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무슨 문제 말이지?”
“제2성 각성자들은 각성할 때와 그 이후에 주기적으로 몸에서 향이 나는 시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몸에서 향이 난다. 돌려 표현한 것이지만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발정기였다.
“아직 마병단에서 일어나지는 않은 일입니다만, 그런 시기에 서로 가까운 곳에 있다 보면 원치 않는 사고가 생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각성자들이 모인 곳이니 미래를 위해서라도 단장님께서 생각해 보셔야 할 문제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각성자 비율이 유난히 높은 이 남부군 같은 단체나, 미래에 점점 늘어날 다른 각성자들끼리 부대끼며 살아갈 나라를 위해서도 반드시 빠른 제도 정립이 필요했다.
‘과거에는 많은 사고가 일어난 뒤에야 뒤늦게 법을 만들 수 있었어.’
붉은 돌이 떨어진 지 2년이 지난 현재까지는 각성자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각성자는 점점 더 늘어나고, 능력의 종류 또한 다양해진다. 그와 함께 제2성 각성자도 늘어나면서 피치 못할 연유로 많은 사고가 일어났다.
처음 일어난 현상에 대해 사람들이 인지하고 익숙해져 대처법을 찾기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제2성에 대한 것도 그랬다.
제2성을 뒤늦게 각성하는 이를 사람들로부터 한동안 분리해 놓아야 한다는 것. 발정기에 들어간 알파나 오메가를 아무 생각 없이 만나면 안 된다는 것. 그런 기본적인 정보도 지금은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본래대로라면 누군가 피해를 보면서 차차 알려질 정보들이지만 유더는 그것이 싫었다.
“제2성 각성자들끼리 일으킬 사고라……. 일리는 있군.”
“이미 일이 벌어진 뒤 처리가 필요할 때 규칙이 없다면… 그때는 늦습니다.”
최대한 미리 지정해 놓아야 한다. 마병단이 막 생겨나 아직 모든 것이 가능한 시기일 때, 그리고 키시아르의 지위를 위협할 이가 없을 때.
“알겠네. 어차피 법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단내 규율을 만드는 중이었으니 거기서 더 추가한다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지. 참고하겠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네는 미각성자이면서 그런 부분까지 어떻게 생각이 닿았나?”
그건 제가 바로 미래에 오메가로 각성한 이였기 때문입니다. 하고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유더는 거짓말을 했다.
“마병단에 지원하기 전 보고 들은 것들이 있어 꼭 건의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군.”
제아무리 키시아르 라 오르가 똑똑하다 해도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있단 황당무계한 진실까지는 추측할 수 없다. 키시아르는 어렵지 않게 유더의 대답에 납득했다.
“이야기하는 동안 여기까지 왔군. 그러면 밤이 깊었으니 내일 보도록 하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은 어느새 처음 만났던 곳으로 되돌아온 상태였다.
별이 빛나는 하늘을 흘긋 올려다보며 달의 위치를 통해 시간을 가늠한 키시아르가 유더의 인사를 받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밤을 함께 보내보지 않겠느냐 운운한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산뜻한 태도였다.
유더는 그의 등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 * *
붉은 돌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누군가는 그것이 신이 인간들에게 보낸 메시지라 생각했고, 또 누군가는 그것이 이세계에서 날아온 돌이라 여겼다. 유더는 그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증거가 분명한 것. 혹은 스스로 눈으로 본 것만 믿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렇기에 이튿날 다시 마주한 붉은 돌 앞에서 그가 이전과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직접 눈으로 보고 겪은 이상,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설마 정말로 다른 세계에서 날아온 물건이라도 되나.’
“유더, 왜 그래?”
유더의 곁에 서 있던 가케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돌이 내뿜는 기운 때문에 그런 거야?”
“아니.”
붉은 돌이 내뿜는 기운 따위는 이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늘도 가까이 다가갈수록 공기가 무거워지고 피부가 따끔거렸지만 어제보다는 한결 나았다.
몸이 익숙해진 것은 유더뿐만이 아니었다. 어제 이 거리까지 도달했을 때 힘겨워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던 칸나도 오늘은 제법 침착했다.
‘어제 도움이 못 된 사실에 꽤 자책하는 것 같더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어.’
어제 칸나는 숙소에 돌아갈 때까지 내내 침울했다. 전투능력이 없는 그녀를 애써 여기까지 데려왔는데도 정작 필요로 할 때 도움이 되지 못했으니 그럴 만했다.
하지만 붉은 돌을 직접 만졌다가는 가케인의 분신이 아닌 그녀의 팔이 사라졌을지도 모르니 다른 이들 입장에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오늘은 이 따끔대는 기운이 문제가 아니라… 돌 자체가 문제지.’
유더가 심각해진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붉은 돌 자체를 움직여 보려 시도했던 것이 전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더는 오늘 이곳에 오기 전, 숙소 안에서 여분의 이불을 찾아 잘라낸 천을 작은 가방에 넣어 왔다. 본래는 돌 위에 능력을 써서 어제처럼 흙과 얼음으로 공처럼 만든 뒤 그 천을 위에 씌워 접촉을 시도해 보려 했었다.
그런데 붉은 돌을 다시 마주한 순간 어제 해 보지 않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만약 붉은 돌이 이 세계의 자연에 속한 물질이라면 그것은 유더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자연 속성과 거기서 비롯되어 태어난 물질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힘이야말로 그 돌을 운반하기 위한 가장 필요한 능력이 아닐까.
그래서 유더는 돌 아래 흙이 아니라 돌 자체에 남들 몰래 힘을 써 보았다. 하지만 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제 붉은 돌에 대고 힘을 쓰려 한 엘더 남매 때처럼 또다시 기운을 터트리려 하지는 않아 다행이었지만, 그저 아무 반응도 없었다.
유더의 힘은 이 세계에서 난 것이 아닌 것들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몬스터 같은 것들이 그랬다.
세계를 구성하는 마나가 어그러진 곳에서 태어난다고 알려진 그놈들에게 힘을 발휘하려 하면 바로 지금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간접 수단을 이용하여 공격하면 되니 상관없었지만, 몬스터의 힘줄로 만든 밧줄이나 몬스터의 피를 섞은 술 따위에 약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 문제였다.
유더의 기억 속에만 남겨진 미래에는 각성자가 세계구 주변에서 힘을 쓰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있었다. 그래서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직접 움직이려 해 볼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새삼스레 그것이 아쉬워졌다.
‘뭐, 내 힘이 통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해서 돌을 옮길 좋은 방법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는 미련 없이 간접적인 수단을 사용해 볼 수 있으리라.
‘일단 키시아르 쪽에서 하는 것을 보고 도와 볼까.’
키시아르는 오늘 이곳에 비교적 가볍고 튼튼한 나무 상자 하나와 큰 삽 하나를 가져왔다. 물론 운반은 기사들이 해 주었지만 거대한 구덩이에 도달한 현재, 삽을 들고 있는 사람은 그였다.
“자. 어디 한 번 땅을 파 볼까.”
상자를 붉은 돌 옆에 둔 키시아르가 천천히 삽자루를 들고 다가갔다.
“단장님. 정말 혼자 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가케인은 키시아르의 손에 들린 큰 삽이 거대한 무기라도 되는 양 쳐다보았다. 우리 중 제일 높은 이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였지만 키시아르의 뜻이 워낙 완강했다.
‘어제 일을 보니 내가 적격이다. 부하들이 노력하고 있는데 내가 아무것도 안 해서야 말도 안 되지 않겠나?’
그리 말하는 키시아르의 앞에서 그를 어려워하는 가케인이 무어라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유더. 혹시 모르니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 곧바로 어제처럼 주변에 방어벽을 치도록.”
“네.”
“그러면 곧바로 파겠다.”
삽을 든 키시아르가 주저 없이 그것을 붉은 돌 옆의 땅에 꽂았다. 유더는 그 순간 키시아르의 손 쪽에서 일렁이는 기운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강화 능력인가?’
먼지가 가라앉는 듯한 푹 소리와 함께 땅에 파고든 삽이 잠시 멈추었다. 키시아르는 붉은 돌이 이상을 보이는지 살필 셈인지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단숨에 붉은 돌을 파내어 상자 속에 휙 털어 넣었다.
“으악!”
엘더 남매가 나란히 비명을 질렀다. 칸나 또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생각했는지 몸을 움츠렸다. 가케인의 발치에서 그림자 분신이 휙 몸을 일으켰다.
“…….”
그리고 상자 속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된 것 같군.”
모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상자를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서 침착함을 지키고 있는 것은 키시아르와 유더뿐이었다.
유더는 산뜻한 얼굴로 삽자루를 가케인에게 넘기는 키시아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직접 닿지만 않으면 되었던 모양이군요. 다행입니다. 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물을 좀 채워서 얼릴까요.”
“그런 것도 가능한가?”
“바로 녹여서 없애는 것도 가능합니다.”
“흠… 아니. 보고는 싶지만 지금은 괜찮네. 능력을 통해 만들어진 물이라면 저 돌이 어제처럼 반응할지도 모르니.”
상자 속에 넣었다고는 해도 붉은 돌은 여전히 붉은 돌이었다. 미각성자인 지노 장군과 펠레타 기사들은 그 상자에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 곧 밝혀졌다.
때문에 붉은 돌이 든 상자는 키시아르가 홀로 머무는 숙소 안에 두기로 결정되었다.
“유더 아일. 상자는 자네가 들고 따라와 줬으면 한다. 다른 이들은 모두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도록. 오늘 밤 쉰 뒤 내일 도로 수도로 출발할 것이다. 이상.”
유더는 키시아르의 지시에 따라 붉은 돌이 든 상자를 품에 안았다. 무겁지는 않았지만 상자 속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기운 때문에 몸이 무겁고 피부가 따끔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