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아무래도, 각성자란 존재를 제가 너무 우습게 여긴 모양입니다.”
디아카 공작이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법과 비슷하다 해도 결국 마법사보다 못하고, 오러와 비슷하다 한들 소드마스터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힘밖에 지니지 못한 반푼이들이라 보고받았습니다. 실제로도 제가 본 이들은 그러했습니다만…….”
“…펠레타 공작은 황족이 아닌가. 규격 외의 힘을 쓸 수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황족이 타고나는 축복의 힘은 역사가 증명하지 않던가.”
동요했던 표정을 지운 황태자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디아카 공작과 달리, 여전히 마병단이 지나간 거리 한편을 고요하게 응시하는 중이었다. 누군가 땅을 강제로 파헤쳤다가 다시 덮은 듯 티가 나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한다면 과연 누가 쉽게 믿을 수 있을까.
방금, 그곳에 있던 한 사람이 바람과 땅의 2가지 속성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아주 짧은 순간 일어난 일이지만 황태자는 제 눈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몸에 독을 심고 이중 서약을 하게 하여 임무를 실패하는 즉시 폭발해 죽을 예정이었던 암살자들을 그자는 마치 예지라도 한 듯이 너무나 손쉽게 막아냈다.
그동안 나름대로 강력한 힘을 지녔다는 이들을 많이 만나보았으나 그 정도로 짧은 순간 깊은 인상을 남긴 자는 처음이었다.
황태자는 그자의 검은 머리칼과 창백한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내리깔았다. 곁에서는 디아카 공작이 여전히 무어라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래서, 다음에 펠레타 공작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자들은 아무래도…….”
“그보다, 그자에 대해 알아보는 쪽은 어떠한가.”
“예?”
말허리가 잘려 인상을 찌푸렸던 디아카 공작이 잠시 후 표정을 갈무리하고 황태자의 시선을 따라 바깥을 바라보았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전하.”
“펠레타 공작의 앞에서 능력을 사용했던 남자.”
황태자의 얇은 입술 위로 독을 품은 듯한 미소가 번졌다.
“공작은 그때 잠시 바깥에 나가 있느라 그자를 제대로 보지 못했지.”
“그렇습니다.”
“보통 대단한 능력이 아니더군. 연을 만들어 둔다면 이쪽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더라도 추후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어.”
디아카 공작은 황태자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그제야 기억해냈다. 그러나 그자가 능력을 쓰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에, 황태자가 보인 흥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외모가 마음에 들기라도 한 모양이군.’
그는 그저 그렇게 여긴 뒤 겉으로는 우아하고 충실한 노신에 걸맞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영명한 전하의 안목에 띈 자라니 저도 흥미가 솟는군요. 곧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수확철 축제의 시작부터 일대 파란이 일어났다.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가 이끈 마병단이 대행진을 하던 도중,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해치려 하던 흉수들과 마주쳤다. 그러나 그들은 키시아르가 직접 나서자마자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허망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죽은 흉수들의 시체가 갈가리 찢긴 탓에 그들의 정보를 더 추측할 수는 없었으나 사람들은 그런 부분보다는 황족이 몸소 나서서 국민을 지켰다는 사실에 열광했다. 그가 쓰러진 흉수들 앞에서 선량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마병단을 만들었노라 선언했던 이야기는 연일 수도 내에서 호사가들의 입에 올라 떠들썩하게 회자되었다.
귀족들이 모이는 사교계 또한 마병단 이야기로 뜨겁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병단이 갈론 백작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내쫓은 일로 처음 화제가 되었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펠레타 공작이 단순히 지루함을 달래려 마병단을 만들었을 뿐이라던 악의 서린 소문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국민들의 앞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아 인기가 없던 케일루사 황제 또한 덩달아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황제가 황태자와 4대 공작가를 위시한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사건을 일으킨 것이 아니느냐는 음모론이 슬그머니 제기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열광적인 관심에 고무된 건 마병단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행진을 성공적으로 끝낸 뒤부터 마병단의 사기는 대폭 높아졌다. 10여 명씩 조를 나누어 투입된 수도 곳곳의 행사에서 몇 번이나 마병단을 노린 듯한 수상쩍은 사고가 일어났음에도 큰일로 번지지 않은 이유는 모두 단원들이 미리 훈련받은 대로 잘 대처했기 때문이었다.
‘밤을 새워 가며 열심히 굴린 보람이 있군.’
유더는 저와 함께 파견된 단원들의 잔뜩 힘이 들어간 표정들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그들이 나선 곳은 교황이 직접 집전하는 대륙 최대 규모의 공개 태양신 교단 예배 현장이었다. 1년에 한번 열리는 그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대륙 곳곳에서 신자들이 모여들었기에, 마병단 이외에도 황궁기사단과 제국군, 궁중마법사 여러 명이 치안 유지를 위해 파견되었다.
키시아르는 오늘 마병단장이 아니라 황족으로서 예배에 참석해야 했기에 단원들 사이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와 유더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예배가 집전되는 오르 대신전 앞 광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한 곳이 되리란 사실만은 확실했다.
유더는 예배가 시작되려면 몇 시간이나 남았음에도 벌써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을 보며 단원들에게 마지막 공지를 했다.
“미리 말했던 대로 둘씩 나누어 지정된 자리를 지키는 거야. 이상이 있을 시에는 곧바로 연락하고,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잘 기억해 둬.”
“알겠어.”
오늘 예배는 워낙 중요했기에 마병단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는 판단을 받는 이들로만 20여 명을 뽑아 데려왔다. 때문에 각 과의 부단장인 에버와 스티버, 칸나를 비롯해 가케인과 지미, 엘더 남매까지 유더와도 이미 친분이 꽤 있는 이들이 다수 얼굴을 내민 상태였다.
“모르는 이와는 도움을 줄 때 이외에 사적인 대화는 안 돼. 지급되는 것 이외의 음식도 몰래 섭취해선 안 되고. 그리고 임무 도중 마주치는 궁중마법사나, 특히 황궁기사단 기사들이 시비를 걸더라도 절대로 상대하지 마.”
“아 유더. 훈련할 때부터 그 말을 대체 몇 번을 하는 줄 알아? 이젠 귀에 못이 박이겠다고.”
“맞아. 이젠 무슨 말을 할지 다 외우겠어. 떠들지 마라, 일할 때 몰래 먹지 마라, 싸우지 마라!”
힌 엘더가 코끝을 찡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핀 엘더 또한 큰 소리로 동감을 표했지만 유더는 그렇지 않아도 엘더 남매에게 할 말이 있었기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무심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해도 안 지키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계속 말하는 거야. 너희가 그저께 기사 몇 명을 날려 보낼 뻔했던 것처럼.”
“…….”
찔리는 기억이 생각났는지 엘더 남매는 곧 딴청을 피우며 유더의 시선을 외면했다.
‘저 성격들만 생각하면 오늘은 돌려보내는 게 낫지 않나 싶기는 한데… 그래도 일은 제대로 잘하고 있고 만일의 경우 이동능력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유더는 작게 숨을 내쉬며 나머지 동료들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러면 이제 모두 제자리로.”
유더가 지키게 된 구역은 교황이 설 단상과 일반 교인들이 서는 곳 사이였다. 귀족들이 앉는 귀빈석과는 꽤 거리가 있었으나 앉아 있는 이들의 면면은 그런대로 잘 보였다.
‘키시아르는 아직인가.’
이전 생에서 본 기억이 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뒤섞인 귀빈석을 보고 있으려니 유더와 함께 구역을 지키게 된 칸나가 웃으며 말을 걸어 왔다.
“정말 대단한 규모야. 그치? 나도 이 대예배에 몇 번 와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게 된 건 처음이라 신기해.”
아무래도 칸나는 그가 처음 보는 대예배 풍경에 신기해하는 모양이라 짐작한 듯했다. 사실 이전 생에서 질리도록 귀빈석에 앉아 대충 지켜보았었기에 그리 신기하지는 않았지만, 유더는 동료의 마음을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 벌레 씹은 표정을 짓고 서 있던 황궁기사단 기사 몇 명이 들으란 듯 혀를 크게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뒷배가 좋으니 평민도 귀족과 같은 자리에서 교황 성하를 보는 날이 다 오는군. 참 좋겠어. 이리 중요한 날에 임무 이야기가 아니라 놀러 온 마냥 이야기하는데 아무 말도 듣지 않는다니 말이야.”
“원래 일은 우리가 하고, 칭찬은 검은 옷만 듣는 것 아니겠나.”
검은 옷이란 지칭은 황궁기사단 기사들이 마병단을 멸시하기 위해 새로 만든 말 중 하나였다. 노골적으로 비꼬아 대는 기사들의 말을 들은 칸나의 귓가가 분노로 살짝 붉어졌다.
“칸나.”
“걱정 마 유더. 이 정도는 갈론 백작가에 있을 때 참아야 했던 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유더의 부름에 시선을 돌린 칸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얼굴은 기억해 둘 거야. 나중에 다 끝나고 조금 갚아주는 건 괜찮지?”
과연 칸나가 한다는 복수가 어떤 식일지 조금 궁금해졌지만 어둡게 불타는 눈빛을 보니 모르는 편이 나을 듯도 했다. 유더는 축제가 전부 끝난 뒤에는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고 말한 뒤 다시 한번 귀빈석 쪽을 바라보았다.
키시아르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으나 귀빈석은 절반 이상 찬 상태였다. 서로 우아한 척하며 웃고 있던 귀족들이 갑자기 떠들썩하게 일어서서 한쪽을 바라본다 싶더니, 곧 시종들을 거느린 카치안 황태자와 디아카 공작이 나타났다.
‘디아카 공작의 뒤에 선 사람은… 후계자인 키론느 소공작인가. 그리고… 키올레 다 디아카?’
나타난 이들의 면면을 살피던 유더는 디아카 공작을 따르는 하인들 사이에서 낯익은 키올레의 얼굴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키올레는 잔뜩 털을 세운 짐승처럼 심기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