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그러면 그 사실을 어째서 비밀로 하시는 겁니까? 굳이 숨기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밝혀져서 그리 좋을 일이 없는 힘이라서 말이야. 있어도 없는 셈 치는 거라네. 차라리 처음부터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 나을 테니까.”
너무나 농담 같은 답에 유더가 의아한 기색으로 눈을 깜박이자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나와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해 몇 번이나 몸을 던져 힘을 쓰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나도 이 힘을 특별히 쓰기로 마음먹은 거야. 사실 이 힘을 썼다는 게 밝혀지면 내 부관 나단은 몹시 화를 내겠지. 어쩌면 밤 외출을 금지시킬 수도 있어. 그러니까 반드시 비밀로 해 주게. 알겠지? 우리만의 약속.”
유더는 키시아르의 어디까지가 진짜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미소를 바라보았다.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에 죽는 그 순간까지 치유의 힘을 쓰지 않는 이가 존재할까. 하지만 이미 지나간 시절의 키시아르에게 답을 물을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만 더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좋지. 내게 각성자의 힘과 신의 힘, 검사로서 쌓은 힘이 모두 존재하는지 알고 싶은 것만 아니라면.”
유더의 말문이 순식간에 막혔다. 키시아르가 재미있는 장난이 성공한 소년처럼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이곳에서 내가 신검의 선택을 받은 자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지. 신력을 쓰는 것을 보자마자 의문을 품을 것이라 짐작했다.”
세상 모든 것을 비추며 들여다볼 수 있는 태양처럼 키시아르의 붉은 눈은 인간의 머릿속을 모두 읽는 듯했다. 유더의 생각을 이미 파악했으면서도 이 순간까지 전혀 그런 냄새를 풍기지 않은 태연함이 발군이었다.
“…가능한 것입니까?”
유더는 ‘세 가지 힘’이라는 주어를 일부러 삼키며 작게 물었다. 동료들이 모두 나갔고 현재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거리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알았으나 혹시 몰랐다.
“글쎄. 어떨 것 같은가?”
“사실이라면 세상 그 무엇이 단장님께 해를 입힐 수 있겠습니까.”
그가 공격해 오는 무기를 보면서도 일부러 피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 누가 달려든다 해도 이길 수 없겠지요.”
누군가의 속을 읽는 데 대단히 능한 키시아르였으나 그 순간 유더의 검은 눈동자 속에 스쳐 지나간 과거의 편린만은 읽어내지 못했다.
“하하. 생각보다 남을 띄우는 말에 능하군. 듣기 좋은 말 같은 건 절대로 할 줄 모르는 성격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래. 자네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붉은 눈동자 위로 문득 묘한 기색이 스쳤다.
“무엇을 가지고 있든 내게는 의미 없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따위 것이 아니야.”
마치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듯한 말이었다. 유더는 또다시 대답할 말을 잃었다.
그따위 것?
한 인간이 각성 능력, 신력, 오러를 모두 사용할 수 있다는 엄청난 이야기를 두고 그따위라 표현하다니.
과거로 돌아와 다시 만난 키시아르 라 오르는 기억 속에서보다 더욱 이상하고 불가사의했다. 10년이 넘게 온갖 일을 겪으며 굴렀던 유더조차도 그의 속내를 선명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단장님께서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게 알고 싶나?”
키시아르의 눈빛에 어렸던 무심하고 염세적이던 기운이 순간 모두 사라졌다. 그는 또다시 여유롭고 나른한 공작의 얼굴이 되어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그러면 마병단장 보좌 자리를 받아들여.”
“보좌……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그런 자리는 없지 않습니까.”
옛날에 그런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키시아르는 공작 부관인 나단 주커만에게 모든 보좌 업무를 다 맡겼다. 그중 마병단과 관련한 것은 유더를 포함한 부단장들에게 맡겼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마병단장 보좌 자리라니.
“만들면 되지. 자네가 부단장 자리는 부담스러워서 싫은 모양이니,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자리를 마련할 생각을 한 것이 아닌가.”
마치 이 일을 이전부터 생각했던 양 매끄러운 말투로 키시아르가 대답했다.
“마병단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자리 정도는 금방 만들 수 있다네. 참으로 다행이지.”
“…….”
“그래서, 이것도 싫은가?”
흰빛을 내뿜는 키시아르의 손이 힘을 주어 유더의 손을 잡았다.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뿌리치거나 도망갈 수 없었다.
유더는 제가 난감해하는 것을 몹시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눈앞의 남자를 향해 다소 불경한 눈빛을 보냈다.
“저를 대체 왜 그리 높이 평가해 주시는 겁니까.”
“당연한 것 아닌가? 목숨을 노리고 달려든 이들에게 똑같이 목숨으로 갚아주는 단호함, 제 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이를 지키려 하는 뛰어난 판단력. 수없이 전장을 구른 기사만큼이나 능숙한 전투력. 대체 자네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면 나는 누구를 평가해야 하지?”
“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도 모두 같았습니다.”
“다른 단원들도 충분히 잘 해주었지. 하지만 자네가 보인 그 침착함은 단순히 몇 달간 훈련을 받았다 해서 체득할 수 없는 것이야. 나는 그 점을 높이 산다.”
키시아르의 손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멈추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유더의 손을 잡고 있었다. 거기에서는 어떠한 의지가 읽혔다. 유더는 키시아르에게 붙잡힌 손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또다시 거절한다면…….”
“그때는 마병단 훈련부관 자리를 만들겠지.”
그리고 그 제안을 거절하더라도, 다음에 또다시 비슷한 제안이 올 것이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이미 마음을 굳혔음을 깨달았다. 이전에 제안했을 때에는 반쯤 찔러 보는 느낌이 있었으나, 이번은 달랐다. 그가 또다시 마병단에 들어온 이상 단장의 뜻을 거부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그것이 진심이라면 더더욱.
“알겠습니다.”
유더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네. 자세한 건 돌아가서 이야기하지.”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풀어주었다.
“…음?”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드물게 눈을 크게 뜨고 의문에 찬 표정을 지었다. 유더 또한 당혹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건…….”
본래라면 분명 깨끗이 나아 있어야 했을 손등의 멍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 생겼던 작은 크기로 줄어들기만 했을 뿐, 그대로 피부에 남아 있는 작고 검붉은 반점을 보며 두 사람은 침묵했다.
“……평범한 상처가 아니었군.”
키시아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쩌다 다친 것인지 제대로 말하라, 유더 아일.”
상처를 입은 이유를 숨길 필요는 없었다. 유더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제 가케인의 분신이 붉은 돌을 만져 폭발했을 때, 방어벽을 치는 것이 조금 늦었습니다. 돌에서 나온 기운이 손을 뚫고 지나간 뒤 생긴 흔적이라 생각됩니다.”
“돌에서 나온 기운?”
키시아르가 눈썹을 찌푸리며 유더의 발치에 놓인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 안에서 순식간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 듯했다.
“그래……. 통증은 없다고 했나?”
“네.”
멍이 커졌을 때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유더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았다.
“그것은 그래도 다행이군. 하지만 뭔가 이상이 있다면 곧바로 보고하도록 해라. 돌아가는 대로 그 상처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 할 테니.”
“알겠습니다. 다른 동료들에게도 저와 같은 상처가 없는지 물어보겠습니다.”
“단장님, 유더!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지노 장군님께서 걱정하고 계십니다.”
그때, 때마침 가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시아르와 유더는 서로의 얼굴을 잠시 마주 본 뒤 저택 밖으로 빠져나갔다.
저택 밖에는 마병단원들과 지노 장군, 그리고 자다 말고 이곳까지 달려온 펠레타 기사들과 병사들이 서 있었다. 지노 장군이나 펠레타 기사들은 그래도 마병단원들과 비슷한 거리에 서 있을 수 있었으나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멀찍이 떨어져 이곳을 바라보는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2년이나 이곳을 지켰음에도 정작 붉은 돌을 노린 이들이 들어올 때까지 제국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키시아르가 멀쩡하여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큰 문책을 당할 일이었다. 당연히 그들을 이끄는 지노 장군 또한 안색이 무척 좋지 않았다.
“전하께서 무사하신 모습을 뵈어 기쁩니다. 하지만 흉수들이 이곳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것은 모두 저의 책임.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들이 모두 죽었으니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나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으니 장군은 괘념치 마시오. 다만 죽은 이들이 이 근처에서 며칠이나 숨어 있었다고 하니 병사들을 풀어 주변을 곧바로 수색하고, 무언가 찾아내면 즉시 알려주시오.”
“알겠습니다.”
지노 장군은 돌아서서 곧바로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이것저것 지시를 내렸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재빨리 돌아서서 사라진 뒤 키시아르는 장군을 가까이 불러 곧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대범하기 짝이 없는 적의 행보를 본 지노 장군은 키시아르를 막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곁에 남아 있던 병사 중 한 사람을 불렀다.
“당장 가서 안개질풍마들을 데리고 와라.”
깊은 밤중이었으나 떠날 준비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키시아르는 제복을 가릴 긴 망토를 두른 뒤 유더에게서 붉은 돌이 든 상자를 건네받았다.
안개질풍마 위로 가볍게 몸을 날리며 고삐를 잡아채는 그의 모습은 마치 어둠을 밝히기 위해 현현한 태양신의 화신 같았다.
“제일 앞에 서는 것은 나다. 마병단원들은 바로 뒤에 붙고, 기사들은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서 계속 따른다. 쉬지 않고 달릴 테니 방향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라.”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