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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13화 (13/805)

13화

황궁기사단 제1훈련장은 거대한 부지 내에서도 가장 중앙에 위풍당당하게 세워져 있었다.

훈련장 바로 옆에는 그곳을 지켜볼 수 있는 구도로 만들어진 기사단의 핵심기관, 오르의 영광 관이 존재했다. 대부분의 기사단 내 행정과 임무 하달, 중요한 행사 진행 및 부관급 이상의 기사들이 모여 해야 하는 각종 작업들이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즉 이 수도를 지키고 제국 전체를 움직이는 무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무지렁이였던 이들이 기어들어 와 발을 디딘다니. 황궁기사단에게는 더없는 모욕이었다.

“저기 봐. 또 몇 놈이 오는군.”

막 훈련장으로 들어서는 가케인과 유더를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노로 가득한 눈빛을 숨기지 않은 기사 몇 사람이 모여서 마병단원들을 향해 비아냥대는 중이었다.

“저 근육 하나 보이지 않는 팔을 봐. 굳은살 하나 보이지 않는 손은 또 어떠한가? 저들을 모아 대체 뭘 할 수 있단 거지? 글은 읽을 줄 아는 놈들인가?”

“황궁기사단 천년 역사에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모욕적인 사건인지 모르겠군. 폐하와 단장님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

유더는 그들을 한 번 흘긋 바라본 뒤 무시했다. 가케인의 얼굴은 약간 붉어졌지만 그도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어서 와요, 가케인.”

그들은 훈련장 가운데 이미 도착해 있던 신과 단원들을 만났다. 기사단원들의 비아냥을 먼저 듣고 있었을 그들 또한 표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 긴 머리를 질끈 묶어 올린 여자가 나서서 가케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에버. 먼저 와 있었네요.”

‘성을 받고 나면 에버 벡이 되겠지만.’

유더는 예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2년 전 붉은 돌이 떨어진 뒤 가장 먼저 제국에 소문이 퍼진 각성자 중 한 사람으로, 이전까지는 평범하기 그지없던 시골 마을 처녀였기에 더욱 화제를 모았다.

먹이를 찾아 산에서 내려온 몬스터 떼를 손가락 하나로 모두 죽인 가녀린 여자라니. 세상에 그보다 더 충격적인 소식은 없었다.

그녀의 소문은 목격자들에 의해 날개 돋친 것처럼 세상에 모두 퍼졌다. 마병단에 합격한 뒤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단원들 중에도 그 이야기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녀의 능력은 근력 및 피부 강화로, 어지간한 몬스터 정도는 무기를 쓰지 않고도 산 채로 찢을 만큼 힘이 셌기에 유더가 죽기 전까지도 마병단에서 중요한 임무를 여럿 수행했다.

겉보기에 평범해 보인다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녀보다 힘이 강하거나 방어력이 더 강한 능력자가 있어도 그녀만큼 그 힘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예전 기억에 의하면 신과 부단장을 맡은 것도 에버였다.

“과가 분리된 뒤의 첫 훈련부터 아주 시끄럽네요. 뭐 어쩔 수 없죠.”

“저 사람들, 계속 저러고 있었어요?”

“그래요. 지치지도 않고 계속 저러고 있더군요. 새벽부터 저러고 있었나 의심될 지경이었어요. 뭐, 바쁘신 귀족분들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요.”

에버가 냉정한 얼굴로 이야기하자 신과 단원들 사이에 작게 웃음이 번졌다.

“저는 아예 들여보내 주지도 않으려고 했어요.”

에버의 옆에 서 있던 조그만 소년이 한결 밝아진 얼굴로 손을 흔들며 투덜거렸다. 그도 에버만큼이나 유명한 초기 각성자 중 한 명이었다. 고작 열 살에 나뭇가지 하나로 바위를 가른 평범한 평민 소년, 지미 오커.

‘물론 성을 받기 전이니 아직까지는 그냥 지미지만.’

붉은 돌이 떨어진 이후 2년이 지나 이제 12살이 된 지미는 부모의 곁을 떠나 당당히 마병단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그의 부모는 평민이라도 그럭저럭 건실하게 굴러가는 가게를 소유한 이들이었기에 아낌없이 아들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고 들었다.

그는 330명의 마병단원 중 가장 어린 합격자였으나 그 누구보다도 전설 속의 소드마스터와 비슷한 능력을 낼 줄 알았다. 무기에 기운을 씌워 소드마스터의 오러처럼 사용하는 모습은 적의 오금을 저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황궁기사단 종자로 들어가는 아이들은 모두 10살부터 시작이라면서 왜 12살인 저는 안 된단 건지 이해를 못 하겠어요.”

지미의 말대로 대부분의 명망 있는 기사단은 10살쯤 선배 기사의 종자가 되는 것으로 기사단 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부모와 연이 있는 기사의 종자가 되었기에 고생할 필요도 없었고, 대부분은 곁에서 어깨너머로 경험을 배우며 간간이 검술 과외를 받는 식으로 생활하고는 했다.

그러다 나이가 차면 정식으로 기사단에 입단해 서임을 받는 것이다. 신분이 낮은 이들은 끼어들 수 없는 그들만의 세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따 훈련할 때 네 힘을 제대로 보여줘. 그러면 돼.”

가케인이 지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언을 건네자 신과 단원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술과보다 신과에 평민 출신 단원들이 많았다.

그들은 황궁기사단의 텃세에 두려움을 느끼고 주눅이 들었지만, 애써 이겨내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아직까지는 어려운 일이지.’

몇 년만 지나면 해결될 일이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 뿌리 깊은 신분 의식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는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다. 그리고 키시아르 라 오르가 그렇게 만들어 줄 것이었다.

유더는 그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뭐가 이렇게 시끄럽나 했더니, 버러지들이 모여 있었군.”

잔뜩 찌푸린 표정을 한 젊은 기사 한 명이 부하 기사 여럿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입은 기사단 제복에는 다른 기사들과 달리 가슴에 새겨진 금색 독수리 위에 백합꽃 문양이 세 개 더 새겨져 있었다.

“저 백합꽃은 무슨 의미예요?”

지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가케인이 기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금빛 독수리는 황궁기사단의 상징. 그리고 백합은 고결함의 상징이지. 제복에 백합이 다섯 개면 기사단 단장, 네 개면 부단장, 그리고 세 개면 바로 그 아래란 뜻이야.”

“그러면 엄청 높은 분이네요.”

“응. 뭐, 은퇴할 때까지도 백합을 하나도 달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니까.”

가케인은 어린 시절 한때 유명한 기사단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검을 배운 적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가문의 이름은 있되 세력이 없었던 탓에 기사가 되는 데 필요한 돈을 감당하지 못하여 포기했다.

이름이 알려진 기사단에 평민이 없는 이유는 그 빛나는 제복, 갑옷, 검, 그리고 말 같은 것들이 모두 상부에서 지급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꽤 많은 돈을 썼다. 그것도 전원이 귀족인 황궁기사단쯤 되면 더했다.

기사들이 걸친 푸른 제복은 최고급 천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그들이 든 검은 하나같이 가문의 보검쯤 되는 이름난 것들이었다.

얼마 전 막 지급받은 검은 제복을 입고 있는 것만 제외하면 하나같이 개인 검 하나 소유한 이들이 거의 없는 마병단과는 전혀 달랐다.

“누가 너희들을 여기에 들어와도 좋다고 말했지?”

백합을 3개 단 기사가 마병단원들에게 다가왔다. 아무리 제 실력에 자신이 있어도 아직까지는 그런 거만한 얼굴을 한 고위 귀족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는 이가 거의 없었던 탓에 단원들 사이에 당황이 번졌다.

유더는 그 당당한 가케인마저도 순간적으로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을 띄우는 것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는 단장님의 명으로 훈련을 위해 이곳으로 모였습니다.”

“단장이라. 펠레타 공작님을 말하는가?”

“그렇습니다.”

알면서도 물어보는 것이다. 그의 거만한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주 뵈었던 분이지. 기행이 잦은 분이시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일까지 하실 줄이야. 너희 같은 녀석들을 모아 두고 그곳의 대장 노릇을 하시다니, 그분이 저지른 변덕 중 최고라 할 만해. 펠레타에 있는 그분의 기사들이 울고 있겠군.”

“…….”

그가 키시아르와의 친분을 드러내며 비꼬자 마병단원들의 얼굴에 일제히 분노가 번졌다. 누군가 주먹을 꽉 쥐면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나자 백합을 3개 단 기사의 뒤에 있던 기사들도 그에 대항해 찌푸린 얼굴로 검집 위에 손을 올렸다. 금방이라도 무기를 꺼낼 듯 위협적인 태도였다.

그리고 오로지 그 분위기 속에서 유더만이 침착한 무표정을 유지했다.

“실례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께서는 누구십니까?”

유더는 진심으로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단순히 과거에는 술과여서 황궁기사단 사람들과 얼굴을 볼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장이 된 이후 만난 귀족들 얼굴은 그래도 제법 안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남자를 모른다는 것은 몇 가지 이유밖에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하나, 유더가 단장이 되기 전 그가 죽었거나. 둘, 혹은 은퇴하여 본인의 영지로 가 버렸거나.

어느 쪽이든 저 한창 시기의 젊은 기사에게 명예로운 이유는 아니다. 황족을 사사롭게 입에 올릴 정도의 가문 사람이라면 수도에서 충분히 살 수 있을 테니 더더욱 말이다.

아마도 눈앞의 남자는 2년이 지나기 전에 이곳에서 사라졌을 사람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이상 걱정될 것도 없었다.

‘설령 미래에도 잘 살아 있던 사람이라 해도 상관없지만.’

“내가 누구냐고?”

3개의 백합을 단 기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주변을 돌아보며 웃었다. 금빛에 가까워 보일 만큼 밝은 갈색 머리칼을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넘긴 매끈한 얼굴이 어디서든 귀족적이라는 평을 받을 만한 미남이었지만 유더의 눈에 비친 그는 그저 보는 눈이 없는 애송이일 뿐이었다.

“키올레 다 디아카. 디아카 공작가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 평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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