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05화 (105/805)

105화

‘알겠네. 미안. 대답해 줄 테니 손에서 힘 풀게. 불꽃이 일잖나. 음. 눈이 좋다는 건… 그냥 말 그대로야. 유더 자네는 어떤 상황에서든 냉정하게 대상을 파악하지. 그게 적이든, 아군이든, 심지어는 자기 자신이든.’

‘그 정도는 이성이 있다면 누구나 합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못 해.’

뜻밖의 말에 유더가 멈칫하자 키시아르가 손을 들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유더는 그의 손을 감싼 고급스러운 흰 장갑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충분히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도 자꾸만 손짓을 하는 그 때문에 미간을 찌푸리며 커다란 책상을 옆으로 돌아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이번에는 갑자기 뻗어 나온 손이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유더는 순식간에 그의 무릎 위에 앉은 꼴이 되어 품에 안기고 말았다.

‘…뭘 하시는 겁니까? 지금은 대낮입니다만.’

‘봐. 이렇게,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 판단을 하게 되거든.’

귓가에서 달콤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자네는 가능하지. 어떤 상황에서든 상관없이 주변을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다음 마병단에는 필요해.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가?’

‘그 말씀을 하기 위해 이런 일을 하시는 건 확실히… 좋은 판단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

저를 탓하는 말임에도 키시아르는 아랑곳없이 화사하게 웃었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제 뺨을 살짝 매만지는 것을 가만히 감내했다. 그곳이 결투하는 동안 제가 입은 유일한 부상 부위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꽤 아팠겠군.’

‘별로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치유 효과가 있는 성수도 부었으니 곧 낫겠죠.’

매끄러운 가죽 소재의 장갑을 낀 탓에 키시아르의 손길은 언제나 차갑게 느껴졌다. 그 손이 차갑지 않을 때는 하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 침실에 함께 있는 순간이었다.

‘이전보다 조금… 말랐나.’

‘그것까지는 모르겠군요.’

‘수련 좀 적당히 하게. 이러다가는 단장 취임식 전에 제복을 다시 맞춰야겠어.’

그렇게 말하는 동안 갈비뼈 부근을 옷 위로 가볍게 매만지던 손이 스르르 내려가 허리를 감쌌다. 유더의 머리칼 위에 살짝 닿은 채 들이쉬고 마시기를 반복하던 숨결이 점점 천천히 가늘게 변했다.

마치 시향이라도 하는 것 같은 느리고 깊은 호흡 소리를 들으며 유더는 들리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키시아르는 자리를 비웠다 돌아왔을 때 종종 이런 식으로 유더를 가까이 불러들여 짐승이 냄새를 맡는 듯한 행동을 할 때가 있었다. 때문에 방금 가까이 오라 불렀을 때도 혹시 또 그럴지 모른다 생각해 미리 마음의 대비를 했는데 예감이 틀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차피 제게서 다른 제2성 발현자들처럼 특별한 기운이나 향 같은 것은 조금도 나지 않음을 잘 알 텐데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궁금해해도 어차피 답을 주지 않으니 이제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무릎 위에 걸터앉는 것만은 아직도 조금 어색했다.

그들 사이에서 먼저 말을 하는 이는 대개 키시아르 쪽이었다. 때문에 그가 입을 닫고 침묵만이 가득해지는 이런 순간은 유더에게 늘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상대의 벗은 몸을 만져 본 적도 있는데, 그때보다도 오히려 지금이 더 근질근질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유더. 이전에 가르쳐 준 전술 게임. 기억하나?’

그때, 드디어 조용히 느린 호흡만 반복하던 키시아르가 입을 열었다. 유더는 반사적으로 움찔 어깨를 굳히며 대답했다.

‘네.’

‘특별패와 관련한 규칙도?’

‘기억합니다.’

얼마 전 유더는 키시아르에게 2인용 전술 게임을 배웠다. 그 게임에는 특별패라는 말이 존재했는데, 처음부터 존재하는 일반 말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게임 시작 전 상대방 몰래 일반 말 중에서 지정하는 일종의 비밀병기를 가리켰다.

특별패는 본래 움직일 수 있는 범위 제한을 넘은 힘을 발휘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2인이 한 턴씩 주고받는 게임 특성상 한번 사용하고 나면 반드시 적에게 제거 당하곤 했다.

때문에 잘 숨기다 승기를 잡은 결정적인 순간에만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진 힘이 큰 만큼 특별패를 잃으면 자신이 죽인 적의 말 중 일부를 되돌려 주어야 했기에 애초에 지정조차 하지 않는 이도 많았다.

유더가 그 규칙을 떠올리는 동안 키시아르가 말을 이었다.

‘특별패를 사용할 때 제일 피해야 할 일은 사용하기 전 적에게 들키는 일이야. 너무나 큰 손해를 입게 되니까.’

‘…….’

‘그래서 나는 들켜버릴 것 같은 특별패는 선수를 쳐서 먼저 적의 앞에 미끼로 내놓는다네.’

‘그런 뻔한 방법이 통합니까?’

의심스레 반문하자 웃음 섞인 답이 돌아왔다.

‘의외로 잘 통해. 바로 앞에 있는 것이 특별패일 것 같다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아닐 경우 돌아올 역 페널티 때문에 적은 계속 의심하게 되거든. 대놓고 드러낼수록 가치 없는 존재일 거라 여기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잘 통한다네. 무언가를 살리려면, 때로는 제일 앞에 내세우는 그런 비정한 방법도 필요한 법이지.’

갑자기 전술 게임 이야기를 하기에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나 했더니, 정말로 그저 게임 이야기일 뿐이었다.

어차피 키시아르가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일은 잦았기에 유더는 크게 실망하지 않고 대충 대꾸했다.

‘잘 통한다면 좋은 전술이겠죠. 딱히 비정한 방식이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만…….’

‘하지만 특별패 입장에서 보자면 잔혹하다 여길 수 있지 않겠나? 본래대로라면 귀하게 보호받다 그 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패인데 말이지.’

유더는 잠시 키시아르가 혹시 취해 있나 의심했다. 진심으로 게임에 사용하는 그 딱딱한 돌로 만든 말이 불쌍하다고 말하는 것인가?

‘애초에 특별패를 선택한 것부터 말의 의사를 묻고 지정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쓰든 그건 게임을 하는 사람 마음입니다.’

‘그건 그렇지.’

‘알면서 왜 물으십니까? 갑자기 돌로 만든 말에 사랑이라도 샘솟으셨습니까?’

키시아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유더가 그 영양가 없는 대화를 반쯤 잊고 앞으로 해야 할 골치 아픈 일들을 떠올리기 시작했을 때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유더의 등을 살짝 밀어 일어서게 했다.

‘자. 이제 돌아가도 좋네.’

일어서서 돌아본 키시아르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했다. 그러나 유더는 어쩐지 저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묘하게 가라앉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 * *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유더가 언제나 잠들고 깨어나던 작은 일반단원 숙소가 아닌, 아름다운 황금색 태양 문양이 그려진 드높은 천장이었다.

유더는 이전 생에서 지겹도록 보았던 그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여긴… 단장 숙소에 있는 손님용 침실인데.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머릿속이 텅 빈 듯 나른해 순간적으로 당혹스러웠으나, 고개를 내려 이불을 쥔 양손을 보자 갑자기 기억이 명확해졌다.

‘아. 그랬지 참. 키시아르에게 치료를 받고 나서 내 방으로 돌아간다고 했다가…….’

유더는 키시아르에게 말한 대로 반점을 원래의 크기대로 되돌릴 때까지 기절하지 않았다. 곁에서 지켜보기만 했을 뿐인 나단 주커만조차 나중에는 진지하게 그의 인내심을 경이롭게 여기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시간이었지만, 어쨌든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참아냈다.

문제는 치료가 끝나고 나서였다. 옷을 도로 걸치자마자 곧바로 일어나 돌아가려 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다리에 힘을 준 순간 갑자기 전신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지금이었다.

“…….”

아마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쓰러졌겠지. 기절한 사람을 들어다 일반 단원 숙소까지 옮기는 건 어려웠을 테니 여기에 눕혀둔 것일 테다. 대충 전후 사정은 짐작이 갔지만, 덕분에 유더는 더욱 강한 자괴감을 느꼈다.

산 채로 살을 갈라 뼈가 뽑히는 고문을 받을 때도 기절하지 않았었는데, 고작 팔을 좀 뒤덮은 반점을 신성력으로 치유했다고 쓰러지다니. 키시아르와 나단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혹시나 싶어 귀를 기울여 본 바깥은 무척 조용했다. 커튼 너머로 얼핏 비치는 창밖 풍경이 어두운 것을 보면 어느새 밤이 된 것 같으니 키시아르는 본인 침실에서 잠을 자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차라리 잘 됐군…….’

그가 자는 사이 조심스럽게 원래 숙소로 내려가는 쪽이 낫겠다 싶어 유더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밑에 내려섰다. 발을 딛은 순간 다시 한 번 눈앞이 어찔했지만 벽을 짚은 덕에 기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문득 제가 꾸었던 꿈 내용이 떠올랐다. 아주 완전한 꿈이라기보다는 이전 생에서 키시아르와 있었던 짧은 순간을 재현한 꿈이었다. 워낙 옛날 일이라 어떤 기억들은 한없이 흐릿한 덕에 그게 진짜 있었던 일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유더는 아마 사실일 것이라 생각했다.

‘정확한 건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전술 게임을 키시아르에게 배웠던 건 맞으니까.’

그리고 단장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시절에 동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시비를 걸었던 것도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때는… 확실히 나도 어렸어. 그런 말들을 무시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려웠는지.’

지금이야 겉은 스물이라도 알맹이는 산전수전 다 겪은 놈이라 같은 일이 일어나도 화내지 않고 잘 참을 자신이 있었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꿈이라곤 해도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이리 멀리 떨어져서 지켜본 건 흔치 않은 경험이다. 결국 그런 순간들을 거쳐 왔기에 지금의 제가 된 것이겠지만, 유더는 키시아르가 그때의 유더 아일을 웃는 얼굴로 참고 인내심 있게 가르쳐 준 것이 새삼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를 느꼈다.

그는 유더의 눈을 칭찬했었지만, 유더의 입장에서 보자면 진짜 눈이 좋은 쪽은 키시아르 라 오르였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와서 그 시절 꿈을 꿨는지는 잘 모르겠군. 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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