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나한이 살짝 손을 쥐었다 펴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모습이 기절한 이들 중 한 명으로 변화했다. 유더는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없었으나, 낯선 옷을 걸친 듯 보이는 제 몸을 내려다보며 제대로 환상 능력이 덧씌워졌음을 알아차렸다.
두 사람은 기절한 이들의 소지품을 옷 안에 넣고 물통을 든 채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는 한 치 앞도 안 보일 것 같았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생각 외로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인공적으로 파낸 것이 분명한 길을 따라 들어가고 있으려니 갑자기 안에서 누군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처음 보는 사내였다.
“응? 뭐야 너희들. 물 뜨러 나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들어왔어?”
유더는 일단 대꾸하지 않았다. 나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사내는 무시를 당했다 여겼는지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아, 알겠다. 물은 뜨지도 않고 또 연초만 피우고 들어온 게지? 잘 걸렸다. 내 오늘에야말로 드디어 관리관님께 네놈들이 얼마나 쓸모없는 놈들인지 알려드릴 수 있겠어! 물통을 어서 보여 줘! 내놔!”
사내가 팔을 걷어붙이고 씩씩대며 다가왔다. 유더는 살짝 능력을 써서 나한과 자신이 들고 있던 빈 물통 안에 순식간에 물을 채웠다.
예고도 없이 무거워진 물통 때문에 나한이 휘청댔다면 곧바로 들켰겠지만, 그는 유더 쪽만 한 번 흘긋 돌아보았을 뿐 미동도 없이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까짓 능력 좀 쓸 수 있답시고 뽑혔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너희가 뭐 그리 대단한 줄 알아? 너흰 저 안에 처박힌 놈들하고 다를 게 없어! 하나같이 거짓말만 일삼는……!”
기세등등하게 다가오던 사내가 물이 가득 차 찰랑대는 물통을 보고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어?”
“이제 가도 됩니까?”
그가 멍해져 있는 사이 유더는 재빨리 낮은 목소리로 퉁명스러운 척 반문했다.
“어… 어어. 어떻게 그 짧은 사이에 물을…….”
“가자.”
사내의 얼빠진 표정을 뒤로하고 유더는 도로 물통 안에 든 물을 없앴다. 이후로도 사내와 비슷한 이들이 몇 명 더 나타났지만 그들이 가짜임을 알아본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더는 그들을 한결같이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을 통해 이곳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얻었다.
이 동굴 안에는 현재 각성자들이 여럿 갇혀 있었다. 관리관이라 불린 이는 그 각성자들을 ‘선별’ 한다고 했다. 유더와 나한이 변장한 이들은 위험한 일을 하는 관리관을 보호하고자 특별히 고용된 각성자들이었다.
‘드러난 정보만으로도 이곳이 보통 장소가 아니라는 건 이제 확실하군.’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유더는 내심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이전 생에서도 각성자들을 노예처럼 부려먹는 귀족들이 없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타국에서 능력 있는 노예를 사들이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여겨졌기에 그저 침범할 수 없는 높으신 분들의 은밀한 사생활로 취급되었다.
각성자가 세상에 드러난 지 2년 정도밖에 안 되었던 이 시간대에 이리 대대적으로 각성자들을 잡아들인 가문이 있었다는 말은 이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선별이라. 선별한 각성자들을 데려가서 뭘 어쩌려는 거지. 이전 생에서 아페토 가는 줄곧 친황제파였고 각성자 관련으로 큰 사건을 일으킨 적도 없었는데…….’
과연 아페토 가만 이런 일을 하고 있었을까? 유더는 나한이 ‘동부에서는 각성자들이 누명을 쓰고 잡혀갔다가 실종되는 일도 잦다’던 말을 했던 것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그렇게 잡혀간 이들도 이 비슷한 일을 겪고 있다면, 적어도 동부 지역에서 각성자 대상으로 2개의 공작 가문이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키시아르는 이 일을 알고 있었을까.’
알았다면 그의 성격상 분명 유더를 보내기 전 언급했을 테다. 키시아르보다 수년을 더 살았던 유더조차 이전 생에는 이런 일이 일어났던 줄 몰랐으니 그도 몰랐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는 것은 한가지 가능성을 추측하게 했다.
‘이렇게 각성자들을 납치했음에도 그들이 목적했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혹은 생각보다 금방 이루어진 바람에 더 이상 이런 곳을 유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금방 접었을 경우.’
이전 생에서 유더가 직접 파견된 임무는 거의 가장 위험한 몬스터 처리나 반역도 사살 및 생포뿐이었다.
단장이 된 이후 황제는 유더에게 자신이 명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갖지 말라 말하였고, 허락 없이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엄격히 금했다.
사실 그 명이 아니더라도 유더는 마병단이라는 대륙 최고로 위험천만한 집단을 건사하느라 시선을 다른 곳에 돌릴 여유가 없기도 했다.
그가 외부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단장 자리에 오르고 나서도 몇 년이 훌쩍 지난 뒤 세계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어떤 뒷배와 목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게 되었을 때였다.
이전 생에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사각지대에서 이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갈림길이군.”
생각에 잠긴 채 걷고 있는 유더에게 나한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의 말대로 눈앞에 두 갈래 갈림길이 있었다. 이전에 거쳐 온 이들이 말해 준 정보에 의하면 왼쪽은 감옥으로, 오른쪽은 관리관과 다른 이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통한다고 했다.
“왼쪽으로.”
유더는 망설임 없이 방향을 정한 뒤 동굴 벽 바닥을 더듬어 조약돌 몇 개를 더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감옥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급하고 길이 유난히 구불거렸다. 빛을 내는 마정석도 거의 붙여두지 않아 몹시 어두웠기에 벽을 짚고 나아가야만 했다.
“누구냐?”
얼마나 걸었을까. 통로 중간에 앉아 있던 세 명의 각성자와 마주쳤다. 그들 또한 아까 마주쳤던 관리관의 부하임을 알아차린 유더는 낭패를 느꼈다.
‘분명 이 겉모습 주인들과 서로 아는 사이일 텐데… 곧 들키겠군.’
들키면 기절시키면 그만이지만, 각성자들을 상대로는 한 방에 성공하지 못할 경우 시끄럽게 소요가 일어날 수 있어 까다로웠다.
유더가 여차하면 주머니에 든 돌을 던질 생각으로 손을 움찔거렸을 때, 앉아 있던 각성자들이 무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2호, 4호. 교대 시간도 아닌데 벌써 왜 왔어? 그 물통은 또 뭐고.”
“연초를 피우러 간다더니 설마 또 그 빨간 머리 늙은이가 시비를 건 거야?”
‘이 녀석들… 서로 이름을 안 부르나? 다행이군.’
유더는 꽉 잡았던 물통에서 힘을 풀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뭐,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미친 늙은이. 우리라고 좋아서 여기에 있는 줄 아나. 언제 날 잡아서 여기 뜨기 전에 꼭 죽여 버리고 싶어.”
“일진도 사납지. 하필 오늘 같은 날 죽도록 싸우고,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이런 볕도 안 드는 지하에 갇혀 있을 건 또 뭐야.”
“그러니까 말이야. 나는 아까 베인 팔이 아직도 아픈데.”
입을 열 때만 기다렸다는 듯 세 명이 일제히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두운 통로 안쪽에서 짐승의 억눌린 신음 같은 것이 작게 몇 번 들려왔다. 각성자들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지만 유더는 그 소리가 몹시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저게 무슨 소리지 3호?”
“난 1호야. 3호는 관리관님 곁에 있잖아.”
서로 떠드느라 유더의 말에 관심이 없는 이들의 시선을 끌고자 대충 번호를 찍었는데 불행히도 하필 여기 없던 이를 부른 모양이었다. 유더는 곧바로 태연하게 말을 바꾸었다.
“미안. 내가 어두운 곳에서는 앞을 잘 못 보는 증세가 있어서. 그래서 저게 무슨 소리지 1호?”
“무슨 소리긴. 2호 너도 나가기 전에 계속 들었잖아. 아까 잡아 온 그 공작가 도련님이 낑낑대는 소리야. 그런데 네게 그런 병증이 있었던가?”
아, 내가 2호인가. 유더는 제가 뒤집어쓴 자의 호칭을 대충 기억해 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번에도 말했잖아. 기억 좀 해 줘. 그럼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놈이 계속 저러고 있는 거라고?”
“그렇다니까. 지겨워 죽겠어. 저 자식은 포기도 모르나? 어차피 죽을 거 기운이나 아끼고 있지 정말 저기 갇힌 놈들 중 역대 최고로 지랄 맞은 놈이야.”
“관리관님 명만 아니었어도 가서 주둥이를 지져 버렸을 텐데.”
키올레 다 디아카는 아무래도 오늘 처음 만난 타인에게조차 한 조각의 동정조차 사지 못한 모양이었다.
‘대단하다면 대단하군.’
계속해서 이어지는 키올레의 음산하고 처절한 신음 덕분에 각성자들 간의 분위기는 도리어 한결 유해졌다.
세 명의 각성자는 이제 더 이상 유더와 나한을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유더는 그들의 별 것 아닌 잡담에 대충 맞장구를 치는 척하다,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한 척 안쪽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엇, 저 녀석이 설마?”
“응? …억!”
“뭐야……욱!”
열의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다행히 각성자들은 잘 속아 넘어갔다. 일제히 놀라 고개를 돌린 각성자들의 뒤통수에 3개의 돌이 사이좋게 날아가 박혔다.
유더는 소리도 못 낸 채 고꾸라진 3명의 각성자들을 내려다보며 여태 조용히 서 있었던 나한에게 눈짓을 했다.
“4호. 주머니 빨리 뒤져.”
“4호인가.”
“내가 2호라니까 네가 4호겠지.”
무어라 한마디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나한은 별말 없이 무릎을 꿇고 각성자들의 주머니를 뒤져 열쇠 꾸러미를 찾아냈다. 유더는 그것을 건네받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단단한 쇠문이 달린 작은 방 여러 개가 나타났다. 위쪽에 쇠창살을 달아 안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만든 곳이었다.
키올레의 억눌린 비명은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에서 들려오는 중이었다.
‘저기는 가장 나중에 살피고, 바깥쪽에서부터 누가 갇혀 있는지 봐야겠군.’
슬쩍 다가가서 살펴본 가장 가까운 감옥 문 안쪽은 너무 어두워서 누가 있기는 한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작은 호흡 소리나 기척으로 볼 때 생각보다 적잖은 이들이 갇혀 있는 것은 확실했다.
유더는 스산하기 짝이 없는 감옥 문들을 둘러보다, 목소리를 내어 이곳까지 찾아온 목적인 마병단원의 이름을 불렀다.
“데브란 하르투데. 데브란 하르투데가 여기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