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68화 (68/805)

68화

“방금 데브란의 행방과 관련한 편지를 작성하여 하르탄 영주에게 날려 보낸 참이다. 답을 받고 변동 사항이 생긴다면 자네에게 전서구를 보낼 거야. 자네 또한 예상과 다른 일이 일어나면 언제든 내게 연락할 수 있도록 한 마리를 데려가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잠깐.”

유더는 돌아서려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키시아르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종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더 내리실 명이 있으십니까?”

“유더. 자네는 분명 2성 미각성자였지.”

“…네. 그렇습니다.”

키시아르의 입에서 갑자기 흘러나온 제2성과 관련한 질문에 놀라 유더는 순간적으로 답이 늦었다.

“자네와 함께 가는 가케인 볼룬발트는 알파 각성자로 기억하는데, 맞나?”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키시아르 라 오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긴장감 때문에 저도 모르게 표정이 딱딱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자네가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하나 더 생길지도 모르겠군. 착각일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지미 오커에게 최근 제2성 각성 기미가 보이는 것 같다는 보고가 있었거든.”

“지미가 말입니까……?”

“확실하진 않아. 제2성 각성 징조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적지 않나. 정말 각성 기미가 보인다 해서 곧바로 각성하는 것도 아니고.”

“아…. 네.”

유더는 경계와 걱정이 일시에 식는 것을 느끼며 허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긴장한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징조라고 해 봐야 어차피 미열이 조금 있는 정도야. 내가 보기에 그 아이가 각성할 확률은 낮아 보이지만 일단 미리 알아두고 조심하여 나쁠 것은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지미를 데려가지 않는 쪽이 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유난히도 기뻐하던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니 망설여졌다. 유더는 그가 좀 더 지미에게 신경을 쓰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가케인이나 지미나 내가 건사해야 하는 건 똑같으니.’

가케인이 알았다면 상당히 억울해했을 생각을 하는 동안, 키시아르가 유더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아직까지는 단 내에서 제2성을 각성한 사례가 없지만, 그 보고를 받았을 때 자네 말대로 미리 관련 규정을 준비하라 지시하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

유더는 순간 몹시 생경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깜박였다.

“……아, 네.”

“곧 마병단과 관련한 모든 규정이 완전히 완성될 예정이라고 하니 돌아와서 한번 확인해 보게. 일단 한 번 발표되고 나면 바꾸기 어려울 테니까.”

“알겠습니다.”

“규정이 완성되고 나면 그때부터 또 다른 시작이 될 거야. 제국법 내에 각성자 관련 법안을 만들도록 건의하고, 관련 연구를 지원할 생각이라네. 불리한 점은 미리 감추고 유리한 점을 내놓아야 앞으로 더 편해질 테니까. 자네도 더 바빠질 테니 각오해 두게.”

이전 생에서 유더는 욕심 많은 귀족들의 반대를 뚫고 제2성과 관련한 규정 및 법안을 만들게 하느라 상당한 고생을 했다.

그때는 각성자들의 능력과 신체적 변화에 대해 올바른 연구를 하는 학자도 거의 없었고, 평민 출신 오메가 단장의 힘만으로 잘못된 정보와 편견을 바로잡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고작 키시아르 라 오르 한 명이 살아 단장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손쉽게 바뀌었다. 물론 마병단을 만들자마자 시작한 것이 더 유리하게 작용했겠지만, 키시아르가 유더의 건의 이상의 미래를 내다보지 않았다면 이리 빠르게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으리라.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지만 이전에도 이렇게 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유더는 이번의 제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깊이 확신하며 머리를 가볍게 숙여 경례했다.

* * *

그 뒤 유더는 곧바로 가케인과 지미를 데리고 마병단을 떠났다. 이번에는 이전처럼 진주탑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기에 평범한 말을 타야 했다.

“최대한 빨리 갈 생각이니 휴식 시간은 최소로 잡고, 밤에도 숙소를 따로 찾지는 않을 거야. 말도 여러 번 갈아타야 할 테니까 제대로 잘 따라와.”

“알겠어.”

“저는 걱정 마세요. 예전에 마병단 시험을 치러 올 때도 혼자서 말 타고 왔거든요.”

지미가 늠름한 얼굴로 자신 있게 대답했다.

“혼자서? 대단한데? 나쁜 놈들을 만나진 않았어?”

“돈을 빼앗으려고 따라온 도적이 있긴 했어요. 물론 검으로 바위를 한 번 갈라 줬더니 꽁지 빠지게 사라졌지만요.”

가케인의 질문에 지미가 씩 웃으며 허리에 찬 작은 검을 만지작거렸다. 키시아르가 단원 개개인을 위한 무기를 준비하는 중이었기에 현재 그들이 들고 다니는 것은 모두 연습용 검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능력을 보여 주기에는 충분했으니 불만을 표하는 자는 없었다.

‘미열이 있어 보이는 얼굴은 아닌데…….’

유더는 즐겁게 말을 달리는 지미를 보며 그가 제2성을 각성할지도 모른다던 말을 떠올렸다. 제2성을 발현하기 전 일어나는 가장 흔한 신체적 변화가 바로 며칠 내내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이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니 전혀 다른 증상을 겪거나, 아예 아무런 전조증상도 없이 발작처럼 2성 발현을 하는 이도 있기는 했다. 유더는 후자에 해당했었다.

‘내가 각성했던 시기도… 이전과 똑같다면 얼마 남지 않았어.’

전조증상 없이 갑작스레 찾아온 발현이 그의 인생을 얼마나 많이 바꾸었었던가. 이번에는 이전과 같은 일을 겪지 않도록 최대한 미리 준비를 해 둘 생각이었다.

“가케인. 가는 동안 지미를 잘 살펴줘.”

지미가 조금 앞서 나간 틈에 가케인에게 다가간 유더는 나란히 말을 달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응?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단장님께서 저 아이에게 제2성 각성 전조증상이 조금 느껴진다고 하셨어. 나는 아직 미각성이라 잘 모르지만 너는 나보다 잘 볼 수 있을 테니까.”

“아. 그래? 단장님께서?”

가케인이 눈을 크게 뜨고 지미의 뒷모습을 보았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아무튼 알겠어. 잘 살펴볼게.”

“뭔가 느껴지면 곧바로 말해줘야 해.”

유더의 말안장 옆에는 손바닥만큼 작은 새장이 하나 걸려 있었다. 흔들리는 진동에도 아랑곳없이 조그만 횃대를 꽉 붙잡고 편안하게 졸고 있는 비둘기가 바로 그가 가져온 연락용 전서구였다.

가케인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지미가 각성할 확률은 정말로 몹시 낮아 보이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 아이가 알파로 각성한다면 몰라도 오메가로 각성한다면 알파인 가케인이 영향을 받을 수도 있었다.

‘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더 주의깊게 지켜볼 테니까.’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격리만 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조차 끝을 다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힘을 숨기고 있는 키시아르라면 몰라도, 가케인과 지미 정도의 실력이라면 유더 혼자서 얼마든지 격리시킬 자신이 있었다.

‘검술에, 각성에, 신력……. 어쩌면 거기에 뭔가 더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괴물 같은 이가 두 명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지.’

어느 정도 키시아르의 힘을 알고 있는 지금도 사실 그가 낼 수 있는 능력의 끝이 어디까지인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유더는 거기까지 생각하다 고개를 저어 쓸데없는 생각들을 떨쳤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일들부터 생각하자.’

그들은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말을 달렸다. 중간에 탈진하는 말이 나오면 근처 마을에서 급히 빌려 갈아치웠다.

출발 전 키시아르가 내준 통행증이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황제의 명을 급히 전달하는 전령들과 같은 대우를 받아 어느 마을에서든 경비대나 영주들이 키우는 말을 쉽게 빌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반인이라면 견디지 못했을 일정이지만 각성자인 그들에게는 평소 받는 훈련보다도 약했다. 지미조차도 힘든 기색이 전혀 없었다.

“지미. 네 고향이 데브란의 고향 근처라며? 정확히 얼마나 가까운 거야?”

가케인은 말을 달리며 지미에게서 동부 지역과 관련된 정보를 여러 가지 물었다. 지미의 부모는 동부 지역에서 이름이 제법 난 상점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아들인 그도 덩달아 주워들은 것이 많아 도움이 되었다.

“몇 시간도 안 걸릴걸요? 하르탄에서 제가 살던 마을로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꽤 많았거든요.”

지미는 하르탄을 정말 작고 보잘것없는 마을이라 평했다. 상점도 거의 없고, 시장도 잘 서지 않아서 그곳에 사는 이들이 무언가를 사려면 다른 마을에 가야만 했다.

“그곳 영주님은 아주 나이 드신 분이라고 들었어요. 영주민들에겐 크게 관심이 없으시고 결혼한 딸이 하나, 아들이 둘 있다고 했던 것 같아요.”

“현 영주가 돌아가시면 다음 영주 자리는 누가 물려받게 되는 거지?”

“첫째인 분이 무조건 물려받으신다고 하던데요. 결혼한 따님이 장녀시라니까 그분이 오셔서 받아가지 않으실까요?”

“남부와는 분위기가 꽤 다르네.”

남부 출신인 가케인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살던 지역은 부모님이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막내에게 물려주게 되거든. 작위든, 뭐든.”

“와. 그쪽이 더 신기한데요. 그러면 먼저 태어난 자식들은 어떻게 해요?”

“먼저 태어난 녀석들은 자라는 동안 더 많은 지원을 받고 이미 자리를 잡아 독립하는 경우가 많잖아. 하지만 제일 나중에 태어난 녀석에겐 부모님 말곤 뭐가 있겠어. 그러니 손윗형제들이 양보하는 게 옳지 않아?”

가케인의 말에 지미가 입을 벌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그렇게 들으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네요?”

“하하. 나중에 한 번 놀러와. 깜짝 놀라게 될 테니까.”

“그럴게요.”

완전히 사이좋은 형제처럼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유더는 주변을 살폈다. 최대한 빠른 길로 오느라 안전한 무역로를 벗어났더니 주변이 몹시 어둡고 분위기가 스산했다. 그래도 이 길이 가장 빠르다고 알려준 것은 지미였다.

‘바닥과 주변 정리가 잘 된 걸 보면 사람이 다니는 길이 맞기는 한 것 같은데 이렇게 아무도 없는 건 좀 이상하군. 꼭 뭐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이놈들, 거기 멈춰라!”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