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39화 (139/805)

139화

“이논. 이제 그거 말고 다른 걸 먹을 때도 되지 않았어요?”

“달라면 줘, 이놈아.”

“지금 바쁘니까 동전 하나 놓고 가져가요.”

이논은 과일 상자 옆에 놓인 빈 깡통 속에 동전 하나를 던져 넣고 레몬 두 개를 집었다. 하나는 주머니에 넣고 하나는 곧바로 평범한 과일처럼 덥석 베어 무는 그를 보며 주인 청년이 코끝을 찡그렸다.

“그렇게 신 걸 대체 어떻게 먹는지 옛날부터 신기해 죽겠다니까요.”

“너, 여기서 장사 그만하고 싶은 거냐.”

“5대째 하고 있으니 솔직히 그만둘 수 있으면 그만두고 싶죠.”

태연하게 대꾸한 청년이 모든 과일 상자를 다 나르고 나서 땀을 닦으며 돌아섰다.

“그런데 아직 안 가는 걸 보니… 뭐 더 필요해요?”

“주변에 별일 없는지 궁금해서.”

“오늘은 별거 없어요. 어제 아페토에서 일어난 일은 이논도 알 거 아녜요.”

이논의 질문에 주인 청년이 대수롭지 않게 답하다가는 갑자기 “아.”하는 소리를 흘렸다.

“아페토라고 하니 하나 생각나는 게 있긴 하네요.”

“뭔데?”

“별 건 아닌데, 이번에 아페토 가에게 한방 크게 먹여줬다던 그 마… 마법단?”

“마병단?”

“아 맞아요. 마병단. 거기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더라구요.”

히죽 웃으며 본인의 실수를 넘겨 버린 주인 청년이 모자를 벗고 가판대 앞에 놓여 있는 작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하인을 구하는 게 뭐가 어쨌다고.”

“글쎄 하인을 구하는 게 아니고요, 의원과 약사를 구한다네요.”

심드렁했던 이논의 눈빛이 그제야 조금 바뀌었다.

“의원과… 약사라.”

“좀 신기하죠?”

과일 가게 주인 청년의 입가에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기양양한 미소가 걸렸다.

“이 근처 의원 하는 작자들과 약방에는 벌써 소문 한번 쫙 돌았습니다. 펠레타 공작님이 만든 곳이라기에 당연히 신전에서 최고급 성수만 가져다 치료할 줄 알았는데, 왜 의원과 약사를 구하려는 걸까요?”

레몬 한 개를 전부 씹어 먹은 이논이 마지막 껍질까지 씹어 삼키고는 입술을 핥았다.

“글쎄. 이유는 몰라도 꽤 흥미가 돋는 이야기긴 하네. 그래서, 돈은 많이 준다고 하던?”

“왜요. 설마 이논도 거기에 관심 있어요? 하하.”

그렇게 반문하기는 했으나 청년은 사실 이논이 거기에 대고 긍정적인 답을 하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는 듯 레몬을 씹던 이논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을 때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미끄러질 만큼 놀라고 말았다.

“진짜요?!”

“그래. 그러니까 어디로 가서 지원하면 되는지나 알려 줘.”

“아니, 농담이 아니고 진심이에요? 돈이 부족한 건 아니잖아요?”

“시끄러워. 그래서 어디로 가면 되냐니까.”

“허 참. 별일이 다 있네.”

얼떨떨한 얼굴로 일어선 청년은 근처에 펠레타 기사단원 몇 사람이 장기 투숙 중인 여관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면 된다는 정보를 알려 주었다. 이논은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꺼낸 동전 하나를 손가락으로 튕겨 그에게 날렸다.

“받아. 나는 간다.”

“예에. 살펴 가세요.”

돈을 받은 청년이 언제 찡그렸냐는 듯 싱글벙글 웃는 모습을 보며 혀를 찬 이논은 그가 말해 준 여관으로 슬렁슬렁 걸어갔다. 가는 도중에도 곳곳에서 사람들이 어제 아페토 가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떠들어 대는 모습이 보였다.

축제 기간임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이논은 그들의 흥분을 이해했다. 무려 제국 건국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서 깊은 4대 공작가 중 한 곳의 추문이 공개적으로 널리 밝혀졌으니 그보다 더 흥미로운 일이 또 있겠는가.

아페토 가는 그동안 각성자들을 데리고 해서는 안 될 잔인한 연구를 했다. 그들은 펠레타 공작과 마병단이 그 사실을 알아낼까 걱정되어 부지 내 숲속에 실험자들을 숨겼으나, 그로 인해 오히려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모든 것이 밝혀지고 말았다.

어떤 계기로 사고가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펠레타 공작이 실험을 당하던 각성자 일부가 사라졌다고 발표했기에 사람들은 대부분 사라진 이들이 사건을 일으켰으리라 짐작했다.

모두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결국 그 사고로 인해 연구를 책임지던 벨트레일 원로사제가 광인이 되었으며, 그를 따르던 보조사제와 하인들 다수가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아페토 공작은 당연히 그 일을 묻고 싶어 했지만 사건 현장을 먼저 발견한 마병단과 펠레타 공작이 즉시 현장을 보존하고 제국군 치안대를 불러들였기에 그럴 수 없었다. 사건은 순식간에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졌다.

두 공작의 만남을 앞두고 황제가 충돌을 염려하여 저택 바로 바깥에 치안대를 대기시켰는데 하필 그런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을까. 사실은 그조차도 억울한 사건이 밝혀지기 위한 신의 안배였다는 소문이 신빙성을 얻었다.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는 아주 침착하게 현장을 조사한 뒤 억류되어 있던 각성자들을 구출하고 벨트레일 원로사제를 신전에 고발했다. 미쳐버린 벨트레일은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었으나, 누구도 그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대신전 측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하루도 되지 않아 벨트레일을 원로사제 자리에서 내쫓고 파문하겠다 밝혔다.

아페토 가는 벨트레일이 홀로 모든 일을 저질렀다 주장했다. 하지만 사건이 널리 알려지자마자 곧장 저택의 문을 닫고 한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 밝힌 이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키시아르는 아페토 가의 목을 옭아맨 끈을 조금도 느슨히 늦추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황제에게 이 사건을 마병단이 수사하게 해 달라는 공개 요청서를 보냈다. 벨트레일이 어디서 연구 대상이 될 각성자들을 모았는지, 그의 연구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관련되었는지, 무엇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엄청난 발표에 백성들의 흥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제국법에 따르면 귀족 또한 죄를 저지르면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사실상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은 그들을 수사할 곳이 마병단이며 그곳의 장이 황제의 동생 펠레타 공작이었다. 황제와 호시탐탐 반목하던 아페토 공작가를 제대로 한 방 먹일 가장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다고 모든 이들이 생각했다.

각성자와 관련된 사건이 일어날 경우 마병단이 우선 사건을 수사하고 처벌할 권한이 있었다는 낯선 사실 또한 이번 일로 인해 모든 이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본래 모두가 관심을 가졌던 아페토 3공자 사건 따위에 신경을 쓰는 이는 이제 더 이상 없었다.

이논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나쳐 계속해서 걸었다. 그가 다시 걸음을 멈춘 곳은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 허름한 2층 여관, ‘거인의 잠’ 앞이었다.

“이논. 간만에 보네요.”

테이블에 앉아 야채를 다듬던 중년 사내가 이논을 보자마자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무슨 일로 왔어요? 전에 물어봤던 손님에 관해선 더 말할 게 없는데……?”

이논은 얼마 전 그를 찾아 마병단 시험을 치기 전 거인의 잠에 묵었던 사람들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곳에 묵다가 시험을 치러 간 사람은 총 둘이었는데, 주인은 화려한 붉은 머리칼의 미남밖에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 옆에 있었던 창백한 검은 머리 사내에 대해서는 한참 동안 기억을 짜내고 나서야 겨우 ‘그런 이도 있었다’는 정도만 떠올렸을 뿐이었다.

주인의 미안해 보이는 얼굴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손님들이 묵는 방이 있는 2층 계단 쪽을 흘긋 바라본 이논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그거 말고. 지금 여기 묵는 펠레타 기사단원들이 있다며. 어디 있어?”

“아. 의원과 약사를 구한다고 하루 종일 면접 보던 그분들요.”

아는 이야기가 나오자 주인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지금도 계시죠. 3호실에서 교대로 계속 방을 지키더라구요. 어제 아페토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혹시 그분들이 뭔가 아나 싶어서 아까 아침에 슬쩍 물어봤었는데, 그분들도 자세한 건 모른다나 봐요. 이논도 그게 궁금해서 온 거죠?”

“아닌데.”

이논은 장안의 화제인 아페토 가 사건을 떠들고 싶어 하는 주인을 뒤로하고 곧장 계단을 올랐다.

“어엉? 그러면 뭣 때문에 온 건데요? 설마 면접을 보러 온 건 아닐 테고…….”

그 설마가 맞다는 사실을 모른 채 고개를 갸웃대는 주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논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얼마 전 그를 찾아와 오랫동안 변화 없던 삶에 제대로 된 파문을 만든 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자신이 미래에서 다시 되돌아왔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주장하던 그 남자를 그저 미친놈으로 판단하기로 마음먹은 이후에도 가슴속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어디서 온 놈인지 조사해 보아도 특별해 보이는 점 하나 없는데, 내부에 잠재된 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다는 점 또한 이논을 자극했다. 그런 기분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래… 이상한 놈. 네가 진짜 시간을 돌렸는지, 아닌지 바로 옆에서 봐 주마.”

이논은 펠레타 기사단의 기사들이 머물고 있다는 방의 문을 거침없이 열고 들어갔다. 혹 다른 사람이 뽑힐지도 모른다는 가정 따위는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

그 시각, 유더는 마병단장실에 앉아 장갑을 벗고 얌전히 손을 내밀고 있는 중이었다. 성표를 두른 키시아르가 신성력을 부어 넣을 때마다 손등 위로 번져 있던 자줏빛 반점이 따끔따끔한 고통과 함께 사라져 갔다.

“약속한 대로 책임져줄 수 있게 되어 참 기쁘군.”

“……네.”

“고개 들게. 이 정도밖에 안 번진 걸 보면 노력했다는 건 충분히 느껴지니까.”

그렇게 말해도, 키시아르의 서늘한 미소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가 과연 세상에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유더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조금 들자, 키시아르가 작게 웃으며 손끝을 부드럽게 잡아 손바닥 쪽으로 휙 뒤집어 살피고는 다시 원래대로 돌려주었다.

“좋아. 다 끝난 것 같군. 장갑을 도로 껴도 좋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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