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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0화 (20/805)

20화

이전까지 유더는 마병단원들 사이에서 음침하고 속을 알 수 없는, 하지만 힘은 강한 동기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부터는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믿을 수 있을 만한 사람, 그들을 대표하여 앞에 나서도 괜찮은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각자 적응하기에도 바빠 누가 더 위에 서고 말고 할 것도 없던 300명 사이에 암묵적으로 리더를 맡아도 괜찮겠다고 생각되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단장 키시아르가 귀족이 아닌 마병단 편을 철저하게 들어준 것까지 더해져 훈련을 받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고, 여유가 생기니 동료의식도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다.

이전까지는 룸메이트나 마음이 맞는 동료 일부끼리만 친했었지만, 이틀 전부터는 얼굴과 이름을 잘 알지 못하는 이라 해도 같은 마병단이라면 스스럼없이 서로를 대하기 시작한 것이 그 증거였다.

성별도, 원래 갖고 있던 신분도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입고 있는 똑같은 검은 제복 아래서 그들은 동등한 하나였다.

유더는 마병단원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된 줄은 몰랐지만, 저를 보는 표정들이 이전과 달라진 것만은 느꼈다.

자신을 보는 마병단원들의 얼굴에서 강자를 향한 승부욕이나 무작정 어려워하는 기색이 아닌 동등한 친밀감을 보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묘한 기분이었다.

“어휴. 들어오려고만 하면 자꾸 한 번만 또 추자고 잡아대니 원. 미안해, 유더.”

각기 다른 상대와 세 번이나 춤을 추고서야 겨우 돌아온 가케인이 이마에 살짝 맺힌 땀을 닦으며 유더의 앞에 털썩 앉아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어때. 파티도 그리 나쁘지 않지?”

“응.”

“그래. 그럴 거라 생각했어.”

씩 웃은 가케인이 춤을 추는 와중 주워들었다는 이야기를 안주 삼아 떠들기 시작했다.

“들어보니 오늘 여기에서 쓰는 비용은 모두 단장님이 지출한다더군. 따라오실 만한데도 단원들끼리 보내는 시간이 더 필요할 거라고 말씀하셨대. 정말 대단한 분이야.”

키시아르가? 그것은 몰랐던 사실이었다.

‘생각해 보면… 아예 가게 하나를 다 빌린 거니 꽤 많은 돈이 들었겠지.’

단원들에게는 큰돈이지만 키시아르에게는 간지럽지도 않은 돈이었을 것이다. 유더도 단장 시절 단원들의 사기를 보충하기 위해 여러 번 식사와 술자리를 제 돈으로 준비하라 이른 적이 있었지만, 그는 단순히 참석하기 싫다는 이유로 돈만 내고 자리는 비웠었다.

그때 단원들은 과연 유더의 의도를 키시아르처럼 좋은 쪽으로 해석해 주었었을까? 이제 와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약간 궁금해졌다.

“유더! 춤출 줄 알아요?”

그때, 약간 달아오른 얼굴을 한 에버가 나타나 물었다.

“못 춰요. 못 춰!”

가케인이 필사적으로 유더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에버의 손가락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녀가 손 하나로 살짝 민 것만으로도 가케인은 순식간에 테이블 바깥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악!”

“가케인 당신에게 물은 게 아닌데? 유더에게 물었다구요. 시끄럽네, 정말.”

“출 줄은 압니다.”

유더는 멀리서 다른 동료들의 웃음소리에 파묻혀 구조되고 있는 가케인을 흘끔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지금 추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이렇게 있는 게 좋습니다.”

“그래요? 아쉬워라. 난 춤을 좋아하거든요.”

에버가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 여기 올 땐 두 번 다시는 이렇게 재미있게 누군가와 춤을 추고 이야기할 일이 생기지 않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어서 기분이 좋아요. 모두 유더 덕분이에요.”

“…….”

“당신이 그때 나서 주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즐겨도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거예요.”

유더는 에버를 바라보다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기사들 앞에 나선 것은 사실이지만, 에버에게 그런 말을 들을 만큼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나서지는 않았다. 오히려 괜스레 시비를 붙어 귀족 출신 기사들에게 원한을 샀다고 원망받아도 충분할 행위였다.

“엄청난 목표를 가지고 나섰던 것도 아니고, 제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 곧 나섰을 자리였습니다. 힘이 되었다면 다행이지만 그것을 저 때문이라 생각하지는 마세요.”

유더가 그때 나선 이유는 간단했다. 단지 그때 그 자리에서 가장 주눅 들지 않고 나설 수 있는 이가 이미 한 번 그 시절을 겪고 10년 가까이 마병단장으로서 앞에 서는 것에 익숙해진 자신뿐이라 여겼기 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제는 그저 한 명의 단원으로서 절대로 위쪽을 노리지 않고 살 생각이라지만 그들의 앞에 나서며 살았던 세월은 유더의 깊은 곳에 의무처럼, 부채감처럼 남아 있었다.

이전에는 그들 한 명 한 명의 소중함을 몰랐다. 혼자서도 모두 다 할 수 있을 줄로만 알고 벽을 치고 경계했다.

하지만 죽을 때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어쩌면 유더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은 잘난 황제도, 귀족들도, 자기 자신도 아닌 ‘같은 힘’을 지닌 다른 존재들이란 것을.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결국 이렇게 되었을 겁니다.”

그래. 거기에 유더가 없었더라도 결국 마병단원들은 자신들이 황궁기사단이나 진주탑 마법사들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라를 위해 하는 일만큼 대가를, 그리고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도.

유더의 행동은 그 미래가 오기까지 겪을 시행착오를 조금 줄이기 위해 노력한 것뿐이었다.

잘못된 단추를 다시 끼우기 위해서는 이 마병단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마병단의 중추이자 핵심이었던 사람들이 미래였다면 간단히 막을 수도 있었을 무지함에서 비롯된 사고나, 별 것 아닌 차별 때문에 초중반에 너무나 많이 사라졌다.

게다가 유더보다 훨씬 힘이 될 수 있었을 단장 키시아르도 뼈대를 만들자마자 죽고 말았다. 일단 그것만 바로잡아도 미래에 일어날 재앙을 막을 때 엄청난 힘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니 마치 예언 같네요?”

눈을 깜박이던 에버가 이내 쿡쿡 웃었다.

“예언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직까지는 촌뜨기 평민 주제에 감히 귀한 곳에 발을 디뎠다는 이유로 멸시하는 시선을 받는 게 익숙하지 않거든요. 언젠가는 저도 유더처럼 나서서 저보다 약한 주제에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고 한소리 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될 겁니다.”

유더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가 살았던 미래이자 과거에, 에버는 마지막까지 마병단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던 초기 멤버 중 한 명이었다.

냉정한 태도로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혈통만 믿고 날뛰는 무능력자들을 몰아붙이던 그녀의 모습은 마병단 내에서도 아주 유명했다.

지금은 훨씬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으며 춤추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모습이 미래의 모습보다 약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부족한 것은 단지 경험뿐이었다. 그것만 채워지면 그녀는 얼마든지 미래처럼 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좋아요. 그런 미래를 위해 한 잔 더 해요.”

유더는 말없이 에버와 잔을 부딪쳤다.

“유더. 당신은 혹시 제2성까지 모두 각성했나요?”

“아뇨. 그건 아직.”

“난 알파라고 그러던데, 아직까지는 뭐가 다른 건지 잘 모르겠어요.”

몇 년이 더 지나면 제2성 여부를 대놓고 묻는 것은 실례라는 풍조가 생기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 세상은 알파와 오메가라는 존재 자체를 거의 알지 못했다. 그것이 낯설고 자유로웠다.

이런 분위기가 어쩌면 평생 갈 수도 있을까? 유더는 그런 생각을 내심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붉은 돌의 힘이란 건 대체 뭘까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이 우리에게 엄청난 힘을 주고, 타고난 성별까지 바꾸어 버렸잖아요. 제 모든 것이 바뀌었는데 저는 아직 그 돌이 뭔지조차 몰라요. 사제분들의 말대로 그것이 정말 태양신께서 내리신 힘일까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있어?”

그때 다른 동료들에게 잡혀 있던 가케인이 겨우 되돌아와 곁에 앉았다. 에버가 눈을 흘기며 입을 열었다.

“붉은 돌의 힘이란 게 정말 태양신의 힘일까 하는 이야기요. 한 번도 궁금한 적 없었어요? 저만 궁금했나?”

“뭐 궁금하긴 하지만, 마병단에 있다 보면 언젠간 알게 되지 않을까요.”

가케인이 눈을 조금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마병단을 만든 이유가 그 붉은 돌을 회수해서 지키게 하려고 그런 것이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그런가…….”

에버가 한숨을 쉬었다. 가케인의 말은 처음 나라에 마병단 모집 공고가 내려왔을 때부터 함께 돌았던 유력한 소문 중 하나였다. 유더도 오래된 기억 속에서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문이 되었지.’

키시아르가 회수해 온 붉은 돌은 1년 정도에 걸쳐 진주탑에서 정제된다. 그 뒤에는 세계구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수도 북쪽에 위치한 성역의 숲 가장 깊은 곳에 모셔질 것이다.

말이 모신다지 사실은 봉인에 가깝지만, 마병단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그곳에 쓸데없는 이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곳에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이는 두 사람뿐이었다. 하나는 황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마병단장인 유더였다.

그것을 생각하니 어쩐지 파괴당하지 않은 멀쩡한 마나 홀 쪽이 쑤시는 듯한 착각이 들어서 유더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그 붉은 돌 회수 시기……. 이제 곧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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