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91화 (91/805)

91화

모든 죄를 덮어쓰고 죽어야 했을 데브란이 살아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와 손을 잡고 이 모든 일을 실행해 준 아페토 가의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카일이 그들과 손을 잡고 영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 모든 짓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결코 용서받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직 영주 자리를 물려받지 못했는데, 모든 일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최대한 발뺌을 해 무조건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자카일을 뻔뻔하게 움직이도록 만들어 주었다.

“감히 하르탄의 영주인 내 앞에서 무슨 작당질을 하는 게냐. 탈출이라고? 보고? 어이가 없군. 내 당장 네놈들의 주인인 펠레타 공작 전하에게 연락하겠다. 내 아버지와 누님을 죽인 놈이 태연한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으니 사형시킬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 말할 것이다……!”

“내가 영주님과 다른 사람들을 죽였다고?”

자카일의 말에 대답한 이는 데브란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우습다는 듯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나 멍과 상처로 가득한 얼굴로 터트린 웃음은 괴물처럼 기괴하게만 보여서, 자카일은 저도 모르게 겁을 집어먹고 흠칫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그…그래. 네가 죽였지 않느냐! 큰불을 질러서!”

“내가 왜?”

데브란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증오로 가득한 눈빛이었으나 목소리는 더없이 침착한 것이 자카일을 더욱 떨리게 했다.

“뭐?”

“내가 왜 그러겠어? 응?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이유가 없지 않나? 고향을 떠나 마병단에도 들어갔고, 황제 폐하께 성도 하사받았고, 돈도 많이 벌어서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는데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짓을 저질렀겠느냔 말이야. 네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 같은 놈들은 힘이 조금 생겼다고 착각하면 금세 기고만장하곤 하니, 제 능력만 믿고 욱하는 마음에 불을 질렀겠지! 너 때문에 나는 아버지와 누님의 유언조차 듣지 못했어!”

“그렇게 끝까지 거짓말로 내 탓을 하려는 거군.”

“그러면 그때 하르탄에 없었던 내가 불을 지르기라도 했다는 소리냐?”

“하, 그 말 잘했다. 어디 한번 따져 보자고.”

데브란의 형형한 눈빛을 보며 자카일은 불안한 마음을 겨우 다스렸다.

‘뭐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아냐. 저 녀석들은 아직 아무것도 몰라. 내가 아페토 가와 손을 잡았다는 확실한 증거는 어디에도 남기지 않았어. 설령 잡혀 있을 때 무슨 말을 들었다고 해도 말만으론 증거가 되지 못해.’

눈을 굴리는 자카일을 보며 데브란이 입을 열었다.

“날 잡아 가뒀던 놈들은 하르탄 같은 작은 곳을 손에 넣어봤자 큰 의미도 없는데 얻는 것에 비해 너무 많은 일을 해준 것 같다고 투덜대곤 했었지. 나를 받지 않았다면 수지가 안 맞는 장사였을 거라 말하기도 했어. 그렇다면 놈들과 손을 잡고 하르탄을 받아 챙긴 뒤 나를 대가로 넘긴 녀석이 있었다는 뜻인데, 네놈 말고 대체 누가 범인이 될 수 있단 말이야? 돌아가신 영주님과 상속 후계자 주피엘 님?”

“…….”

“아니면 이미 기사 작위를 받고 새 삶을 시작하신 제클리스 님? 세 분은 굳이 그럴 이유가 없어. 하지만 넌 그럴 이유가 있지, 자카일 하르탄! 정녕 하르탄의 영주가 되고 싶어서 이 모든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고 신 앞에 맹세할 수 있나?”

데브란의 우렁찬 목소리가 워낙 컸던 탓에, 멀리 물러난 경비대원들도 그 대화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자카일은 멀리서 웅성대는 소리를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불이 난 뒤 내 말을 조금도 들어주지 않고 곧바로 범인으로 몰아 감옥에 처넣은 뒤 죽이지 않고 산 채로 죽음의 바위 앞에 묻어 두었던 것도 바로 네놈이 아니냔 말이다!”

“아니야!”

자카일은 발작하듯 몸을 흔들며 외쳤다.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를 단단히 붙잡은 검은 그림자 분신은 미동조차 없었다.

“난 네놈이 감옥에서 자살했다고 들어서, 그래서 그냥 조용히 묻어 두고 오라고 명했던 것뿐이야!”

“누구에게 말입니까?”

이번에 자카일에게 반문한 것은 화려한 이목구비를 지닌 붉은 머리칼의 미남이었다. 검은 제복이 잘 어울리는 남자가 웃음 띤 눈빛으로 자카일을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자카일 님. 그 명을 누구에게 하셨습니까? 그 사람을 찾아내면 진실이 확실히 가려지겠네요. 그렇지, 데브란?”

“그래. 그렇겠네. 그날 나를 누가 데려갔는지는 머리에 자루가 씌워진 상태라 나조차 알 수 없었거든.”

‘이, 이 자식들이.’

자카일은 순간 제가 함정에 넘어갔음을 깨달았다. 당연하지만 그런 명을 내린 적은 없었다. 감옥에 있던 데브란을 데려가 묻어 두었다가 꺼내 간 사람은 미리 자카일과 사전에 모든 일을 협의하고 변장한 채 숨어든 아페토 가의 사냥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카일은 그들이 새벽의 어둠을 틈타 조용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직접 감옥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두었다.

그리고는 아버지와 누나의 변고 소식에 놀라 급히 찾아온 형 제클리스와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하루 종일 뒷산에서 장례식을 준비하며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끌었다.

그의 생각대로 아무도 사라진 데브란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데브란이 가족을 죽이고 성에 불을 질렀다는 말을 믿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막내 도련님 연기에 충실했던 자카일이 거짓을 말했다고 누가 의심할 수 있었겠는가. 기사단 일로 바쁜 제클리스는 연인이 죽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아 장례식 내내 넋을 놓고 있었다.

상속과 관련된 일은 기사단에 돌아갔다 다시 오면 함께 끝내자고 말해 두었지만, 자카일은 형이 이 마을 영주 자리 따위를 상속받으려 하지는 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유망한 기사의 앞날이 이깟 작은 마을의 영주보다 더 창창한 것은 둘째 치고라도, 지나치게 감상적인 성격의 형이라면 연인이 죽은 마을로 다시 돌아오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그러면 자카일은 예정대로 영주가 되었을 테고, 여태 이렇다 할 이득 하나 챙겨 주지 않은 디아카 가 대신 아페토의 비호를 받으며 힘을 키워나갈 예정이었다. 작은 마을 영주의 별 볼 일 없는 막내아들에서 시작해 끝내는 동부의 패자가 되어 웃게 되리라는 큰 꿈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 꿈을 생각하며 자카일은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여기서 저 평민 놈들 때문에 발목이 걸릴 수야 없었다.

‘말려들지 말자. 분노해 봤자 내게 좋을 것 따윈 없어. 평민 놈들에게 머리를 숙이는 건 굴욕적이지만, 일단 안심시켜서 살고 봐야지.’

“워낙 정황이 없어서, 나도 누구에게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는 기억이 안 나.”

“그걸 지금 말이라고……!”

“아버지와 누님이 돌아가셨는데 너라면 경황이 있겠나? 그래. 어쩌면 널 잡아갔다는 그놈들이 나까지 속이고 널 데려갔던 것일지도 모르잖아. 안 그래?”

“뭐?”

자카일은 그의 뻔뻔함에 이를 가는 데브란을 보며 최대한 비위를 맞추는 미소를 지었다.

“이봐. 누가 네게 내가 그랬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불어넣었는진 모르겠지만, 널 잡아간 건 진짜로 내가 아니야. 생각해 보라고. 나도 피해자야. 글쎄 네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저 묻으라고 명을 내렸을 뿐인데, 이런 상황에 처했다니까. 복수는 내가 아니라 널 잡아간 놈들에게 하는 게 먼저가 아니냐. 안 그래?”

“…….”

“지금 여기서 날 풀어주어라. 그러면 내게 행한 모든 무례를 용서해 주고, 기꺼이 하르탄의 현 영주 대리로서 너희들을 도와주겠다. 수도에 연락하여 진짜 범인을 찾도록 도와주겠어. 이런 방식으로 날 다그치는 건 너희들에게도 좋지 않을 거야.”

뱀처럼 속삭이는 그를 보며 데브란은 물론이요, 주변의 모든 이들이 혀를 내둘렀다. 증거가 없다는 것을 믿고 뻔뻔하게 사람을 회유하려 드는 모습이 실로 대단했다.

‘증거 없이는 아무래도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 같군. 저 혓바닥을 더 놀리기 전에 그냥 할 일이나 해야겠어.’

“데브란. 편지도 보내야 하니 일단 성에 잠깐 돌아가자.”

“…그냥 죽여 버리면 안 되나?”

원수를 앞에 두고도 손을 대지 못한 데브란이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자카일이 숨을 삼키며 몸을 움츠렸다.

“유더가 그래도 된다고 했어?”

“아니.”

“그러면 하지 마.”

그렇게 말한 뒤 가케인은 데브란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만 들을 수 있게끔 조용히 속삭였다.

“유더가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어차피 저 녀석은 끝이야. 굳이 네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단장님께서 끝장내 주실 테니 조금만 참지 그래. 네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말야.”

“……알겠어.”

가족 이야기에 표정이 누그러진 데브란이 불 같은 성질을 가라앉히고 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붙잡은 자카일을 데리고 하르탄 성으로 돌아갔다.

그림자 분신에 붙잡혀 번쩍 들려 있는 자카일의 꼴을 본 마을 사람들은 전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으나, 살아 돌아온 데브란과 그의 가족들을 보고는 더욱 놀라 뒤집어졌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죽었었다며?”

“자카일 님이 잡혀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세상에, 무슨 일이람 이게!”

그리고 그 혼란은 성안으로 들어선 그들이 겁에 질린 표정의 늙은 집사와 마주쳤을 때 절정에 달했다.

“자, 자카일 도련님! 방금 전 제, 제, 제클리스 도련님께서 돌아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만……. 대, 대체…….”

“제클리스 님이 왔다고?”

검은 분신에게 입이 틀어막힌 채 붙잡혀 있는 자카일 대신 데브란이 큰소리로 외쳤다.

“잘 됐다. 지금 어디 계시지?”

“으, 응, 응접실에…….”

“가자.”

그들은 일제히 응접실로 몰려갔다. 오늘 아침 유더와 그의 동료들이 수많은 음식을 먹어치우며 자카일을 화나게 했던 그 응접실에 지금은 은빛 갑옷 차림의 한 사내가 초조한 얼굴로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자카일과 닮은 생김새이지만 훨씬 선량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온 기척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는, 이내 데브란과 그 뒤의 데르밀라를 보고 눈을 크게 부릅떴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