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자네가 이렇듯 나와 취향이 맞으니 힘들게 보좌로 데려온 보람이 느껴지는군.”
“예?”
타이스 율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느라 유더는 키시아르의 말을 미처 제대로 듣지 못했다. 뒤늦게 반문하기 위해 무심코 머리를 돌렸더니, 하필이면 상대도 고개를 살짝 숙여 이쪽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멈추었다.
“…….”
찰나의 순간, 유더는 키시아르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키시아르 또한 눈을 깜박이며 유더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먼저 시선을 떼고 미소를 지은 쪽은 물론 키시아르였다.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군.”
“아, 네.”
유더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혹시 내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반하기라도 했나? 굉장히 열정적으로 쳐다보던데.”
유더가 느꼈던 이름 모를 짧은 상념은 그 순간 곧바로 깨져 사라졌다.
“아뇨. 그런 적 없습니다.”
그가 곧바로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키시아르는 건수를 잡았다는 듯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없다니. 방금 보지 않았나.”
“그런 적 없습니다.”
“그냥 부딪쳐볼 걸 그랬군. 딱 입을 맞추기 좋은 각도였던 것 같은데.”
유더는 순간 간담이 서늘해져 저도 모르게 또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칸나는 아직 뒤에서 거리를 두고 따라오며 기분 좋은 감동 속에 잠겨 있는 듯 보였다.
“아무에게나 그런 말을 하시는 건 쓸데없는 오해를 낳을 수 있으니 자중해 주십시오. 저는 단장님의 보좌입니다.”
아직 제2성을 각성하지 않은 유더를 상대로 그런 농담을 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비록 보좌 자리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그 이상은 이제 당연히 없을 것이었다. 이전과 같은 미래는 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무나라니? 섭섭한 말을. 자네가 왜 아무나인가?”
남의 속 따위는 모를 키시아르가 잠시 후 속도를 늦춰 뒤로 조용히 물러나는 유더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잘게 떨었다. 역시 그저 놀리고 싶었던 것뿐인 모양이었다.
“알겠네. 더는 안 할 테니 일부러 멀어지진 마. 방금까지는 함께 즐거운 계획을 세우며 웃지 않았나.”
“…….”
“자네를 보좌로 삼길 역시 잘한 것 같아. 우린 아마 아주 손발이 잘 맞는 한 쌍이 될 것 같군. 그렇지 않나?”
키시아르는 같은 표현이라도 몹시 묘하게 표현하는 재주가 남달랐다. 유더가 작게 한숨을 내쉬자 그는 또다시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유더는 방금 전 제가 느꼈던 알 수 없는 기분을 생각했다. 수도 없이 보았던 얼굴이었다. 이전 생에도, 그리고 다시 돌아온 지금도.
하지만 방금 보았을 때는 무언가가 달랐다.
그리 생기 넘치는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던가? 늘 미소 속에 염세적인 칼날과 눌러둔 피로함이 깃든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들여다본 키시아르의 얼굴에 그런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과거로 돌아왔으니 당연할 법도 한데, 그 당연한 사실이 충격이었다.
텅 비어버린 채 쓸쓸한 얼굴로 자조하던 꿈속의 키시아르가 또다시 떠올랐다. 죽음을 앞두고 있던 그 키시아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방금 본 것 같기도 했다.
유더는 무심코 손을 들어 제 가슴 부근을 눌렀다가 도로 떼었다.
지금 느낀 기분을 표현할 방법을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날, 칸나는 마차 안에서 동료들에게 과거를 간략하지만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내심 그녀를 몹시 걱정했던 단원들은 모두 갈론 백작에게 깊은 분노를 느꼈다. 그들은 칸나를 위로하며 모든 이야기를 비밀에 부치기로 약속했다.
키시아르는 황궁에 올 때와 똑같이 상자 안에 든 붉은 돌을 그대로 들고 돌아갔고, 다음날 모든 단원들 앞에서 각 과의 부단장과 단장 보좌를 임명했다.
“신과 부단장 에버 백. 술과 부단장 스티버 렌들리. 정과 부단장 칸나 완드. 그리고 마병단장 보좌 유더 아일. 이상의 네 사람이 앞으로 단장의 업무를 나누고 서로 돕게 될 것이다.”
부단장 세 사람 중 유더와 친분이 깊지 않은 이는 술과의 스티버뿐이었다. 하지만 유더는 이전 생의 기억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스티버는 현 단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40이 넘은 평범한 빵집 주인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그는 물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고 인망이 좋았다.
이전 생에서는 유더가 술과 부단장이었기에 그는 아무 직책도 없는 일반 단원이었으나, 술과 단원들은 유더보다 그를 더 따르고는 했다.
유더는 스티버 렌들리라면 좋은 부단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새삼 키시아르의 안목에 약간 감탄했다. 단원들 사이의 흐름이 어떠한지, 누가 어떤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지 그는 안 보는 것 같으면서도 모두 알고 있었다.
신과의 에버를 제외하면 부단장 모두 이전과 다른 인선이다. 좋은 시작이었다.
그리고 빠르게도 그날 오후, 갈론 백작가 문양이 그려진 마차가 황궁기사단 부지 내의 마병단 숙소 앞에 도착했다.
안에서 내린 거만한 귀족 신사와 그가 데리고 온 사병들이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며 유더는 가케인과 엘더 남매와 함께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그 뒤 성조차 주지 않은 서녀 각성자를 마병단에서 빼내 팔아넘기려던 어느 귀족이 한 시간 만에 엄청난 꼴이 되어 기어나간 사건은 수도 내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명예가 바닥까지 떨어져 웃음거리가 된 해당 귀족 가문이 뒤늦게 펠레타 공작과 황제에게 항의했으나 누구도 그 항의를 들어주지 않았다.
직접 보지 못한 사건을 고작 한 사람의 말만 믿고 벌을 내리라 말하는가? 그대의 말대로라면 건장한 병사 수십이 고작 마병단원 넷을 당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상대를 먼저 공격해 죽이겠다고 말한 것은 그대라 하던데, 그렇다면 이 사건은 정당방위가 아닌가? 상대가 소드마스터라 생각했다면 그대는 과연 똑같은 행동을 할 수 있었겠는가?
황제가 항의한 귀족에게 서면으로 내린 이 질타의 문장은 미지에 싸여 있던 마병단원들의 실력을 엿볼 만한 평가로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회자되었다.
그때까지 마병단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귀족들은 처음으로 등골을 타고 오르는 불쾌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 소식은 순식간에 수도를 넘어 제국 내에, 그리고는 마침내 대륙 전체로 거침없이 퍼져나갔다.
모든 것이 키시아르 라 오르와 유더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 * *
“폐하. 황후 폐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황제는 책상 앞에 앉아 한참 동안 씨름하던 종이를 놓고 시큰한 눈가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안경 사이로 피로에 젖은 눈을 감춘 그는 천년을 이어 온 거대한 오르 제국의 황제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들라 하라.”
곧 문이 열리고 옅은 금발의 여인이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몇 개나 되는 빈 찻잔과 종이, 책들이 어지럽게 널린 모습을 죽 둘러본 뒤 들으라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쉬며 황제에게로 다가왔다.
“이곳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으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청소는 자주 하시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오자마자 잔소리입니까.”
그렇게 말하기는 했으나 황제의 표정은 몹시 온화했다. 친동생 펠레타 공작에게도 보이지 않던 미소가 희미하게 떠오른 것을 보며 황후는 그의 뒤로 다가갔다. 셔츠 사이로 드러난 황제의 마른 뼈대가 그녀의 속을 상하게 했다.
“걱정이 되어 그렇습니다. 얼굴이 전보다 더 상하셨어요.”
“얼굴은 전과 늘 똑같습니다.”
“아닙니다. 정말로 상하셨어요. 제가 보낸 약초는 잘 달여 드시고 계십니까?”
황제는 자신의 어깨에 닿은 황후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느끼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육신을 갉아먹던 고통과 견디기 힘든 모욕의 시간들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물론. 누가 보낸 것인데 안 먹겠습니까. 방금 전에도 이미 먹었습니다.”
황후는 그것을 언제, 어떻게 먹었는지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걱정하는 기색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정말로 다 드셨군요.”
“언제 짐이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지요. 없었지만…….”
황후의 어깨를 감싼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황제는 천천히 손을 올려 그녀의 손을 잡았다. 황후의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으나 황제의 손은 마른 고목처럼 거칠고 시체처럼 차가웠다.
냉기에 놀랐는지 움찔 떨리는 작은 손을 느끼며 황제는 아쉬운 마음으로 손을 떼어내려 했다.
“미안합니다. 놀랐습니까?”
그러나 황제의 손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기 전, 황후의 손이 내려와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놀라지 않았습니다.”
황제는 조금 놀랐고, 그 다음에는 웃었다. 두 사람은 창가를 통해 쏟아지는 노을을 등으로 받아내며 오랫동안 그렇게 손을 잡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황후의 손에서 전해진 온기에 황제의 손이 약간 따뜻해지고 나서야 겨우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펠레타 공작이 다녀간 일은 잘 되었습니까? 어떠셨습니까.”
“아직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황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 녀석이 생각보다 의욕이 넘치는 것 같기는 하더군요. 마법사들에게 맡기기로 했던 일을 갑자기 나서서 스스로 하겠다고 하기에 조금 놀랐습니다. 무슨 바람이 든 것인지.”
“잘된 일이 아닙니까. 펠레타 공작도 분명 폐하를 걱정하고 계신 것입니다.”
“뭐, 걱정은 하고 있겠지요. 내가 겪은 일이 곧 언젠가 그 녀석에게 닥치게 될 일이니.”
“또 그런 식으로 일부러 밉게 말씀하시는군요.”
황후는 황제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사실은 누구보다 사이가 좋고 서로를 걱정하고 있는 형제면서도 황제는 결코 그것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주변에 산재한 적들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으나, 황후는 황제가 보이는 염세적인 태도를 볼 때마다 미약한 슬픔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