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41화 (141/805)

141화

“그런… 엄청난 목표를 지니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만.”

“당연히 몰랐겠지. 그런 걸 아무나 알면 큰일 아닌가.”

“그렇다면 제겐 왜 알려주십니까?”

“자네가 아무나라고 생각하나? 이제 명실공히 한 배를 탄 사이인데.”

장난스레 눈웃음을 친 키시아르의 곁에서 때마침 케이크와 한입 크기의 샌드위치, 차가 가득 담긴 쟁반을 들고 돌아온 나단 주커만이 무뚝뚝한 얼굴로 말을 보탰다.

“말하신 겁니까.”

“적당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둔 나단이 품속에서 아무런 특징도 없는 평범한 편지봉투를 하나를 꺼내 키시아르에게 건네주었다.

“방금 도착한 전갈입니다. 곧바로 확인하셔야 할 듯하여 가져왔습니다.”

봉투를 연 키시아르가 안에서 단 한 장뿐인 편지를 꺼내 빠르게 읽어내렸다.

“예상했던 대로 움직여 주는군.”

잠시 후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잠자코 케이크를 먹으며 기다리고 있던 유더의 앞에 잘 보이도록 다 읽고 도로 넣은 편지를 내려놓았다.

“이게 누가 보낸 편지인지 짐작이 가는가?”

“아뇨.”

“아페토 공작가의 현 후계자, 1공자 에이셰스 샨 아페토라네.”

키시아르가 아페토 가에 갔을 때 에이셰스는 그곳에 없었다. 그는 배다른 동생이자 후계자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2공자 레노어와 사이가 나빠 언제나 다른 저택에서 혼자 머물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이 워낙 유명했기에 아페토 가가 벌인 일로 세상이 떠들썩한 와중에도 에이셰스를 향한 직접적 비난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유더는 이전 생에서 얼굴을 보기 전에 죽은 에이셰스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후계자 자리가 더욱 공고해질 상황인데, 왜 단장님께 그가 편지를 보냅니까?”

“간단한 일이야. 후계자 자리가 공고해지는 데에만 만족할 생각이 없어진 거지. 아버지까지 끌어내리고 곧바로 공작이 되고 싶으니 우리를 도와주겠다는군. 대가는 벨트레일 원로사제가 연구한 결과물들을 제 쪽으로 넘겨주는 정도로 충분하다는데.”

“…믿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믿을 수 없지. 하지만 우리 쪽에는 레블린이 있지 않나.”

예상했던 대로 일이 돌아가 주었기 때문인지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미소를 보며 멍하니 질문을 했다.

“설마 레블린 공자에 대한 부분까지 전부 처음부터 고려하여 계획하셨던 겁니까?”

“그럴 리가. 사실 아페토 쪽에는 아직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갑작스럽게 마침 좋은 패들이 들어왔으니 어쩌겠나. 시기를 놓치기 전에 써 주어야지. 나는 내 손에 한 번 들어온 기회는 놓치지 말자는 주의거든.”

지금쯤 한창 골치 아파하고 있을 아페토 가는 하르탄에 휴가를 갔던 마병단원 한 명의 실종이 여기까지 그들을 몰아넣게 될 줄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심지어는 키시아르와 마병단을 위해 줄곧 일을 해 온 유더 자신조차 제가 해낸 일의 결과가 이렇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는데 말이다.

유더는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느끼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눈앞의 아름다운 사내가 진심으로 거대한 목표를 이루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제야 온몸으로 느껴졌다.

“언제부터 이런 일을 시작해 오셨습니까? 마병단도 단장님의 계획 일부였습니까?”

“계획은 오래전부터 해 왔네. 마병단은 각성자가 되면서 갑작스레 설립 계획을 잡게 되었다지만… 뭐. 내가 각성자가 되지 않았더라도 만들었을 거야. 제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곳이니.”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낮게 웃었다.

“처음에는 이 정도로 빠르게 단이 안정될 줄은 몰랐기에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는 데 한 5년 정도는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자네 덕이 크군.”

5년. 키시아르가 이 거대한 오르 제국을 좀먹는 이들을 청소하기로 마음먹은 뒤 처음에 예정했던 준비 기간이 그 정도였다는 사실에 유더는 놀랐고, 그 다음에는 씁쓸함을 느꼈다.

이전 생의 그가 5년은커녕 마병단이 생긴 지 2년 정도 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유더는 가볍게 이를 악물며 고개를 내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에이셰스 샨 아페토의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숨길 수 없는 흥분이 담긴 필체로 적힌 글 속에 벨트레일의 연구결과를 다른 곳에 발표하거나 넘기지 말고 자신에게 달라는 부분이 유난히도 길게 쓰여 있었다.

‘가문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축복받은 피와 관련하여 그런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했다는 사실이 다른 데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제가 펠레타 공작 전하께 굳이 요청을 드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며 조금도 다른 뜻은 없음을…….’

축복받은 피.

그 순간, 유더는 문득 잠시 잊고 있었던 벨트레일과 나한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건 모두 다 ‘축복받은 피’ 때문에 고통받는 가문의 아이들과 대의를 위해서였어! 태어나자마자 죽어가는 운명을 타고난 아이들을 위해 연구한 것도 죄인가!’

‘축복받은 피는 무슨. ‘저주받은 피’겠지. 진짜 축복이라면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 그리 발악을 하며 피하려 했을까. 전부 다 너희들이 금지된 힘을 끝도 없이 욕심낸 결과가 아닌가.’

벨트레일에게 그렇게 말하던 나한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무엇이었던가.

‘너희는 신의 힘을 욕심낸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형제들의 힘과 목숨마저 욕심내려 하지. 대의를 위해서라면 당신 같은 쓰레기를 치우는 쪽이 더욱 옳아….’

축복받은 피와 신의 힘. 낯설게 여겨졌던 두 개의 단어를 나한이 동시에 언급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갑자기 몹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너희’라는 건 대체 누구를 지칭한 거지.’

너무 애매모호한 말들인 데다, 당시 나한과 마주하고 있던 벨트레일의 상태가 거의 광란에 가까웠기에 제대로 된 대화라 생각지 않아 잊어버렸었다.

“왜 그러나, 유더. 그 편지에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

“아뇨. 이 부분이 조금…….”

유더는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했던 생각을 떨치고 벨트레일과 관련된 부분을 손으로 짚었다.

“말 자체는 납득할 수 있지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 이 부분 말이군.”

그 순간,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서늘하고 자조적인 웃음이 짧게 스쳤다가는 이내 사라졌다. 잘못 본 게 아닌가 눈을 의심했을 만큼 낯선 표정이었다.

“뭐……. 그쪽도 필사적인 게지.”

“예?”

“아페토 가에서 축복받은 피를 타고난 이는 레블린만이 아니라는 뜻이라네. 에이셰스도, 벨트레일도 모두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평소에도 허약하고 건강이 좋지 않기로 유명했었지. 이해하겠나?”

그 말에 유더는 겨우 에이셰스가 굳이 가문의 수치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운운하며 오직 벨트레일의 연구결과만을 바란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 연구가 아무런 의미 있는 결과를 내지 못했음을 알면서도 또 같은 일을 반복하려 하는군요.”

“그것을 손에 넣은 에이셰스가 무슨 짓을 할지는 아무도 모르지. 물론 그렇기 때문에 넘겨줄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네. 거기서 가져온 것들은 모두 우리가 이번 일이 끝난 후 직접 파기하게 될 거야.”

가케인이 별채 지하에서 가져온 벨트레일의 노트와 서류는 모두 단장실 한편에 잘 정리되어 쌓여 있었다. 가져오면서 슬쩍 살펴본 바에 의하면 대부분이 연구 내용을 적은 보고서였고, 나머지는 여기저기서 모은 자료였다. 가케인의 말로는 벨트레일이 직접 쓴 글도 있다고 말했으나 거기까지는 시간이 부족하여 보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조용해 보였던 1공자 에이셰스도 이 모양이라니, 누구 하나 방심할 수가 없군.’

키시아르가 레블린을 이용해 그를 상대하겠다고 말한 이유가 몹시 이해가 되었다.

“이제 궁금증은 모두 풀렸나?”

생각에 잠긴 유더를 향해 키시아르가 장난스레 물었다. 유더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지금 당장 더 궁금한 부분은 없습니다.”

“앞으로 갈 길이 머네. 당장 모든 것을 해결할 필요는 없지. 그러면 이제 앞에서 자네를 기다리는 케이크가 다 녹기 전에 다시 먹게.”

오늘 앞에 놓인 케이크는 짙은 갈색을 띤 초콜릿 케이크였다. 위에 뿌려진 황금빛 가루와 흰 크림에서 단내가 폴폴 풍겼다. 유더는 케이크를 향해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어렵사리 포크를 들었다.

‘어쩐지 전부터 자꾸 이런 걸 먹이려고 하는 듯한데……. 뭔가 오해하는 건 아니겠지.’

슬쩍 눈을 들어 본 키시아르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웃고 있었다. 결국 유더는 큰 쟁반에 가득했던 케이크를 대충 모두 뱃속에 넣고 난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저는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러게. 아. 축복의 날에 있을 특별 수여식 기념 파티가 3일 뒤로 다가왔는데, 기억하고 있나?”

막 몸을 돌리기 전, 키시아르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말을 걸었다. 특별 수여식 기념 파티는 실질적으로 추수철 축제를 마무리할 마지막 행사이자 마병단 전체가 참여하기로 한 최후의 일정이기도 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네.”

키시아르의 말에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입 안에 남은 단맛이 올라왔다. 유더가 슬쩍 입을 소매로 가리거나 말거나 키시아르는 즐거운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날을 위해 맞춘 예복이 내일 도착한다고 하더군. 아무리 바빠도 놓치지 말고 미리 한 번 입고 살펴보게. 잘못 만들어진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예복?’

낯선 말에 고개를 기울였던 유더는 이내 그런 이야기가 있었음을 기억해냈다.

‘아 맞아. 그 파티 때문에 단복 사이즈와 똑같이 맞춰 만든 예복을 전 단원에게 준다고 했었지.’

이전 생에서는 어떤 장소에나 늘 단장 제복만을 입고 참석했기에 예복 따위에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데 신경을 쓰는 건 시간 낭비라 여겼으므로, 제가 단장이 된 뒤에는 아예 마병단원들은 제복을 파티복이나 예복 대신 입어도 되도록 규칙을 새로 지정하기까지 했었다. 귀족들이 뒤에서 비웃는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하나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기에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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