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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2화 (32/805)

32화

“유더, 고향이 그립나?”

키시아르는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듣는 유더는 그 질문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았으나, 옆에 앉아 있는 가케인의 표정은 계속해서 격렬하게 변하기를 반복했다. 단장이 유더를 돌려서 탓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키시아르는 그런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 의뭉스럽다 못해 좀 변태 같기는 했지만…….’

아, 또 쓸데없는 생각을. 유더는 고개를 저으며 “아뇨.” 하고 짤막하게 대꾸했다.

“말씀대로 가족도 없고, 남겨둔 아쉬움도 없어서 그립지 않습니다. 다만 마병단에 합격하게 될 줄 모르고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채 와 버렸으니, 언젠가 한번쯤 돌아가서 정리해야겠다고 느꼈을 뿐입니다.”

“옳은 말이야.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지점이기도 하군. 자네와 같은 이들을 위해 이 임무가 무사히 끝나고 나면 전체 휴가를 며칠 주어야겠어.”

키시아르의 물 흐르듯 부드러운 대꾸에 가케인이 옆에서 눈을 크게 떴다.

하늘처럼 높은 황족이자 공작 작위를 지닌 단장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나누는 유더의 담력도 놀라웠지만, 그런 그의 무례함을 탓하지 않고 앞으로의 계획을 쉽게 언급하는 키시아르는 더욱 놀라웠다.

“저… 단장님. 괜찮으신 겁니까?”

“뭐가 말이지?”

가케인은 조심스럽게 마음을 가다듬고 질문을 건넸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전체 휴가 같은 계획을 결정하시는 건…….”

“물론 괜찮고말고. 내게 그 정도 재량은 있다네. 번복하지는 않을 테니 가케인 자네도 미래 계획을 미리 세워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키시아르가 살짝 윙크를 했다. 그간 그가 단장으로서 보여준 모습들 때문에 가케인은 키시아르를 황족다운 위엄이 넘치는 공명정대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벼운 모습을 보자 충격으로 인해 머릿속에서 생각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저는… 물을 좀 마시고 오겠습니다.”

유더는 충격을 받은 기색이 역력한 가케인이 비틀비틀 일어나 사라지는 것을 보며 그가 느끼고 있을 기분을 대충 짐작했다.

키시아르를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 이들은 반드시 알맹이와의 괴리에 충격을 받게 된다. 예전의 유더도 그랬었다.

겉으로야 태양신의 혈통이 그대로 드러난 잘생긴 얼굴에 위에 서는 자다운 태도를 지닌 위엄 있는 단장처럼 보이겠지만, 그것이 키시아르 라 오르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못한 채 유명무실한 공작 작위를 유지한 쭉정이 황자였고, 남녀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이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닌 바람둥이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마병단이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기강을 잡을 필요성이 있어 대외적으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 가면을 한 꺼풀만 벗기고 나면 부하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윙크를 날리곤 했다. 저런 모습이 바로 키시아르의 또 다른 한 면이라 할 수 있었다.

아마 마병단원들은 그의 그런 모습에도 이제부터 슬슬 익숙해져야 하리라.

‘그러고 보니… 가케인이 없어졌으니 내가 키시아르에게 개인적으로 독대할 수 있는 건 지금뿐인가?’

대화가 사라졌음에도 키시아르는 자리를 뜨지 않고 아직 유더의 곁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잠깐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단장으로서 적절치 못한 태도에 실망했다는 말만 아니라면야.”

키시아르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유더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일개 단원인 이가 감히 그럴 수야 있겠는가.

“당연히 아닙니다.”

“그런가? 유더 자네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사람 같았는데.”

그럴 수 있을 사람이라는 건 무슨 뜻인가. 하지만 여기서 그 말을 파고들어 보았자 시간만 끌릴 뿐이라는 것을 유더는 잘 알았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하여 상대의 벽을 무너뜨리고 속내를 미리 짐작하려 수를 쓰는 것은 옛날에도 키시아르가 잘하던 짓 중 하나였다.

“그래. 그게 아니라면 무슨 말을 하려고?”

“이곳에 2년간 머물러 붉은 돌을 지키고 있었던 남부군 병사들 중 각성자가 유난히 많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시간이 많지 않으니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어제 안내해 준 병사의 말을 들어보니 비율이 생각보다 무척 높았습니다. 모두 합치면 이 산맥 안에 수십 명의 각성자가 있는 셈입니다.”

키시아르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물었다면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상당히 고민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행히도 유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곧바로 알아들었다.

장난스러웠던 붉은 눈동자가 곧바로 진지하게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그런 보고는 받은 적이 없는데.”

“거의 일반 병사들이라 들었습니다.”

“마병단에도 지원하지 않았고 말이지.”

그들이 왜 마병단에 지원하지 않았는지, 각성한 이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누구도 특이사항으로 보고할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키시아르는 어디까지 깨달았을까.

유더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조용히 반응을 기다렸다.

“사실이라면 조사가 필요하겠군. 본래 군대는 내가 손댈 수 없는 곳이지만, 자네의 말대로라면 이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니 말이야. 지금 한 말, 거짓 없는 사실이겠지?”

“물론입니다.”

키시아르의 반응은 유더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괜찮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유더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조사를 해 보면 곧 나올 일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턱을 문지르던 키시아르가 정리를 마쳤는지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설마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하고 싶다던 말이 그런 내용이었을 줄이야.”

“…….”

“자네는 동료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들었는데, 실은 각성자들에게 꽤 관심이 있나?”

“저는…….”

여기서 무어라 대답해야 적당히 상황을 넘어가면서 앞으로 키시아르와 나쁘지 않은 관계를 쌓을 수 있을까. 유더는 무표정한 얼굴 아래 나름대로 치열한 고민을 했다.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단지 위험할 수도 있겠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저희를 통솔하는 분이 단장님이시니, 각성자와 관련된 사항은 단장님께 말씀드리는 쪽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위험하다……. 관리되지 않은 각성자들이 한 단체 안에 여럿 몰려 있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

원론적인 답이었기에 딱히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으리라. 키시아르가 낮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천천히 끄덕였다.

“재미있군. 유난히 이 한 곳에서 많은 각성자가 나온 건 역시 붉은 돌 때문인가.”

그가 무언가를 떠보듯 유더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까. 여기서는 한발 물러서서 모른 척을 하는 쪽이 나을까? 그러나 애초에 평범한 평민 출신의 능력 각성자라면 신경조차 쓰지 않을 일을 먼저 알아내어 키시아르에게 들이민 것은 제 쪽이었다.

‘내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나 보군.’

그렇다면 보여주면 그만이다. 어차피 유더가 대답할 사항 정도는 키시아르도 충분히 추측했을 테니까.

유더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붉은 돌이 떨어질 때 발산된 힘으로 대륙 전체에 각성자가 나왔습니다. 그 정도로 강력한 힘이라면 보다 가까이서 오래 머물렀던 이들 사이에서 많은 각성자가 나온 것도 우연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래. 나 또한 같은 생각이야.”

키시아르가 비로소 제가 원하던 답을 들은 선생처럼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돌이 떨어진 지 2년이 지나도록 내게 이곳 병사들의 특수한 각성비율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이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겠지. 사소하다 여기고 넘길 수 있었던 사항인데 빠르게 이상을 알아차리고 내게 굳이 보고해 준 자네의 능력이 감탄스러워. 그 관찰력과 판단력도 각성한 능력의 일부인가?”

“…아닙니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니야. 진심이니.”

키시아르는 말 한마디로 지노 장군을 포함한 이곳의 군인들 전부를 유더보다 못하다 평가내렸다. 유더가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키시아르의 붉은 눈동자가 평소의 나른함은 간 곳 없이 영리한 맹수처럼 반짝였다.

“흐음. 역시.”

“예?”

“전에 말했던 나와 가까이 지내보자는 제안. 역시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겠나? 섭섭지 않게 잘 해줄 테니까.”

그 목소리는 부하를 향해 건네는 말이라기보다는, 마음에 드는 이를 향해 추파를 던지는 것처럼 달콤했다. 어지간한 자라면 누구나 얼굴이 붉어질 만한 말이었지만 유더는 오히려 침착해졌다.

“저는 이미 단장님의 부하입니다. 충분히 과분하게 대해주시고 계시죠. 여기서 어떻게 더 가까이 지내자 말씀하시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이번엔 그렇게 넘어가려는 건가.”

키시아르가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뭐, 좋아. 나는 벽이 높을수록 부술 때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니.”

높은 벽. 황족이 평민에게 할 만한 표현이 아니었다.

“그 말대로, 어차피 자네는 지금 내 단원이니 길게 보도록 하지.”

그 말인즉슨 결코 제 뜻을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유더의 눈가가 움찔 떨리는 사이 키시아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도로 출발할 모양이었다.

“유더 아일. 앞으로도 이상한 정황이 보이거든 언제든 내게 보고하러 와도 좋다. 혹 내가 자리를 비워 부관이나 다른 이들을 만나게 된다면 그들에게도 내게 하듯 편히 말하도록 하라. 일러둘 테니.”

“…알겠습니다.”

한 번의 이야기로 얻은 것치고는 대단한 성과였다. 키시아르가 유더의 머리와 능력에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확실히 보통 인간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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