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둘은 꽤 평화로운 시간을 즐겼다. 사람이 북적대는 곳을 피해 벚꽃 길을 더 걸었고, 거리에서 파는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최 비서가 그게 낭만이라도 꿋꿋하게 주장한 탓이었다. 가게를 차려 주는 쪽이 차라리 빠를 텐데, 왜 이런 걸 낭만이라 하는 걸까. 원재는 사실 내내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내민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고는 달다고 픽 웃어 버리는 사월을 보니, 최 비서의 말이 영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끈적하고 달기만 했어도 여태 먹어 본 것 중에 제일 맛있는 아이스크림이었다.
“피곤하진 않아?”
지금은 모래사장에 앉아 캔 맥주를 마시는 중이었다. 밤바다라 그런지 꽤 선선한 바람이 일었다. 비린내를 가득 담은 바람이 머리칼 사이를 정신없이 파고들었다.
“나는 괜찮은데. 네가 피곤하지.”
저야 휴가랍시고 내내 쉬다가 여기 온 거지만, 원재는 달랐다. 며칠 새 얼굴도 잘 못 볼 만큼 바빴고 또 줄곧 운전을 하기도 했으니까.
“나도 면허나 딸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차를 몰았다. 심지어 지인 중에 가장 어린 지현마저 수능을 보자마자 면허를 땄다고 했을 정도니. 면허가 있으면 원재의 피곤함을 덜어 줄 수도 있을 텐데. 한번 그렇게 마음먹자 타당한 이유가 하나씩 늘어났다.
“……배워 보고 싶어?”
원재는 사월이 면허를 따는 일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원래 성정 같았으면 면허도 없는 사람한테 차를 몇 대씩 갖다 바치고 남았을 텐데. 유난히 운전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차 몰 줄 알면 이럴 때 내가 운전해도 되잖아. 가면서 너도 눈 붙이고.”
“하나도 안 피곤한데, 난.”
맥주 한 모금을 넘긴 원재가 팔을 뒤로 쭉 뻗었다. 화제를 돌리고 싶은 사람처럼 말을 딱 잘라 내곤 눈을 감았다. 새카만 구두 앞 코는 어느새 베이지색 모래로 범벅이 된 채였다.
“내가 운전하는 게 마음에 안 드나 봐.”
“나는….”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사월은 참을성 있게 원재의 뒷말을 기다렸다. 그가 늘 그러했듯이. 뒤로 기울어진 원재의 너른 상체가 크게 한번 들썩였다. 파도 소리에 파묻힌 한숨. 사월이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그를 바라봤다.
“좀 무서워서.”
가벼운 파도 위로 무거운 진심을 담았다. 일렁이던 파도가 모래사장을 거슬러 사월의 발치까지 닿았다.
“뭐가?”
얘가 무서워하는 것도 있었나. 사월이 눈동자를 굴리며 되물었다. 또 한 번의 침묵이 길게 흘렀다. 그 틈을 철썩대는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메웠다.
“어디로 가든 내가 따라가면 되고, 가고 싶다는 곳이 있다면 데려다주면 되는데.”
“…….”
“네가 혼자 가고 싶어 하는 날이 올까 봐. 그럼 어떡해야 할지 모를 거 같거든.”
혼자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를 얻어 정말 어디로든 가 버릴까 봐. 그게 두려웠다.
더는 사월이 떠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 또한 이제 제 곁에 있으면서 안정을 느끼고 있음을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사월이 떠났던 순간이, 흔적도 없이 떠났던 그 시간이 원재에게도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마치 비 오는 날, 잠들지 못했던 사월의 지난 밤처럼.
“약속했는데 내가 어딜 가.”
오직 서로에 의존해 채우고 있는 결핍은 가끔 이런 곳에서 바닥이 드러났다. 잘 보여 주지 않는 원재의 밑바닥은 한없이 어둡고 까마득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자신이 있었다. 가슴에 돌멩이가 얹힌 것처럼 묵직해졌다.
“그치. 그랬지.”
우리 사월이랑 손가락 걸고 약속했으니까.
원재는 사월에게 손을 뻗으려다 손바닥에 모래가 잔뜩 묻은 걸 깨달았다. 큰 손바닥을 탁탁 부딪쳐 모래를 털어 낸 뒤, 바닷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조심히 쓸어 넘겼다. 새까만 밤바다 같은 눈동자가 올곧이 자신에게 닿았다. 네임이 새겨진 옆구리 쪽이 따끔댔다.
“내년에 여기 또 오자. 그 땐 최 비서도 데려오고, 지현이랑 제하도 같이.”
사월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놨다. 제 딴에는 표현한다고 하는데. 그게 원재에게는 턱없이 부족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문득 든 까닭이었다.
“그럴까, 사월아.”
“갈 땐 다른 사람이 운전해 주면 되니까.”
붙어 있는 꼴 보기 싫다고 학을 떼는 최 비서가 과연 따라올지 모르겠지만. 원재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같이 오자고 하자.”
사월이 먼저 기약하는 다음. 원재는 텅 비어 있던 밑바닥에 단내 나는 감정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
같이 씻자는 원재를 욕실 밖으로 밀어내고 사월은 먼저 샤워를 했다. 씻고 나오니 그는 퍽 서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음이 불편하긴 했지만, 김이 다 빠지지도 않은 욕실로 그를 밀어 넣었다. 문이 닫히고 물소리가 들리는 것까지 확인한 사월이 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채 마르지도 않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갑만 달랑 들고서 룸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왜 이렇게 더딘 건지. 비상구 쪽을 몇 번이나 힐끔댔다.
1층에 내리자마자 1층 카페로 향했다. 아까 들어오면서 봐둔 곳이었다. 쇼케이스에 진열된 작은 조각 케이크 앞에 선 사월은 잠깐 갈등했다.
뭔 종류가 이렇게 많지. 크럼블, 파운드, 수플레, 티라미수……. 쓰인 글씨를 읽는 것만으로도 복잡했다. 괜히 쫓기는 느낌에 대충 달지 않을 것 같은 케이크를 골라 포장했다.
상자를 받아 들자마자 사월은 곧장 로비를 가로질렀다. 원재가 씻기 전에 도착해야 했으니까.
소리를 죽여 문을 열고 룸 안에 들어섰다. 사월은 괜히 혼자 긴장을 한 채로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 원재는 나오지 않은 건지, 기척이 없었다.
“다행이네.”
가쁜 숨을 고르며 아일랜드바로 향했다. 어제 내내 여기서 시달렸던 장면이 떠올라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저녁을 먹어서 많이는 못 먹을 것 같고, 적당히 기분을 낼 수 있는 케이크를 고른 거라 사이즈는 손바닥만 했다. 초까지 야무지게 꺼낸 사월은 케이크 한가운데가 뻥 뚫려 있어 초를 어디에 꽂아야 하나 한참 버벅댔다. 딸기 옆에 가만히 꽂아 두고 원재가 나오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가 들렸다.
“사월아, 어디 있어?”
방으로 곧장 간 건지 그쪽에서 목소리가 넘어왔다. 사월은 내내 쥐고 있던 라이터를 꺼냈다.
“이리 와 봐.”
초에 불을 붙이자마자 타이밍 좋게 원재가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거의 마른 머리칼을 탈탈 털어 대던 손길이 뚝 멎었다.
“……뭐야?”
초 때문인지 붉은빛이 사월의 얼굴을 뒤덮었다. 사월은 새하얀 생크림 위에 시선을 둔 채 입술을 뗐다.
“이거…….”
무어라 설명을 해야 덜 부끄러워질까. 악몽만 꾸던 4월의 밤을 지켜 줘서 고맙다고.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생일을 찾아 줘서 고맙다고. 자신도 누군가에게 우주였단 사실을 알게 해 줘서 고맙다고. 약속 따위 하지 않았어도 너를 두고 갈 생각 같은 건 없었다고.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 어떤 문장도 진심을 담기엔 어딘가 부족했다. 말주변이 없는 게 이렇게 원망스러울 줄이야.
“…너랑 4월에 만났으니까.”
원재는 작게 일렁이는 초 너머, 붉어진 사월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굳이 따로 씻자고 고집을 부리기에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저거 준비하려고 그랬나. 씻는 사이에 다녀왔는지 사월의 머리칼은 반도 채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원재는 목구멍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이런 애한테 떠날까 봐 무섭다고 약한 소릴 했지, 왜. 도대체 왜, 운전 같은 건 배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유치하게 굴었지. 치약 대신 쓴맛이 입에 맴돌았다.
“우리 언제 만났는지, 기억하고 있었어?”
원재가 기억하고 있는 첫 만남은 사실 오늘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월이 오늘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됐다. 그건 하나도 어려운 게 아니었으니까.
“아니.”
하지만 사월은 꽤 솔직하게 답했다.
“그럼?”
“그냥….”
이제 4월을 떠올리면 온통 원재의 기억뿐이니까. 어느 날이든 상관없지 않을까.
“4월은 다 기념일 같아서.”
원재가 함께 있는 매일이 사월에겐 기념일이었다. 매일 초를 불고 케이크를 먹고, 선물을 나눈대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나도. 나도 그래.”
낮게 잠긴 목소리로 원재가 어렵게 대답했다. 둘은 케이크를 하나 사이에 두고 앉았다. 한 마디는 줄어든 초를 보고 둘은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매일이 오늘 같기를.
내일도, 모레도. 이렇게 둘이 함께할 수 있기를.
글자의 형태는 달라도 마음은 같았다. 하루하루가 기념일과 다름없는, 4월에 태어난 소원들. 결핍에 허덕이던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를 채워 가고 있었다.
원재의 부추김에 사월은 혼자 초를 껐다. 자신이 준비하고 초까지 끄는 그림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지만. 원재가 그렇게 하랬으니 토 달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돌겠네, 진짜.”
호흡마다 웃음을 흘리던 원재는 끄트머리가 다 탄 초를 정리했다. 작은 불꽃이 사라진 공간에는 매캐한 향이 남았다. 그 때문인지 목구멍이 괜히 간질댔다.
“하여튼. 귀여운 짓만 골라서 한다니까.”
“…….”
사월은 달아오른 뺨 위로 작게 손부채질을 했다. 빨리 갔다 오려고 서둘렀더니 여태까지 숨이 차는 것 같네.
“이러니까 나 호구 됐다고 소문나지.”
성원재에겐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사월의 눈이 묘하게 가늘어졌다.
“누가 그렇게 말하는데.”
“왜. 혼내 주기라도 하게?”
소문의 당사자는 딱히 기분 나쁜 기색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마음이 상한 쪽은 이상하게도 사월이었다.
“……최 비서한테 물어보면 돼.”
포크를 사월의 손에 쥐여 주면서 되물었다.
“틀린 말도 아닌데, 뭐. 사월이가 참아.”
원재는 사월의 손을 쥔 채, 딸기로 포크를 끌었다. 어감이 좋지는 않지만, 사월 때문이라면 백번 들어도 괜찮은 말이었다. 가진 걸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사월에게 넘긴다 해도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도리어 몸에 걸친 것마저 벗어 줄 수도 있으니까,
“…네가 왜 그런 소리 듣냐고.”
딸기와 함께 케이크를 뜬 포크가 원재의 입 앞에 닿았다. 사월은 포크를 내민 채 작게 중얼댔다. 음성에는 속상함이 얼핏 읽혔다. 원재는 거의 앓는 소리를 냈다. 마른 손목을 잡고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막아 내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보다 든든한 편이 또 있을까 싶었다. 반평생을 알고 지낸 최 비서보다도, 힘이라면 어디도 뒤지지 않을 제 수하들보다. 눈앞의 남자가 건넨 한마디가 더 크게 마음을 울렸다.
“아….”
의도한 말과 행동이 아니라는 게, 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거지. 원재는 손목을 잡은 채로 고개를 작게 숙였다. 입 안에 달콤한 크림과 과육이 느껴졌다.
“휴가 오니까 좋네. 사월이가 나 이렇게 먹여도 주고.”
내내 부끄러운 듯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더니 종국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사월의 미소를 본 원재가 혀를 굴렸다. 혀끝이 저릿할 만큼 달았다.
“그러니까 또 오자.”
원재는 착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월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좋았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둘은 케이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 지현이 여행 중 어떤 순간이 가장 좋았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지금을 떠올릴 것이다.
그날 밤, 사월은 벚꽃이 흐드러진 길을 걷는 꿈을 꾸었다.
***
둘의 휴가는 예정보다 이르게 마쳐야 했다. 갑작스러운 봄비 때문이었다. 저녁까지만 해도 흐드러지던 벚꽃 잎들은 바닥에 침울하게 고여 있었다. 누군가에겐 반가운 비가 누군가에겐 더없이 아쉬운 소식이었다. 그건 멀리 제주도에 있는 지현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내가 다 속상하네…. 여긴 뭐 비 와도 상관없는데, 사장님은 벚꽃 보러 간 거잖아요. 갑자기 웬 비래요. 다 졌겠네.
“그래도 어제 많이 봤어.”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사월은 딱히 미련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원재와 자신에게는 ‘다음’이 있으니까.
―사진도 찍었어요? 제가 있었으면 완전 인생 사진 수십 장 남겨 드렸을 텐데.
“…안 찍었는데.”
그럼 뭐가 남냐며 지현은 전화 너머로 한참을 떠들어 댔다. 사월은 텅 비어 있을 사진첩을 떠올렸다.
―아무튼, 조심히 들어가시고요, 저는 오늘 제주의 마지막 밤을 불태우겠습니다!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네에!
딱 들어도 대충하는 대답이었다. 누구랑 똑같네, 진짜. 사월은 작게 한숨을 쉬고 전화를 끊었다.
“지현이 또 술 마시나 보네? 저번에 끊는다더니.”
“그 말을 1년째 하고 있어.”
다 그렇지, 뭐. 원재는 작게 웃음을 지었다.
“비가 오래 내리네.”
사월은 차창을 내리고 그 틈으로 손을 뻗었다. 하늘로 향한 손바닥 위, 가느다란 봄비가 얕게 고였다.
“그러게. 조금 더 빨리 왔으면 오래 봤을 텐데.”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사월이 워낙 좋아한 탓에 오늘도 벚꽃을 보러 가려 했는데.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진 꽃잎을 보던 사월은 ‘우리 집으로 가자’는 말을 꺼냈었다.
서운한 기색 하나 없는 그 얼굴에 원재는 가슴 한쪽이 무거워졌다. 왠지 자신이 사월의 휴가를 다 망친 것 같다는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었다.
“내년엔 좀 더 오래 있자.”
사월은 여상히 대답했다. 손바닥에 맺힌 빗물을 털어 낸 뒤 창을 올렸다.
“그럴까. 내년 휴가는 한 달 정도 빼자.”
내년엔 아예 여기서 봄을 맞는 것도 좋겠다. 원재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오래 쉬면 우리 문 닫아야 돼.”
“원래 사장은 적당히 나가야 직원들이 안 부담스러워해.”
핸들을 돌리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사월은 그 말을 듣고 잠깐 생각에 빠졌다. 정말 그런가. 김 사장을 제외하고 타인과 일을 해 보는 게 처음이니, 직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요령이 통 없었다.
“출근도 좀 늦게 하고, 예약도 적당히 잡고. 그래야 된다니까.”
자못 진지한 표정이 된 사월을 보며 원재는 웃음을 삼켰다. 안 그렇게 생겨서는 순진하게 다 믿는다니까.
“……그런가.”
어두운 골목에 처박힌 스토크에 있을 때완 확연히 다른 작업 환경이었다. 오는 손님들도, 작업 스타일도, 체계적인 시스템도. 특히나 직원을 거느린 사장이 되었다는 부담감.
해서 사월은 좋은 사장이 되고 싶었다. 애들이 하자는 대로 맞춰 주고, 습관처럼 나오는 험한 말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그렇게 거의 1년을 보냈는데도 아직 한참은 멀었네. 사월은 생각했다. 좋은 사장이 되기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고.
“우리 둘 다 좋은 사장 되려면 일단 출근부터 줄여야 돼. 그런 의미로 나는 이번 주 내내 안 나가.”
최 비서는 알고 있는 얘기일까. 사월은 제일 먼저 최 비서를 걱정했다. 볼 때마다 시계를 확인하고, 태블릿에 적힌 빼곡한 스케줄을 체크하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댔다. 하지만 그 걱정은 속으로만 해야 했다. 그런 뉘앙스의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원재가 얼마나 난리를 칠지 안 봐도 훤했다.
“너는?”
원재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이미 돌아올 대답은 알고 있었지만.
“출근해야지.”
하여간 우리 사월 사장 빡빡한 건 알아줘야 돼. 원재는 주차 선에 딱 들어맞게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고 벨트를 풀면서 말을 이어 갔다.
“알겠어. 그럼 이번 주는 내가 내조 제대로 해야겠네. 우리 사월이 출퇴근도 시켜 주고, 밥시간에 먹을 도시락도 싸 가고. 어때.”
어차피 소문난 거 작정하고 호구 돼 보지, 뭐.
“……도시락?”
사월은 앞치마를 한 채, 토끼 모양으로 사과를 깎는 커다란 덩치를 상상했다. 작년 생일에 먹었던 기이한 미역국 맛도 자연히 떠올랐다. 미묘했던 그 식감에 어깨가 부르르 떨리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시켜 먹으면 편한데 뭐 하러 굳이.”
그래도 원재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할 선에서 말을 고르고 골랐다. 완곡한 거절을 남기고 사월은 회피하듯 차에서 내렸다. 크게 웃은 원재는 그 뒤를 따랐다.
주차장 가득한 축축한 비 냄새. 공기 중엔 희미하게 ‘우리 집’의 냄새도 뒤섞여 있는 듯했다.
***
둘이 함께 집에서 보내는 여유로운 저녁은 오랜만이었다. 한 사람만 집에 있거나, 둘이 있더라도 누구 하난 잠이 든 새벽이었으니까.
사월은 크로키 북 위에 그림을 끄적이고 있었다. 지현의 말대로 사진이라도 몇 장 찍었어야 했나 싶어서. 원재나 사월 둘 다 사진 촬영을 즐기지 않기도 했고. 차라리 눈에 오래 담는 편을 선호했다.
사월은 사진 대신, 빠짐없이 행복했던 시간의 한 조각을 되짚어 냈다. 연필은 부드럽게 종이 위에 흔적을 남겨 갔다. 풍성하게 맺힌 꽃송이가 매달린 나무 몇 그루. 그 아래로 사람 한 명의 윤곽을 잡았다. 큰 키와 단단한 체격. 굳이 어렵게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광경이었다.
“일해?”
“아니, 그냥.”
사월은 크로키 북을 급하게 덮었다. 아직 형태가 완전하진 않아도 원재라면 그림의 정체를 금방 알아챌까 봐. 테이블 한구석에 연필과 종이를 밀어 놓은 사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안 그리고?”
원재는 한 뼘쯤 되는 컵에 물을 따랐다. 자기 전에 물을 마시는 사월의 습관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건넨 컵을 받아 든 사월은 금세 잔을 비웠다. 원재는 물기 어린 사월의 입술을 엄지로 슥 닦아 냈다.
“어, 일찍 자자. 너도 피곤했을 텐데.”
“나 하나도 안 피곤한데. 더 늦게 자도 돼. 밤새도 되고.”
사월의 등을 가로지른 손이 엉덩이를 아프지 않게 쥐었다. 야. 짧고 사나운 일갈에 원재는 작게 웃으며 몸을 물렸다. 톡톡, 가볍게 두드리는 건 덤이었다.
“빨리 자기나 해.”
“지금 비 오는데.”
비가 오는 날이면 원재는 침대 위에서 유독 더 집요하게 굴었다. 트라우마와 같던 기억을 떠올릴 틈도 없게 하려는 요량인지. 정말 말 그대로 정신이 희미해질 때까지 몰아붙였다. 이제 더는 악몽을 꾸지 않는데도 말이다.
“……알아.”
그걸 잘 알고 있는 터라 사월은 침실로 향하는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자는 게 싫다기보다 원재가 피곤할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살도 좀 내린 거 같고, 눈동자도 충혈된 채라 계속 마음에 걸렸다.
“안 잘 거면 나 먼저 들어가고.”
등 뒤로 작게 바람 빠지는 웃음과 함께 발소리가 들렸다.
원재는 실없이 웃으며 거실과 주방 불을 껐다. 은은하게 간접 등만 켜진 침실로 들어서자 사월의 향이 훅 끼쳐 왔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고 싶은데. 이불을 코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모양새가 그저 귀엽기만 했다.
너른 침대 위에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웠다. 작고 일정하게 울리는 심장 소리가 호흡을 편하게 유도해 주는 듯했다. 사월은 모로 몸을 돌려 원재의 허리춤을 안았다. 딱 끼워 맞춘 듯 두 사람의 가슴이 맞닿았다.
“내일은 뭐 할까.”
“집에 있지, 뭐.”
“아직 하루는 더 남았는데. 아쉽지 않아?”
마른 등을 쓸어내리며 원재가 물었다. 느릿한 시선은 반쯤 걷힌 창가에 닿았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창문에 흔적을 남기며 스치고 있었다. 비가 꽤 오래 오네.
“별로.”
“으음.”
말끝을 늘인 원재는 무어라 대답할지 짧게 고민했다. 비로 인해 빨리 끝나야 했던 휴가가 자신도 꽤나 아쉬운 탓이었다.
“내일 종일 같이 있으면 돼. 그냥…… 그거면 되는데.”
품 안에서 웅얼대는 소리. 원재는 손안에서 흩어지는 보드라운 머리칼을 천천히 빗어 내렸다.
“아, 자기는 나만 있으면 돼?”
애써 빙빙 둘러 말했는데. 원재는 굳이 요점을 짚어 냈다. 그 짓궂음에 사월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어.”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요란하지 않게 들썩이던 가슴은 점차 일정하게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끊이지 않았다.
봄비 또한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그래도 사월은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다.
“이제 비 와도 잘 자네.”
이제 비가 와도, 4월이 되어도, 더는 비 비린내 나는 골목에 머무르지 않는다.
“잘 자, 사월아.”
비 내리는 밤, 사월의 꿈속이 행복하길. 원재는 단정한 이마 위로 입술을 내렸다.
***
안락한 품에서 얼마나 깊은 잠을 잔 건지. 사월은 완벽히 늘어진 몸을 쉬이 일으키지도 못했다. 익숙한 천장만 보며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기만 했다.
웬일로 틈 없이 닫힌 문 너머에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침부터 뭘 하는 거지. 멀뚱히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불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피곤한 것도 아닌데 그냥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숨을 들이마시자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원재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밤사이 원재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이불을 끌어 뺨을 비볐다. 낮잠을 자다 일어난 나른한 고양이 같은 모습이었다.
포근한 온기에 다시 수마에 발을 걸쳤을 무렵. 여태 닫혀 있던 문이 스륵 열렸다.
“아직 자?”
사월은 대답 대신 고개를 틀었다. 느긋하게 깜빡이던 눈이 크게 뜨였다. 방금 씻고 나왔는지 원재는 가운 차림이었다.
중요한 건 끈이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운 앞섶은 활짝 열려 원재가 걸을 때마다 뒤로 나부끼며 펄럭였다. 벗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차림에 사월이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아침부터 왜 그러고 다녀.”
“보기 좋지 않아?”
사월은 이마를 짚는 대신 시트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머리맡에서 원재의 웃음이 흩어졌다. 침대가에 털썩 앉은 그가 이불을 들추고 늘어진 마른 몸을 이곳저곳 주물러 댔다.
“피곤해?”
사월은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원재를 바라봤다. 자신은 딱히 뭘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몸이 꽤 찌뿌듯했는지 원재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시원했다.
기분 좋게 마사지를 받으면서 사월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가운에 반쯤 가려진 옆구리에 손끝이 닿았다. 무수히 많이 피어 있는 스토크 사이, 네임이 느껴졌다. 탄탄한 근육의 굴곡 때문에 이름은 더욱 생동감 있었다.
“생각을 바꿨어? 오늘 쉬는 거로?”
“아니.”
“아니면 왜 이렇게 야하게 만져.”
원재는 제 허리춤을 간질이는 손을 단숨에 움켜쥐었다. 자고 일어나 힘이 별로 들어가지 않은 손등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입에 넣고 쪽쪽 빨아 대고 싶을 만큼 보드라운 살결이었다.
“아, 아파.”
“어제부터 참고 있는 사람을 이렇게 더듬어도 되는 거야?”
그러면서 불쑥 티셔츠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등줄기를 타고 천천히 올라오는 체온에 사월이 몸을 일으켰다.
“나 출근해야 돼. 예약 많아, 청소도 해야 하고.”
사월은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원재는 짧게 입맛을 다셨다. 아침부터 뭘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만. 그래도 옷 속에 손을 넣어 보니 마음이 변할 것도 같았다.
“늦으면 안 돼.”
출근까진 한참이나 남았으면서. 사월은 단숨에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밖으로 빠져나갔다. 휑하니 비어 버린 시트 위를 보곤 원재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느긋하게 마른 인영을 따랐다.
사월은 물을 벌컥벌컥 마셔 대고 있었다. 원재는 등 뒤에 바짝 붙어 허리를 끌어안았다. 고개를 기울여 귓가에 희미하게 입맞춤도 했다.
“오늘은 무슨 일 있어도 일찍 퇴근해. 아침부터 혼자 한 발 뺐어. 알아?”
덜컥 겁이 났다. 어제부터 참았다느니, 아침부터 뺐다느니. 저런 말을 할 정도면 오늘 밤은 무척 길게 느껴지리란 걸 경험으로 알았다. 사월은 말을 돌렸다. 하나도 자연스럽지 않고 티가 난다는 게 문제였다.
“…이건 네가 다 차렸어?”
“어.”
이모님이 해 두신 반찬을 꺼내고 데우는 게 전부였지만 식탁 위는 꽤 풍족했다.
“새벽 내내 네가 옆에서 그러고 있는데 잠이 오겠어.”
목덜미에 쪽, 입을 맞춘 뒤에야 커다란 덩치가 떨어졌다. 등 뒤는 허전하기까지 했다.
둘은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두 사람은 평범한 오늘 아침을 꽤 만족해하는 중이었다.
사월은 젓가락질을 하면서 힐끔 시선을 들었다 내렸다. 아직도 훤히 열려 있는 가운 틈에 보이는 원재의 가슴팍이 종착지였다.
가운을 묶든가, 옷을 입든가. 왜 저러고 있는 거야. 평소에도 종종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긴 하지만…. 오늘따라 뜨끈하게 열이 오른다. 그 기운을 잠재우기 위해 찬물을 벌컥 들이마시는 사월이었다.
“뭘 그렇게 훔쳐봐. 당당하게 봐도 되는데.”
“안 봤어.”
“아닌데. 본 거 같은데.”
원재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사월은 마지막 한 수저를 크게 떠 입에 욱여넣었다. 혹시라도 체할까 봐 원재는 빈 컵에 다시 물을 채워 넣었다.
“빨리 먹고 옷 입어. 가게 같이 갈 거면.”
“알겠어. 씻고 와, 이거 내가 치울게.”
쥐고 있던 그릇과 수저를 빼앗긴 사월은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근데 최 비서는 알아?”
“기다리다 보면 ‘아, 오늘 안 오는구나’ 하겠지.”
정말 당연하단 듯 태연한 말이었다. 이상하다고 여기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눈앞에 최 비서의 얼굴이 스쳤다. 아마 좋은 사장이 되는 건 성원재보다 자신이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고 사월은 생각했다.
씻고 나오자 원재는 이미 옷을 다 입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벌떡 일어나서는 드레스 룸 문을 먼저 열어젖혔다. 사월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옷걸이에 걸린 셔츠와 바지를 내밀었다. 입을 옷은 또 언제 준비해 둔 건지. 옷걸이를 받아 들었는데도, 원재는 굳건히 버티고 서 있었다. 의아함을 담은 사월의 시선과 곧 마주했다.
“입혀 줄까, 자기야.”
“……야.”
“혼자 입을 수 있겠어?”
“장난하지 말고.”
금방이라도 옷을 갈아입혀 줄 것처럼 손을 뻗기에 사월은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아침부터 혼자 한 발 뺐어. 알아?”
아까 들었던 말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고 있는 탓이었다.
멀어진 거리를 힐끔 가늠하던 원재는 몸을 물렸다. 그러곤 꽤 미련 없이 드레스 룸을 빠져나갔다. 닫힌 문을 몇 번 더 확인한 사월이 가만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수신인은 최 비서였다.
성원재 오늘 가게 같이 간다는데, 알고 있는 일이야?
메시지를 보내고 내려놓은 뒤 티셔츠를 벗기 위해 막 팔을 교차했을 때였다. 지잉.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건지 최 비서의 답장 속도는 정말 빨랐다.
와. 태어나서 처음 듣는 소리인데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사월은 짧게 혀를 찼다. 무어라 답장을 쓰기도 전에 문자가 연이어 도착했다.
단단히 미쳤나 봐요, 그 인간.
이따 데리러 갈 거니까... 비밀로 해주세요.
이 세상에 최 비서만큼 힘들게 일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런 연민까지 생기는 순간이었다. 옷을 벗다 말고 사월은 답장을 써 넣었다.
알겠어
답장은 오지 않았다.
사월은 옷을 입고 나가자마자 큰 품에 갇혔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나. 단단한 가슴팍에 뺨을 기대며 여상히 생각했다.
“늦게도 나오네. 보고 싶게.”
고작 몇 분이나 걸렸다고 이러는 건지. 사월은 커다란 몸을 밀어내려 팔을 구부렸다가 멈칫, 움직임을 멈췄다. 이따 최 비서가 데려간댔지. 그럼 또 한참은 떨어져 있을 테니까……. 밀어내는 대신 허리를 마주 끌어안았다.
한 소리 할 줄 알았는데. 가만히 자신을 그러안는 사월의 행동에 원재는 눈을 길게 감았다. 처음 그를 만났던 4월에는 꿈도 꾸지 못했을 광경 아닌가. 날을 세우지도 내치지도 않는 사월의 변화가 확연히 마음에 닿는 순간이었다.
“내가 귀하게 모실게.”
“…….”
“진짜 후회 안 하게.”
출근시켜 준다는 말을 이렇게 비장하게 할 일인가. 사월은 원재의 벅찬 속내 따위는 눈치채지 못했다. 넓고 든든한 품에 고개를 파묻을 뿐. 그저 지금 이 체온을 오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
일주일 만에 사월의 봄에 불이 켜졌다. 가장 먼저 도착한 제하가 환기를 시키고 작업실 소독을 하는 사이 지현이 등장했다. 양손에는 초콜릿이며 타르트며, 한라봉 맛이 나는 것이 잔뜩이었다.
지현이 제하를 도와 소독을 막 마쳤을 무렵 사월이 도착했다. 옆엔 큰 덩치가 껌딱지처럼 붙어 있었다. 원재는 꼭 자신이 사장이라도 되는 양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사장님들!”
“안녕하십니까.”
일주일 만이라 그런지 서로 꽤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역시나 지현은 정신없이 박수를 쳐 대며 사월을 소파로 이끌었다.
“선물 사 왔어요. 이쪽으로 빨리, 빨리.”
“뭘 그런 걸 사 와.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나 먹으라니까.”
아무리 조심하고 신경 쓴다고 해도 툭 치고 나가는 말버릇은 쉽게 고쳐지질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현의 앞에서 욕을 나름 자제하고 있다는 거 였다.
꽤 정 없이 들리는 사월의 대꾸에도 지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부터 신경 쓴 적 없다는 표현에 가까웠다. 지현은 원재와 사월, 제하까지 나란히 앉혀 놓더니 선물이 두둑하게 들어 있는 쇼핑백을 가져왔다.
“제주도 하면 뭐예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사월은 눈만 깜빡였다. 서늘한 눈이 자신을 빤―히 주시하는 걸 깨닫고 지현은 타깃을 바꾸었다. 만만한 게 제하였다.
“뭐야? 네가 대신 대답해 봐.”
“……진짜 감귤 초콜릿이야, 설마?”
“딩동댕.”
경쾌한 화답과 함께 귤 맛이 나는 초콜릿이 탁자에 올라왔다. 부모님이 제주도에만 갔다 오면 저걸 서너 박스씩 사 왔는데. 제하는 과일과 초콜릿의 미묘한 조화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사장님, 이거 먹으면 제주도 여행 다녀온 거나 다름없어요.”
그러면서 사월의 앞으로 박스를 여럿 더 쌓아 올린다.
“이건 타르트, 이건 쿠키, 이건 젤리. 그리고 떡은 내일쯤 택배 올 거예요.”
사월은 고개를 기울여 높이 쌓인 박스를 확인했다. 뿌듯해 보이는 지현과 멀뚱히 박스를 구경하는 사월, 손끝으로 감귤 초콜릿 박스를 툭 밀어 버리는 제하. 가만 보면 셋이 은근히 잘 어울린다니까. 원재는 턱을 괴고 킥킥 웃음을 흘렸다.
“이건 큰 사장님 몫. 똑같은 거긴 한데…… 암튼 안 챙겨 줄 순 없으니까.”
덩달아 선물을 받은 원재가 ‘고마워’ 작게 입술을 벙긋댔다.
“나는 뭐 사 온 게 없는데…….”
사월은 가득 받은 선물이 민망한 듯 목덜미를 쓸었다. 지현이 괜찮다며 마른 어깨를 탕탕 두드렸다. 그 틈에 원재는 근처 백화점을 떠올렸다. 제하나 지현이나 술을 좋아하니, 퇴근길에 좋은 양주 하나씩 쥐여 보낼 생각이었다. 내조하겠다던 말을 꽤 성실히 지키는 중이었다.
“담배 좀 피우고 올게.”
원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월은 지현이 입 앞까지 들이민 초콜릿을 받아먹어야 하나 난감한 표정이었다.
“으어.”
초콜릿을 이로 물고 대답하는 사월의 결 좋은 뒤통수를 쓸어내렸다. 원재는 호언장담했던 내조를 위해 사월의 봄을 빠져나왔다.
“이제 제 얘기 말구. 사장님은 어땠어요?”
한참 제주도 풍경을 읊어 주던 지현과 제하의 시선이 사월에게로 쏠렸다.
“그냥, 좋더라고.”
“그게 끝……?”
간결한 감상이었다. 어땠는지 구체적으로 비교할 데이터도 없을뿐더러, 말 그대로 정말 좋았다. 그간 바빠 함께하지 못했던 원재가 곁에 있는 것도, 늘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봄을 즐긴 것도, 계절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은 것도. 무엇보다 서로의 처음이 된 것이 가장 좋았다.
“어.”
작게 웃음을 흘린 사월은 뒷덜미를 느릿하게 주물렀다. 손이 닿은 부근은 옅은 분홍빛이었다. 꼭 벚꽃의 색채를 고스란히 담아 온 것처럼.
“뭐, 좋으셨으면 됐죠.”
무심하게 건넨 제하의 말에 이어 지현도 의견을 덧붙인다.
“맞아, 맞아. 비가 온 게 좀 에러지만…. 내년엔 제주도 어때요? 진짜 강추! 유채꽃도 쫘악 있어서 죽인다니까요.”
지현이 보여 준 사진 속에 가득했던 샛노란 봄의 흔적. 사월은 그것도 꽤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내년 봄엔 같이 가자.”
“어딜요? 벚꽃 보러?”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지현은 좋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제하는 늘 그렇듯이 묵묵히 눈짓만 할 뿐이었다.
“휴가 길게 내고.”
“찬성!”
“…저도요.”
입꼬리가 절로 부드럽게 올라갔다. 가족이라곤 김 사장이 전부였었는데. 이젠 동생이 둘이나 생긴 기분이었다. 지현과 제하라면, 김 사장도 꽤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사월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 좀 남았지?”
오늘은 잘 챙기지도 않았던 가방을 가져왔다. 원재가 보고 있는 탓에 괜히 새 크로키 북 몇 권을 포함해 손에 잡히는 대로 넣었더니 꽤 묵직했다. 긴 손가락이 휙휙, 속에 있는 물건을 밀어 댔다. 이윽고 손바닥 크기의 종이를 찾아냈다. 처음부터 이걸 사월의 봄으로 옮기는 게 목적이었기에 사월은 미련 없이 가방을 잠갔다.
담배를 피우고 온다더니 원재는 꽤 오래 자리를 비웠다. 타이밍은 지금이 좋은 것 같은데. 사월은 데스크로 향했다.
“네. 소독은 다 했고, 예약은 11시부터 있어요.”
아직 40분은 더 남았네. 고개를 끄덕인 사월이 데스크 앞에 앉았다. 작업실 제일 안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여러 개의 크로키 북과 타투용 전사지가 수북했다. 벽에는 예약이 적힌 4월 스케줄러 한 장이 달랑 붙어 있었다. 사월은 주변을 슥 훑었다.
“뭐 찾으세요?”
“이거 붙인 테이프. 이쯤에서 본 거 같아서.”
사월이 가리킨 건 스케줄러를 고정한 마스킹 테이프였다. 눈코입이 달린 귀여운 파인애플이 그려진.
“그거 두 번째 서랍 봐 보세요.”
제하의 말대로 서랍을 열었다. 손가락 두어 마디쯤 테이프를 끊은 사월은 들고 있던 종이를 벽에 붙였다. 손바닥만 한 종이 하나 붙인 건데도 분위기가 새로웠다.
“와, 그건 뭐예요? 엽서?”
“그린 거야.”
“어디 봐요!”
지현이 가까이 다가왔다. 색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스케치였지만 봄 내음이 물씬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큰 사장님이구나.”
누가 봐도 그림 속 주인공은 원재였다. 간결한 선으로 이뤄진 형체였지만 그 어떤 사진보다도 선명하고 분명했다.
아마 이 그림을 발견한다면 원재가 한참 짓궂게 굴지도 모르지만……. 생에 첫 휴가를 기념하기엔 이보다 나은 건 없으니까. 사월은 마스킹 테이프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절대 떨어지지 않게.
“응, 원재 맞아.”
사월의 봄에는 비를 맞아도 지지 않는 벚꽃이 피었다.
꽃잎이 눈처럼 휘날리는 작은 공원. 걸음을 멈추고 돌아선 채 손을 내밀고 있는 남자. 하얀 셔츠 아래 비치는 옅은 네임의 흔적.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도 웃음 짓고 있는 입술. 애정을 담은 따스한 눈길.
성원재와 봄이었다. 사월이 사랑해 마지않는.
―<사월의 봄>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