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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86화 (86/805)

86화

“친구를 만드는 능력.”

그게 무슨 능력인지 유더는 곧바로 파악할 수 없었다. 시간을 거슬러 다시 돌아왔음에도 처음 들어보는 능력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유더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겁이 난 것처럼 나한의 뒤에 슬쩍 숨었다.

“그래. 아무튼 동료를 찾았다니 네 목적도 이걸로 달성이겠군.”

유더는 나한이 이대로 동료를 데리고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이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시기였다. 이때를 놓치면 다른 이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탈출할 기회가 없었으니까.

“맞아. 하지만 이번에는 널 끝까지 따라가 볼까 하는데.”

그러나 나한은 예상과 다른 말을 했다.

“구경꾼은 필요 없어.”

“여기까지 함께 온 조력자지. 구경꾼이라니 조금 섭섭해지는 말인걸.”

대체 저놈은 무슨 생각일까. 유더는 이제까지 중에서 가장 나한이 수상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굳이 적을 한 명 더 늘릴 필요는 없었으니 일단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고 물러서기로 했다.

“방해가 된다면…….”

“절대 안 될 거야. 여태까지처럼.”

말만은 번지르르하게 잘 했다. 유더는 그를 무시하고 마지막 남은 감옥으로 향했다. 열쇠로 문을 열자 안에 평범한 밧줄로 묶여 있던 남자가 분노에 찬 눈을 들었다.

“으… 으으읍……!”

당연히도 그는 마지막까지 방치되어 있었던 키올레 다 디아카였다.

그가 무어라 외치고 싶은 듯 억눌린 소리를 냈으나 재갈 때문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말은 하나도 없었다. 유더는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키올레 다 디아카.”

처음 마주쳤을 때 이후 굳이 기억하지 않고 잊으려 했던 이름을 기어이 머리에 새기게 만들다니, 그도 어느 의미로는 대단했다.

“재갈을 풀어줄 텐데 고함을 지르거나 쓸데없이 큰 소리를 내서 바깥의 시선을 끌면 그 즉시 기절시키겠습니다. 알아들었으면 잘 보이게 고개를 끄덕이십시오.”

“으으으읍!!”

키올레가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몸부림을 있는 힘껏 치며 머리를 뒤틀었다. 아무래도 유더의 말을 알아들은 기색은 없어 보였다.

“그 사람을 꼭 구해 줘야 하는 건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한이 무관심한 눈빛으로 물었다.

“같은 힘을 지닌 형제, 자매도 아니잖아. 굳이 구해 주어야 할 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으읍!! 읍!”

키올레가 분노에 찬 얼굴로 나한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의 말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부정은 못 하겠군.’

키올레를 구해 준다 해서 과연 고맙다는 말 한마디라도 들을 수 있을까. 당장 주먹을 쥐고 달려들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유더는 그가 죽는 것만은 막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게 무엇이든, 과거와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만은 일단 막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죽으면 아페토 가에서 마병단 쪽에 키올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덮어씌울 수도 있지.’

만에 하나라도 마병단에 피해가 오는 방향은 피해서 가야만 한다. 때문에 유더는 키올레를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다.

“계속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으, 읍! 읍!!”

“싫습니까? 그냥 두고 갈까요?”

“우웁!”

키올레가 유더를 찢어 죽이고 싶은 듯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조용히 하시길 바랍니다.”

유더는 키올레를 일으켜 세우지 않고 바닥에 누워 있는 그대로 입을 막은 재갈만 턱 아래로 살짝 내렸다. 그러자마자 곧 분노가 가득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 마병단의 그놈이지.”

다행히 고함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나은 것 같지도 않은 말이었다. 유더가 대답 없이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기침을 몇 번 토한 키올레가 이를 갈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네놈을 다시 만날 때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를 거다. 네놈 때문에 이 시골까지 쫓겨나 머저리 같은 놈들 사이에서 감시받으며 얼마나 굴욕적인 일들을 겪었는지 모르겠지.”

“그게 저 때문이란 말입니까?”

“그래! 네놈이 비겁한 방식으로 내 명예를 실추시키는 바람에 나는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었어. 심지어는 아버지께서도 한동안 얌전히 훈련이나 하고 돌아오라는 말을 하시며 내쫓으셨지. 그런 일은 처음이었어. 내 말은 아무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고!”

‘생각보다 디아카 공작이 저 녀석을 아끼는 모양인데.’

키올레는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했으나, 유더는 그의 말 속에서 정반대의 뜻을 읽어냈다.

아페토 가 관리관과 했던 말을 떠올려 보면 키올레는 아마 디아카 공작의 막내 자식일 것이다. 이전 생에 모셨던 황제가 디아카 가의 핏줄이었던 탓에 유더는 디아카 가의 분위기를 다른 공작 가문들보다 조금 잘 아는 편이었다.

디아카 가는 그야말로 극도로 ‘귀족적인’ 가문이었다. 그들은 그저 가문의 이름 아래 엮였을 뿐, 가족과 친척이라 할지라도 서로 그다지 정이 없었다.

유더는 이전 생에서 현 디아카 공작을 몇 번 마주쳤었지만, 그는 인간이라기보다는 노회한 늙은 너구리라는 별명에 더 어울리는 귀신 같은 노인이란 인상만이 강하게 남았다.

현 공작은 유더가 단장 자리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병으로 사망했지만 이후 후계자가 되어 작위를 이은 장자 또한 그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황제는 저를 밀어 준 인연으로 디아카 가를 다른 가문보다 조금 더 가까이했지만, 그들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그 거리감을 그들은 귀족적이고 디아카답다고 말하고는 했다.

그런 디아카 가의 늙은 공작 아래서 저렇게 제멋대로 구는 아들이 나온 데다 사고를 여러 번 쳤음에도 제대로 혼을 내지 않고 훈련이나 보내다니, 솔직히 말해 약간 신기할 정도였다.

‘막내아들이라더니, 그저 귀여워하며 기른 건가.’

하지만 어찌 됐든 키올레는 이전 생에도 결국 일찍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 지금처럼 산다면 이번에 유더가 그를 구해 주더라도 그 미래가 그리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냐? 당장 이 결박을 풀어!”

유더는 소리를 지르는 키올레를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 무례한 놈, 감히 한숨을 쉬어?”

“풀어주면 그 다음에는 뭘 어쩔 셈입니까?”

제 고함에 조금도 겁먹지 않은 티가 나는 나직한 질문에 키올레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는, 이내 독기 서린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당연한 걸 묻는군. 네놈을 무릎 꿇릴 거야.”

“어떻게 말입니까. 지금 당신에겐 무기도 없는데.”

유더는 키올레의 텅 빈 허리춤을 지적했다. 그러자 그제야 제가 무기를 빼앗긴 것을 기억해냈는지 키올레가 입을 벌리고 제 허리춤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그, 건. 아페토의 개들을 때려눕히고 도로 되찾아 와야…….”

“그러니까, 무기가 없는데 그건 또 어떻게 하실 겁니까.”

“네놈들이 할 거잖아! 아닌가? 아까 갇혀 있던 다른 죄수들을 전부 탈출시키는 걸 분명히 들었는데!”

“저흰 안 해도 상관없습니다만?”

유더는 일부러 거짓을 말했다.

“솔직히 저는 여기서 당신을 내버려 두고 탈출하면 그만입니다.”

“뭐, 뭐라고? 네놈이 그러고도……!”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혼자서 아페토 가의 사람들을 무기도 없이 모두 물리치러 가실 겁니까?”

“그래!”

키올레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검 따위는 누구든 때려잡아 빼앗으면 그만이야! 그러니까 풀라고!”

“그게 전부인가?”

유더는 그쯤에서 존댓말을 그만두었다.

“뭐?”

“고작 그 정도 상황 판단이 네 전부냐고 물었다. 키올레 다 디아카.”

“네놈… 황궁기사단 상급기사인 내게 감히 평민 주제에……!”

“그 평민보다도 약해 빠져 2번이나 기절하고, 실력 차를 인정하지 못해 추하게 행동한 쪽은 누구지? 네 꼴을 봐라. 판단이 그 정도로 안 되나?”

아마 태어나서 면전에 대고 이 정도로 차가운 말은 처음 들어보았을 것이다. 키올레는 평민 출신이 내뱉은 폭언에 분노로 정신이 나갔는지, 아니면 놀란 것인지 모를 얼굴로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얼어붙었다.

“멍청한 판단으로 동료의 목숨까지 잃고도 전혀 반성이 없군.”

“동료? 동료라니. 누가!”

키올레가 그제야 발악처럼 고함을 지르며 몸을 꿈틀거렸다. 그는 간신히 바닥에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러나 흙투성이가 되어 더러워진 몰골로 유더를 올려다보는 얼굴에서 전과 같은 ‘귀족적인’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죽은 파비엘을 말하는 거냐 지금?”

“그래.”

“오다가 아페토의 개들에게 주워듣기라도 했나 보지? 하. 그 배신자가 내 동료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그 녀석은 나를 배신하고 저 혼자 살겠다고 적에게 투항했어. 죽은 것도 당연한 일인데 그게 왜 내 탓이 되는 거지?”

“네 탓이 아니면 그럼 뭐야.”

표정의 변화 없이 대답하는 유더의 눈빛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네 동료였어. 적어도 널 믿고 그 자리까지 갔겠지. 네겐 스스로의 목숨과 동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좀 더 나은 판단을 할 길이 얼마든지 있었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 판단을 할 시간에 분노를 해소하는 데 눈이 멀어 모두를 위험에 빠트리고 결국 스스로도 죽을 상황에 몰렸어. 그런데도 그가 너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고?”

“닥쳐! 네가 뭘 안다고! 죽음이 두려워 배신하고 나를 모욕한 녀석을 내가 돌봤어야 한다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키올레 다 디아카는 그저 아집에 가득 차 주변을 보지 못하는 어린아이와도 같다. 그는 결코 남의 위에 서서 누군가를 책임질 수 있는 재목이 아니었다. 유더는 이를 갈며 소리치는 키올레를 향해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걸 하라고 네 갑옷에 꽃이 3개나 달린 거지. 다른 이유가 필요해?”

마주친 시선 속에서 키올레가 분노와 의문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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