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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5화 (55/805)

55화

“그러십시오.”

이전 생에서도 유더의 이름을 기억하겠다는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그중 정말로 유더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있었던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저, 저놈이 끝까지…… 주인님! 기다려 주십시오!”

하인이 기막힌 얼굴로 소리치다가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돌리는 백작의 뒤를 따라 궁내부 건물 쪽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주변을 구경하던 이들은 유더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이내 관심을 잃고 흩어져 갔다.

그러나 몇몇 이들은 여전히 남아 유더와 칸나를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유더의 앞으로 다가온 어느 노인 또한 그중 하나였다.

“이보시오. 갈론 백작가는 작위를 받은 역사가 7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본가는 4벽 안쪽 구역에 있을 만큼 제법 힘 있는 가문인데. 알고 있소?”

유더의 등 뒤에 있던 칸나가 몸을 흠칫 굳혔다. 노인의 뒤쪽에서는 그와 함께 온 듯한 유약한 인상의 젊은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들을 보고 있었다. 유더는 잠시 노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꼬리를 스르르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저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동료를 숨겨주느라 큰 적을 만들었는데 두렵지 않단 말이오?”

“굳이 말하자면 그 반대라 생각합니다만.”

“반대?”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은 고풍스러운 차림새에 위엄 있는 귀족가 수장들을 연상케 하는 묵직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주눅이 들 법도 하건만 유더의 눈빛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분이 저라는 큰 적을 만드신 것이겠지요.”

“허어. 대단한 자신감이군. 대체 무엇을 믿고 그리 말하는 것인지 물어도 되겠소?”

안 될 것이 무어 있겠는가. 유더는 서늘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물론 제가 가진 힘이지요.”

“…….”

노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잠시 후 그는 크게 감탄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신분과 세력을 넘어서는 힘이라! 그 대단한 힘, 나도 한번 보고 싶군, 부디 그 말이 허언이 되지 않길 바라겠소.”

그렇게 말한 뒤 노인은 유더의 어깨를 두드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저를 기다리던 젊은이에게로 향했다.

“스승님. 아무리 싸움 구경이 제일이라 하셨다지만 어찌 여기까지 와서 그런 일에 끼어드신단 말입니까. 제가 정말이지 부끄러워서…! 시간이 얼마나 늦었는지 아십니까. 지금쯤 이미 다른 분들은 모두 모였을 텐데……!”

“이놈이. 내가 늦는 것이 무어 대수라고 호들갑이냐. 여기에 와서 가장 재미있는 걸 봤는데 어떻게 그걸 그냥 두고 가.”

“하지만……!”

“조용히 하고 앞장이나 서거라, 이놈아.”

유더는 울상을 지은 젊은이와 노인이 서로 말씨름을 하며 사라져 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 칸나가 입을 열었다.

“유더.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유더의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칸나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꽉 잡아당겼다. 유더는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저자지? 네가 여기에 오지 않으려고 한 이유.”

“대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했어. 그분이 얼마나 집요하고 무서운 사람인지 넌 몰라!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해야…….”

답 대신 돌아온 깊은 절망감. 그것이 곧 답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내가 단장님께 말씀드릴게. 유더 넌 아무 잘못도 없다고. 그리고 나는 그분이 오기 전에 퇴단하면 되겠지…… 그래, 그거면 어떻게든…….”

“퇴단?”

유더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칸나를 향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왜 퇴단을 해.”

“하지만 들었잖아. 그분이 마병단에 오겠다고 했다고……! 너는 걱정도 안 돼?”

칸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아까 다른 분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못했어? 갈론 가가 어떤 곳인지. 거긴 무서운 곳이야. 정말로, 정말로 무서운 곳이란 말이야.”

아무래도 칸나는 갈론 가에 대한 공포심이 무척 깊어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것일까. 유더는 떨고 있는 칸나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 그녀의 시선을 도로 제 쪽으로 향하게 했다.

“괜찮아. 찾아와 주지 않는다면 오히려 실망하게 될 거야. 그러길 바라서 한 자기소개니까.”

“뭐?”

“그 가문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도 전혀 상관없어. 내가 궁금한 건 오직 네 이야기뿐이야. 칸나, 대체 너는 그 가문과 무슨 관계지?”

“그래. 나도 그 사정이 몹시 궁금해진 참이니 어서 말해 주었으면 좋겠군.”

유더의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 순간 칸나가 기겁해 뒤로 물러섰다.

“다, 단장님?”

유더는 궁중마법사들이 입는 커다란 자주색 로브를 걸친 키시아르가 나무 그늘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눈에 띄는 외모와 흰 제복을 감추기에는 걸맞은 차림이었지만, 놀라움은 그것과 별개였다. 칸나가 멍하니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대체 언제부터 거기에… 아니, 그보다 그 차림은…….”

“하하. 신경 쓰지 말게.”

“폐하와 하시던 이야기는 다 끝나신 겁니까? 상자와 마차는 어디에 두고 오셨습니까?”

그가 나타난 것에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내뱉은 유더의 날카로운 질문에 키시아르가 김이 새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자네는 뭘 해도 놀라질 않아서 영 재미가 없어. 마차야 있던 곳에 있고, 상자는 폐하께서 잠시 살피고 계시지.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나조차 파악하지 못한 단원의 비밀이 있었다는 흥미로운 정보를 좀 더 이야기하지 않겠나?”

키시아르의 웃음을 본 칸나의 얼굴이 또다시 창백해졌다.

“…저는…….”

“잠깐. 거기서 이야기하면 또다시 시선을 끌지도 모르니 일단 이쪽으로 오게. 마침 저 안에 딱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장소가 있으니까.”

키시아르는 한가로운 걸음으로 그들을 이끌고 검은 비둘기 관 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워낙 출입자가 많아 그들을 알아보거나 막는 이는 없었다.

인파에 섞여 걷고 있던 키시아르가 잠시 후 한 건물과 다른 건물 사이의 아주 좁은 틈새로 쑥 들어갔다.

겉보기에는 사람이 들어가지 못할 만큼 비좁은 듯 보였으나, 그의 뒤를 따르자 거짓말처럼 한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이 나타났다. 좁은 틈처럼 보인 것은 건물과 그늘이 겹쳐 만들어낸 착시였다.

그곳을 빠져나가자 놀랍게도 아주 작은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 건물을 새로이 만들고 끼워 넣다 보면 가끔 이렇게 다른 이들이 잘 모르는 빈틈도 생기게 마련이지.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 편히 말해도 괜찮네.”

제법 황궁 지리에 익숙하다 여겼던 유더조차 이곳은 처음 보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런 곳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잊었나? 내가 여기서 나고 자랐다는 것을. 황궁 내를 탐험하는 건 어린 시절 나의 가장 즐거운 놀이였다네.”

황궁의 범위는 2벽까지지만, 황제를 비롯한 황족들이 머무는 궁은 대부분 1벽 안에 있었다. 그런데 고귀한 어린 황자가 어찌 1벽 밖으로 나와 탐험을 하며 놀 수 있었겠는가.

기가 막힌 답변이었으나 키시아르라면 정말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점이 더욱 놀라웠다.

“단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마병단과 단장님께 폐를 끼칠 마음은 조금도 없었어요. 저는 다만…… 도망칠 곳이 필요했습니다.”

고요한 공터 안에서 드디어 칸나가 떨리는 손으로 큰 모자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그녀가 제일 먼저 한 것은 허리를 깊이 숙여 사과하는 것이었다.

“도망칠 곳이라. 갈론 가로부터 말인가?”

키시아르의 물음에 칸나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더 숨기겠어요. 짐작하실 대로 저는 갈론 가에서 살았습니다. 핸크 갈론 백작님은 본래라면 제… 아버지시겠지만, 한 번도 그렇게 불러 본 적은 없습니다.”

칸나의 이야기는 유더가 예상한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핸크 갈론이 하룻밤 손댄 하녀에게서 태어났다. 백작은 칸나에게 이름도, 성도 주지 않았다. 제 혈육으로 인지하지 않고 완전히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쫓겨날 때 받은 약간의 돈으로 7벽에 작은 집을 빌려 딸을 키웠다. 그러나 3년 전, 그 어머니도 병으로 죽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본가로 들어간 칸나는 딸이 아닌 하녀 취급을 받으며 멸시 속에 생활했다.

“그런 생활이나마 저 혼자 살아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어요. 하지만… 1년 전 각성하면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칸나의 능력은 물건의 정보를 읽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청소를 하며 만진 물건들을 통해 우연히 핸크 백작의 검은 속내를 알아차렸다. 그는 칸나를 어느 나이든 귀족의 후처로 넘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성격이 포악하고 비열하기로 이름난 그 귀족에게 간다면 칸나가 곧 죽게 될 것이라 짐작하면서도 백작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는 그렇게 해서 얻게 될 정치적 이득이 우선이었다.

그 끔찍한 속내를 읽어낸 순간 전율이 흘렀다. 칸나는 그때부터 어떻게든 백작가를 도망칠 궁리를 했다.

“처음에는 외국으로 도망치려 했어요. 하지만 그때 마병단 모집 공고가 났고… 일단 시험을 쳐 보고 마병단에 합격하지 못하면 그때 외국으로 가자고 생각을 바꾸었어요.”

하지만 칸나는 놀랍게도 합격했다. 유더의 조언 덕분이었다.

“백작님이 황궁에서 일하시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제가 황궁에 가게 되면 어디선가 마주칠지도 모른단 생각에 두려웠어요. 들키게 되면 그분은 분명 저를 알아볼 테고, 곧바로 끌고 가려 하실 테니까요. 하지만… 결국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분이 마병단까지 찾아오는 꼴을 보는 것보다는 제가 먼저 퇴단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이에요.”

칸나의 말이 끝난 뒤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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