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알겠습니다. 하지만 오래 기다리기는 힘들 것 같군요. 배가 너무 고파서 말입니다.”
“집사! 손님들을 응접실로 안내하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차려드려라. 어서!”
자카일이 신경질적으로 외치자 겨우 문밖에서 고개를 내민 늙은 집사가 허둥지둥 ‘예!’ 하고 대답했다. 자카일은 겨우 무뢰한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빠르게 얼굴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이제야 그의 세상이 될 줄 알았는데, 첫날부터 이게 무슨 일인가. 싸늘한 예감이 자카일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운이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 더 그렇게 된다. 좋게 생각해야 해.’
펠레타 공작의 명을 받고 온 마병단원들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방문 목적은 예상이 갔다. 곧 그런 이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그들도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단지 예상보다 조금, 아주 조금 더 빨랐을 뿐이었다.
자카일은 깊이 심호흡을 한 뒤 응접실로 나갔다. 그가 준비하는 사이 불청객들은 불에 타지 않은 고급 의자에 앉아 게걸스레 음식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유더. 이것 좀 먹어 봐. 처음 먹어 보는데도 맛이 괜찮은데?”
“그렇죠. 그게 동부 특산 코아캇 요리예요. 스튜에 넣어서 먹으면 맛있다구요.”
먹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요리사가 아무리 서둘러 그릇을 내와도 순식간에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눈앞이 조금 아찔했다. 자카일은 겨우 큰 소리로 헛기침을 하여 불청객들의 시선을 돌렸다.
“음식은… 입에 맞는 모양이니 다행이오.”
“예. 덕분에.”
자카일을 기다리며 앉아 있던 유더가 여유롭게 대답했다. 마치 그가 집주인 같은 모습에 자카일의 눈가가 씰룩이며 경련을 일으켰다.
“이제 먹을 만큼 먹었… 다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아, 그러고 싶었는데 새로운 요리가 나왔군요. 여기까지만 먹고 하지요.”
유더는 딱 좋은 타이밍에 새로운 요리를 내온 요리사를 보며 눈짓을 했다.
자카일을 보며 어쩔 줄 모르던 요리사가 눈치를 살피며 새 요리를 테이블에 내려놓자, 순식간에 지미와 가케인이 포크를 들고 달려들었다. 나한 또한 태연한 얼굴로 순식간에 그릇 안에서 큰 고기 덩어리를 떼어내 제 앞으로 옮겨 먹어치웠다.
일부러 예의 따위는 느낄 수 없는 모습으로 잘 먹어 달라 부탁한 것을 충실히 지켜주는 그들의 모습에 유더는 상당히 흡족함을 느꼈다.
본인이 귀족이라는 사실에 같잖은 자부심을 느끼는 이들일수록 이런 모습에 약했다. 그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보고도 억지로 참아야 했던 적이 없었으므로.
“이거 정말 맛있네. 소스에 졸여 구워낸 게 아주 일품이야. 앞으로 동부 요리에 빠질 것 같은데? 유더, 정말 더 안 먹을 거야?”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라고는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 모습으로 구운 야채를 우적우적 씹어먹은 가케인이 고기 요리 하나를 포크로 찍어 유더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자, 아.”
“아니 저런…….”
평민들도 타인 앞에서는 하지 않을 몹시 낯부끄러운 행위에 주변 하인들의 안색이 변했다. 아주 확실하게 복장이 뒤집어진 모양이었다.
‘가케인. 이런 걸 굉장히 잘 하는군.’
역시 귀족들에 대해 잘 아는 놈이니 이런 것도 잘하는 모양이다. 유더는 가케인의 새로운 재능에 내심 감탄하며 그에게 장단을 맞추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입을 벌려 그가 내민 고기를 받아먹자 가케인이 기쁜 표정으로 크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장미처럼 화려한 미남이 진심 가득한 미소를 짓자 순식간에 주변 온도가 몇 도쯤은 올라가는 듯했다.
“맛있지?”
“…음.”
“유더 형! 제 것도요! 이것도 꼭 드셔야 해요!”
유더는 지미가 내민 요리도 한 입 받아먹었다. 사실 이미 배가 부른 상태였지만 눈앞의 인간들에게 더한 불쾌감을 줄 수 있다면 더 못 먹을 것도 없었다.
요리사가 새로 준비해 온 요리는 그렇게 순식간에 동이 났다.
“이제… 치우고, 이야기를 해도 되겠소?”
함께 앉기도 싫다는 듯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던 자카일이 그제야 찌푸린 얼굴로 말을 걸었다. 힘겹게 말을 잇는 그의 얼굴에 가득한 혐오감을 보며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유더는 테이블이 치워지는 동안 자카일에게 간략히 그의 이름과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더가 데브란 하르투데를 찾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는 말을 하자 자카일은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데브란 하르투데라… 그래. 그런 이름을 지닌 자가 얼마 전 찾아왔었지. 기억하고 있소.”
“그렇다면 이야기가 빨라지겠군요. 데브란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죽었소.”
“예?”
반문한 것은 유더가 아니었다. 사나운 표정을 지은 가케인이 자카일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데브란이 죽었다뇨.”
“말 그대로요. 그자가 이 평화로운 하르탄을 모조리 불태워버리려 했던 것은 알고 있소?”
“오면서 들었습니다. 하지만 데브란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왜 가족들이 있는 소중한 고향을 불태우려 했겠습니까?”
“그건 나도 모르지. 나는 그때 다른 마을에서 아버님의 심부름을 하고 있었소. 그러니 내가 아는 것은 화재 사건이 일어난 뒤 마을로 돌아와 들은 것들 뿐이오.”
그렇게 말한 뒤 자카일은 잠시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말을 고르는 듯 신중한 모습이었다.
“그자는 가족들을 스스로 죽이고 이 성으로 달려와 큰 불을 불러냈소. 몸이 좋지 않던 아버님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셨고, 아버님을 구하려 했던 누님과 매형도 그만 변을 당하셨지. 형님은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어 곧바로 이곳으로 오시지 못했는데 어제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급한 부름을 받고 돌아가야만 했소. 며칠 뒤 다시 돌아올 것이라 말씀하셨지.”
거기까지 말한 뒤 그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보아도 가족을 잃은 사고로 혼란스러워하는 귀족 젊은이다운 얼굴이었다.
“가문의 일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막내아들인 내가 혼자서 뭘 할 수 있겠소? 겨우 영주민들을 모아 장례식을 마무리한 것이 전부요. 형님이 돌아오시면 일을 의논해 수도에 보고를 올리려 했는데… 설마 이리 빨리 그쪽에서 먼저 찾아와 줄 줄은 몰랐군.”
“사정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데브란이 왜 죽었는지는 아직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군요.”
유더의 침착한 답에 자카일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까지 듣고도 짐작가는 바가 없소? 그자는 어제 자결했소. 사형을 선고받고 나서 모든 걸 포기한 모양인지, 감옥에서 곧바로 죽어버렸지. 아무리 사형수라고는 해도 펠레타 공작 전하의 소속이라 하니 보고를 먼저 하고 나서 형을 집행할 예정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나도 골치가 아프단 말이오.”
자카일의 말에 허점은 없었다. 모든 것이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단, 데브란이 가족을 죽이고 불을 지른 이유가 뭔지 비어 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지…….’
유더는 자카일의 피곤해 보이는 얼굴 속에서 숨겨진 속내를 읽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자카일 님의 형님께서 돌아와 영주 자리에 오르신 뒤에야 보고 및 뒷수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예정이라는 말씀이시지요.”
“아니, 그건 아니오.”
유더의 질문에 자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형님이 돌아오신 뒤 보고와 수습을 의논해 진행할 예정은 맞지만, 영주 자리에는 아마… 내가 오르게 될 거요.”
그렇게 말한 뒤 자카일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형님은 지금 몸담고 있는 은십자 기사단에서 이미 자리를 잡으셨소. 젊은 나이시지만 실력이 뛰어나 벌써 부단장 자리에 올랐고, 몇 년이 지나면 단장이 되어 남작 작위를 하사받게 될 거라고들 하더군. 그런 위치에 오르셨으니 이런 작은 영지의 영주 자리 따윈 오히려 형님께 족쇄가 될 거요.”
“대단하신 분이셨군요.”
“그렇지. 형님은 예전부터 이 작고 지루한 곳을 떠나 뛰어난 기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 말씀하셨소. 그러니 남게 될 것은 내가 아니겠소. 나와는 아주… 다른 분이니까.”
자카일이 처음으로 찌푸린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유더는 그의 눈빛 속에서 동경과 질투를 읽어냈다.
‘질투라…….’
자카일 하르탄. 전 영주의 막내아들. 동부의 관습대로라면 그는 본래 귀족이란 신분 이외에는 상속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쭉정이 같은 위치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며칠 전 일어난 화재 사고로 인해 그는 순식간에 영주의 자리를 갖게 되었다.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이득을 본 것은 오직 자카일 하르탄뿐.
이것이 과연 그저 우연이 겹쳐 일어난 일일까.
‘아니.’
유더는 경험을 통해 자신했다. 그럴 리 없다. 눈앞의 남자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그 속에는 분명 사라진 데브란의 행방 또한 포함되어 있으리라.
‘하지만 쉽게 말해 주지는 않을 테니, 일단 좀 더 살피며 기다려 봐야겠군.’
유더는 생각을 정리한 뒤 자카일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말씀은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도 펠레타 공작 전하의 명을 받고 온 입장이 있어 곧바로 돌아가기는 어렵겠습니다. 저희가 좀 더 조사한 뒤 공작 전하께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유더는 일부러 단장이라는 호칭 대신 공작 전하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과연 그것이 잘 통했는지 자카일의 얼굴 위로 어려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동부에서 황제와 그의 동생 펠레타 공작의 위신이 낮다 해도, 그들의 고귀한 신분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다. 자카일과 같은 낮은 귀족은 저보다 높은 귀족의 이름 앞에서 주눅이 들 수밖에 없으리라. 이전 생에서 배운 귀족의 생리 중 하나였다.
“……마음대로 하시오. 일단 영주민들에겐 협조하라 말해둘 테니.”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이곳에 잠시 머물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