를 얼마나 들볶았는지 사월은 아마 영영 모를 터였다.
“아직 많이 피어 있어서 다행이다.”
4월 초가 가장 풍성하고 그 뒤로는 잎이 조금씩 떨어질 거라 들어서 신경 쓰이던 참이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꼭 사월을 위해 버티고 있었던 듯, 아름답기만 했다.
둥그렇게 벚꽃 나무로 둘러싸인 공간. 바람이 살랑일 때면 눈이 오는 듯 꽃잎이 내려왔다. 그 위에는 작은 노상들이 몇 개 이어져 있었고, 돗자리를 깔고 앉은 가족부터 연인, 친구들이 곳곳에 자리했다. 다들 벚꽃 구경이 익숙해 보였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간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계절이 주는 찰나의 아름다움이 낯선 건 원재와 사월뿐이었다.
“지금이 제일 예쁠 때라던데.”
정말이네.
자신도 본 적 없으면서, 4월의 아름다움을 사월에겐 꼭 보여 주고 싶었다. 남들은 때가 되면 다 하는, 어려운 것도 아닌 일을, 지극히도 평범한 일을.
원재는 사월의 손을 꼭 잡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사월은 황홀하기까지 한 풍경을 전부 눈에 담았다. 사람들이 봄을 기다리는 이유가 이런 까닭이었을까.
“이리 와.”
서너 걸음 정도 앞서 걷던 원재가 뒤를 돌았다. 아직 넋이 빠진 듯 주변을 둘러보는 사월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흩날리는 꽃잎이 손끝을 스치고 이내 팔랑팔랑 꽃 무덤 위에 앉았다. 묘하게 초점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사월이 한 박자 늦게 눈을 깜빡였다. 꼭 꿈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 같았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하루라도 더 빨리 데려올걸. 원재는 그런 후회를 했다. 얽혀 오는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둘은 조금 떨어진 벤치로 향했다. 사월이 먼저 자리에 앉자 원재는 재킷을 벗었다. 추위를 타지 않는 편이라지만, 그늘진 곳이라 온도가 낮았으니까. 동의 없이 사월의 어깨 위로 재킷을 둘렀다.
사월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얇은 셔츠 아래로 보이는 검은 선과 스토크 몇 송이. 이끌리듯이 원재의 옆구리로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여기 다 비쳐.”
“네임도 보여?”
헝클어진 머리칼이 좌우로 느릿하게 흔들렸다. 원재는 보드라운 머리칼 사이로 손을 넣어 헤집었다.
지금 이 자세는 꼭 처음 만났을 때 같았다. 열이면 열, 모든 이가 제 앞에선 주눅 들었는데. 자신에게 겁 없이 반말로 되받아치던 말간 얼굴. 그 순간 처음 느꼈던 저릿함은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사월의 네임을 지닌 채로 사는 동안엔 아마 평생 따라올 감정일지 모르고.
“별로 안 커서 그런가.”
원재가 웃음 섞인 말을 중얼댔다. 사월은 어딘지 익숙한 말을 들으면서도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허리춤을 약하게 잡아당길 뿐이었다.
“앉기나 해. 목 아프니까.”
올려다보느라 한참 기울어졌던 고개를 바로 하자, 곧장 커다란 손이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그러곤 마사지를 하듯 꾹꾹 몇 번 눌렀다.
“밖에서 더듬는 짓 좀 하지 마.”
“왜.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는데.”
서늘한 시선이 주변을 슥 훑는다.
“…….”
저 얼굴을 보고도 한 소리 할 사람이 있기나 할까. 바짝 붙어 속닥대는 원재의 말에 온몸이 간지러웠다. 핏줄 안에, 각이 진 글자들이 굴러다니는 기분 같았다. 사월은 어깨를 움칠댔다. 떨어지라는 듯 툭 밀어도 원재는 꿈쩍하지 않았다.
“엄마! 나 이거!”
두 사람의 시선을 잡아끈 건 여자아이의 똘망똘망한 목소리였다. 엄마 옷자락을 잡고 작은 손으로 솜사탕을 가리켰다. 아이는 늘어선 솜사탕 앞에서 꽤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그러다 결국 손에 쥔 건 분홍색과 하늘색 귀를 한쪽씩 달고 있는 토끼였다.
“연아, 이거 먹고 집에 가면 양치하는 거야. 알겠지?”
“응!”
“약속.”
“야쏘옥!”
고사리손으로 약속하는 모습을 보고 원재는 가만히 웃음 지었다. 작은 손이 꼬물대며 솜사탕을 한 움큼 떼어 입으로 욱여넣는 게 퍽 귀여웠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는지 아이의 엄마가 힐끔 고개를 틀었다.
“아빠한테 갈까?”
결코 부드럽지 않은 인상의 두 남자가 빤히 쳐다보니 불편하기라도 했나.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거였다.
“…….”
사월이 눈을 가늘게 떴다. 괜한 오해를 받은 게 썩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내 눈에는 애기나 사월이나 뭐 거기서 거긴데. 픽 웃음을 흘린 원재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가 엄마와 떠나고 난 뒤에도 사월의 시선은 알록달록한 설탕 뭉치에 꽂혀 있었다.
“저거 먹어 볼래?”
지잉. 사월의 대답보다도 진동이 먼저 울렸다. 쯧. 짧게 혀를 찬 원재가 휴대폰과 함께 지갑을 꺼내 들었다.
“잠깐 통화하고 올게. 저기 너 닮은 거로 달라고 해. 알았지.”
사월의 손에 지갑을 쥐여 주곤 일어났다. 자리를 뜨면서는 제일 앞에 있는 고양이 수염을 붙인 솜사탕을 가리켰다. 사월이 경악하는 표정을 짓는 걸 보곤 만족한 웃음을 지은 원재가 등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
최 비서 연락이라 사월의 앞에서 받아도 괜찮았지만 부러 자리를 옮겼다. 주고받을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걱정할까 봐, 슬슬 거리를 벌리며 말을 이어 갔다.
“결과 나왔어?”
―당연히 무혐의지. 뭐 받은 거라도 있음 덜 억울할 텐데. 괜히 시간만 낭비한 거지.
원재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애먼 시간에 할애하느라 사월의 휴가를 며칠이나 날렸는지. 괜한 날파리가 끼어들어 더 복잡했던 건, 다시 생각해도 머리가 아팠다.
“준비해서 재개 들어가. 시간이 너무 지체됐어.”
―그래야지. 3구역은 이번 주 내로 시작하면 문제없을 거 같고. 아, 저번에 제하가 잡았던 놈들. 준비를 꽤 한 모양이더라고.
“뭔 준비를 하셨대.”
―사월 사장이 전에 네임 작업했던 거로 걸고넘어지려고 했었나 봐. 뭐, 그게 따지고 보면 위법은 맞으니까.
“흐음.”
원재가 숨을 길게 늘였다. 사람을 패고 죽이고, 남이 가진 걸 뺏고. 좆같은 짓은 숨 쉬듯이 하는 놈들이 고작 그런 걸 물고 늘어져. 구겨진 눈썹 위를 불만스럽게 슥슥 문질렀다.
“정보를 얼마나 쥐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냥 정리해.”
사월의 과거를 지우는 일쯤은 원재나 최 비서에겐 일도 아니었다. 크게 문제되지 않으리라 생각해 그냥 둔 거였는데. 그걸로 발목을 잡으려 한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오케이. 참, 도착은 잘했고?
“어. 좋아하네.”
원재의 목소리에 의도하지 않은 웃음이 섞였다. 넋 빠진 것처럼 굴던 사월의 얼굴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 얼굴을 평생 볼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그치?
업무 얘기를 할 때와는 다르게 최 비서의 톤이 한층 올라갔다. 사람은 별로 없고 분위기는 좋고, 북적대지 않으면서도 기억에 남을 만한, 벚꽃이 가득한 곳. 원재의 까탈스러운 요청 사항에 맞춰 장소를 찾느라 머리가 빠개지는 줄 알았다.
한참 머리를 굴린 끝에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종종 가던 작은 공원을 추천했다. 사월 사장이 조금이라도 인상을 썼다면 아마 휴가가 끝난 뒤 한참을 들볶였을지도 몰랐다. 좋아했다는 말을 들으니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거기 진짜 동네 사람들만 아는 데야. 예전에 거기서 생과일주스 같은 것도 팔았는데 아직 있나 모르겠네. 그땐 엄청 맛있게 먹었거든…….
“어. 올라가면 전화할게.”
최 비서가 한참을 떠드는 걸 가차 없이 잘라 냈다. 전화 너머로 사나운 외침이 들렸지만 원재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전화하면서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갔다. 멀지 않은 곳. 얌전히 앉아 있는 사월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또 뭐야.”
그러나 곧 부드럽게 휘어 있던 눈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은은하게 머금고 있던 웃음기가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날이 선 눈동자가 사월 곁에 선 남자를 훑었다. 단정하던 걸음에 조금씩 속도가 붙었다. 탁탁. 흙바닥 위를 지나치는 구두 위에는 뿌연 모래가 앉았다.
“여기 사시나 봐요. 타지 분들은 호수 공원 쪽으로 가시던데.”
“…….”
살갑게 붙이는 말에도 사월은 별말이 없었다. 원재는 벽을 세우는 그의 모습에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이 와중에 말이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원재는 등 뒤에서부터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마른 어깨가 한쪽 팔 안에 들어찼다.
“자기 닮은 애로 사 먹었어?”
나 한 입도 안 주고 혼자 다 먹은 거야? 장난스럽게 말을 붙이는 듯 보였지만, 시선은 낯선 남자에게 똑똑히 닿아 있었다. 상대가 주눅 들 만한 고압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아니.”
그제야 날카로운 시선이 사월의 빈손으로 향했다.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지갑만 덩그러니 쥐고 있는 손.
“왜. 맛없어 보여?”
“…….”
“아님, 이 썩을까 봐?”
놀리는 말에도 사월은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그러곤 별다른 설명 없이 어깨 위에 걸쳐진 원재의 재킷을 집어 들었다.
“내가 애야? 저런 거 안 먹어.”
궁금한 듯이 계속 쳐다봐 놓고선.
가시 세운 사나운 대답에도 원재는 그저 웃기만 했다. 눈앞의 남자는 거의 투명 인간 취급을 한 두 사람이 나란히 섰다. 사월의 어깨를 감싼 채 원재가 힐끔 고개를 돌렸다.
“…….”
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했다. 먼저 피한 건 역시나 낯선 이였다. 애인이랑 같이 온 거였나 보네. 혼자 벤치에 앉아 있는 사월이 꽤 취향이라 친구들도 뒤로하고 온 참이었다. 말이라도 붙여 볼까, 몇 번 질문을 건넸지만 온전한 대답은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는 완벽한 이방인이 되어 둘에게 섞이지도 못했다. 원재의 사나운 눈초리에 기라도 죽은 건지 낯선 남자는 목덜미를 문지르기만 했다. 빈틈없이 맞붙어 공원을 가로지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입맛을 다시며 등을 돌렸다.
두 사람이 막 공원 중앙을 가로지르던 참이었다. 원재가 참지 못하고 물음을 꺼냈다.
“쟤가 뭐라면서 꼬셨어.”
“꼬시긴 뭘.”
혼자 왔냐, 목마르지 않냐. 그딴 시답잖은 것만 물어보던데. 하지만 사월은 낯선 남자가 던진 추파를 일일이 읊어 주지는 않았다. 어깨 위를 감싼 원재의 손등에 단단히 선 힘줄을 아까부터 느끼던 차였다. 괜한 말을 했다간 기분만 망칠지도 모른다.
“하긴. 내 눈에만 예쁠 리가 없지.”
혼잣말에 가까운 음성. 대수롭지 않은 척을 하고 있지만 사실 아까는 뒷덜미가 뻣뻣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누가 봐도 호의를 갖고 접근한 낯선 남자와 마주하고 있던 사월을 발견했던 그 순간에.
“…….”
사월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눈을 구겼다. 또 예쁘다는 말이 심기를 거스른 듯했다. 그걸 빤히 알고 있는 터라 원재는 부러 더 능글맞게 굴었다. 걸음을 멈추고 사월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곤 두 손으로 뺨을 가볍게 쥐었다. 날카롭게 내치지도, 비키라는 말을 하지도 않는다. 이 정도의 곁은 원재에게 내주는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누가 꼬셔도 넘어가면 안 돼.”
“자꾸 뭐라는 거야.”
“맛있는 거 사 준다고, 좋은 거 보여 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 되는 거야.”
“…….”
꼭 다섯 살짜리 애한테 낯선 사람은 따라가지 말라고 당부하듯 이어지는 말이었다. 사월은 기가 차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네임 상대랑 평생 살기로 했다고 말해.”
물론 애초에 사월이 순순히 따라갈 리는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원재가 웃음을 터트렸다. 손바닥에 닿은 뺨을 느릿하게 쓸었다.
“…….”
순간, 바람이 불었다. 늘 뒤로 넘기던 원재의 머리가 오늘은 이마 위로 부드럽게 흐트러졌다. 뾰족하기만 하던 눈은 사월 앞에선 모난 곳 없이 부드럽게 휘어졌고, 짙은 쌍꺼풀 위로는 봄 햇살이 나른하게 걸려 있다. 묵직한 파동을 그리는 그의 웃음소리가 가슴에 닿았다. 잔잔하던 사월의 마음에 큰 파동이 일었다.
“약속.”
원재는 아까 본 어린아이와 엄마가 그러했듯,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사월은 눈만 내리깔아 그것을 바라봤다. 벌써 몇백 번째 약속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원재는 늘 처음처럼 사월의 확신을 얻어 내고야 말았다.
이번에도 사월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움직였다. 새끼손가락을 들고 팔을 세우자 얇은 셔츠가 툭, 팔뚝까지 흘러 내려갔다. 네임이 새겨진 오른 손목이 훤히 드러났다.
“이 약속은 못 물러. 알지.”
이건 성원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평생 지켜 낼 약속이었으니까.
“……너나 지켜.”
늘 막다른 골목으로 쫓기듯 살았던 사월에겐 플랜 B는 없었다. 모든 처음이 그였고, 모든 길이 원재고, 종착지도 성원재가 될 거였다. 다른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얽힌 손가락을 풀어낸 원재가 그의 오른 손목을 아프지 않게 휘감았다. 손바닥 아래로 저릿한 네임의 감각이 여실히 전해졌다. 사월은 두근대는 가슴을 잠재우는 데 여념이 없었다.
솜사탕을 얼마나 만들어 대고 있는 건지 바람에 단내가 실려 코끝까지 닿았다.
“우리 오늘 할 거 많은데.”
원재는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확인했다. 남은 휴가를 어떻게 보내야 하나.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최 비서가 일러 줬던 대로 사진도 찍어야 했고, 아이스크림도 사서 나눠 먹어야 했고, 맥주도 한잔하면서 밤바다도 거닐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미친놈처럼 일을 몰아서 해치웠던 거니까.
“어디 먼저 갈까.”
휴가 계획을 자랑스럽게 늘어놓던 지현을 보며 내심 부러운 표정을 짓던 사월의 얼굴이 눈앞에 스쳤다.
“아무 데나…, 괜찮아.”
어딜 가든 성원재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우리 사월이가 어디를 좋아할까.”
꽤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원재를 올려다보며, 사월은 먹어 본 적도 없는 솜사탕이 어떤 맛인지 알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