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46화 (146/805)

146화

“그렇게 계속 보고만 있을 텐가?”

키시아르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유더는 제가 아직 문조차 닫지 않은 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네. 죄송합니다.”

“죄송할 필요 없네. 이 쓸데없는 화려함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는 하지.”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다이아가 박힌 허리띠를 정돈하고 장갑 끝을 당겨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여유로웠으나 유더는 그의 손끝에서 사냥을 준비하는 맹수 같은 예리한 분위기를 느꼈다.

“쓸데없는 화려함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라면 그 예복이 몹시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군요.”

“안 들지.”

“왜입니까?”

“이것, 보이나?”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가 보란 듯 손 하나를 올려 그가 낀 장갑을 보여주었다. 그 장갑의 손등 부분에는 영원한 축복을 의미하는 고대 문양의 모양으로 깎아낸 보석 조각들이 붙어 있었다.

“이 장갑은 그 하나의 값만으로 변방의 작은 지역 하나를 몇 달간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로 비싸지. 하지만 사실 이 장갑은 그 정도로 비쌀 필요가 없다네. 특별한 기능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사용된 보석이 비싸지도 않으니까.”

그가 제 장갑을 바라보는 유더를 향해 느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이 장갑은 왜 그리 비쌀까. 맞춰 보겠나?”

“…황실에서 사용하는 물건은 지정된 곳에서만 만들도록 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 이게 그리 비싼 이유는 단지 5대 황제께서 마음에 들어 했던 장갑 제작자 가문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야.”

키시아르가 보란 듯 손등을 흔들다가는 툭 내렸다.

“당시에는 사실 몹시 좋은 취지에서 시작된 일이었지. 그때까지만 해도 황궁에서 직접 만들던 황실의 기물들을 황제가 직접 백성들이 만든 물건으로 사들이겠다고 선포했으니. 하지만 이제 와서는 그것조차 또 다른 전통이 되어, 가난하지만 실력 있는 자들을 지원하고자 했던 첫 목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네.”

5대 황제의 은혜로 선택받은 장갑 제작자 가문은 크게 성장하여 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황실에서 사용하는 물건을 만들며 얻은 부와 명성을 다른 이들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기를 쓰기 시작했다.

최초의 취지는 간 곳 없이 사라졌다. 왜 황족이 쓰는 예복용 장갑을 그곳에서만 받게 되었는지 의문스러워하는 이들이 점차 사라져 갔다. 반드시 지정된 곳에서 장갑을 사야 한다는 전통이 굳어지자, 제작자 가문은 황궁에 보내는 장갑에 전보다 훨씬 비싼 값을 매기기 시작했다.

어차피 황궁에서 사용하는 전체 예산에 비하면 그 정도는 그리 큰 액수가 아니었다. 담당 궁내부 관리들은 그저 당연한 관례라고만 생각했고, 제작자들이 끼워 보낸 달콤한 뇌물과 안부 편지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거래는 대를 이어 계속해서 이어지며 현재에 이르렀다.

유더는 몰랐던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키시아르의 말에 심각하게 귀를 기울였다.

“사실 장갑만 그렇지는 않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그런 식이야. 전통이라는 이름표만 달고 나면 어떤 폐단이 생겨도 바꿀 수 없게 되어버리니 아무런 변화도 발전도 없어. 제국의 병폐지.”

“지금이라도 바꾸실 수는 없는 겁니까?”

유더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키시아르가 눈을 부드럽게 빛내며 웃었다.

“물론 바꿀 거라네. 사실 이건 황제 폐하께서 예전부터 바꾸기를 원하셨던 부분이지만 이번은 불가능했어. 하지만 다음에는….”

미소와 함께 생략된 말 뒷부분은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유더는 키시아르와 마병단이 무언가 일을 낼 때마다 영리하게 간접적으로 입장을 밝혀 지원하던 케일루사 황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많은 궁을 내버려 두고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작은 궁에서 서류를 쌓아두고 홀로 일하던 그 학자 같은 인상의 황제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니. 내심 놀랍기 그지없었다.

‘이전 생에서는 워낙 빨리 죽어서 아무것도 몰랐는데……. 형제가 둘 다 꿈이 크셨군.’

“그건 그렇고.”

안색을 바꾸어 시선을 돌린 키시아르가 유더가 입은 예복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붉은 눈동자 위로 장난기 어린 기색이 떠올랐다.

“역시 생각대로 잘 어울리는군.”

“뭐가 말입니까.”

“자네 예복 말이야. 지나친 사치를 부리지 않고 만들어도 옷걸이가 좋으면 그 어떤 것보다도 값져 보일 수 있다는 좋은 예시가 되겠어.”

유더는 제가 입은 예복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제가 입은 예복이 사치스러운지 아닌지에 대해 굳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나 키시아르의 앞에 서 있으니 확실히 차이가 눈에 보였다. 그가 입은 예복은 좋아 보이는 천을 쓰고 금단추를 달기는 했어도 보석은 전혀 쓰지 않았고, 형태도 훨씬 간결했다.

‘그러고 보면 이전 생에서 갔던 파티에 참가한 귀족들 예복도… 보석이 안 달린 옷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일부러 이렇게 만드셨던 겁니까?”

“사실 법적으로는 그런 형태가 더 맞다네. 법은 제국을 이끄는 이들의 지나친 사치를 금하고 있거든. 지금 와서는 유명무실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가 고개를 기울이며 씩 웃었다.

“…그리고 실은 내 취향이기도 해.”

“예?”

“말했잖나. 내가 이런 쪽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다고. 결과물이 충분히 마음에 들게 나왔으니, 오늘 이후로 전 대륙에 퍼질 새로운 예복 유행을 기대해도 되겠어.”

흡족하게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인 뒤 가까이 다가온 키시아르가 유더의 허리에 감은 띠 끝을 보며 손을 뻗었다.

“뭐든 잘할 것 같더니, 이건 서툴군. 그렇게 묶으면 곧 매듭이 풀려 버려.”

“제가 다시 묶겠습니다.”

“됐네. 안 풀리고 잘 묶는 법을 알려줄 테니 봐 둬.”

공작이 마치 한낱 시종처럼 남의 옷 시중을 들다니. 누군가 보았다면 난리를 부렸겠지만 이곳에는 오로지 키시아르와 유더 둘뿐이었다.

유더는 제 앞에서 몸소 허리를 숙여 끈을 당겨 묶기 시작한 키시아르를 보며 약간 현기증을 느꼈다. 그가 한 치 앞도 예측하기 어려운 사내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생각했음에도 화려한 예복 차림으로 제 허리끈을 묶어주는 모습을 보는 건 좀 다른 문제처럼 느껴졌다.

두꺼운 예복을 입은 상태임에도 지나치게 가깝게 맞닿은 손끝의 감각이 허리를 통해 느껴져 평소처럼 평정을 지키기가 어려웠다. 키시아르의 금빛 머리칼에서 풍기는 향수 향기도 너무 짙었고, 무엇보다도…….

‘아무래도 이건, 자세가…….’

“보고 있나? 이 부분을 이렇게 돌려서 매듭지어야 풀리지 않아.”

“알겠습니다. 알겠으니 이제 제가 하겠…… 윽.”

황급히 뒤로 물러서려던 순간 매듭을 꽉 조이며 느껴진 압력 때문에 유더는 저도 모르게 숨통이 막히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 미안하네. 그러게 왜 움직이나. 허리띠를 묶을 때는 가만히 있어야지.”

누구 때문에 이 상황이 되었는데 그런 말을 하는가. 유더는 결국 이를 악물고 한소리를 하고 말았다.

“단장님. 저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물론 아니지. 내가 자네 나이도 모를까 봐서?”

“제 허리띠는 제가 묶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묶기만 한다고 다가 아니지 않나. 자, 다 끝났네.”

마지막 매듭을 묶은 뒤 뒤로 물러선 키시아르가 만족스러운 작품을 보는 눈빛으로 턱끝을 문질렀다.

“역시. 이전은 너무 느슨하게 묶어서 태가 덜 났어.”

유더의 눈에는 아무런 차이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키시아르는 아주 대단한 변화라도 생긴 듯 무어라 자화자찬에 가까운 칭찬을 몇 마디 더 했다. 이 상황에 무어라 더 항의한다 해서 그의 귀 안에 들어갈 것 같지 않았으므로 유더는 제 쪽이 빠르게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면 이제 나가기 전 숙소 건물 경비와 관련해서…….”

“아, 그 전에 하나만 더. 잊고 있던 게 기억났으니 기다리게.”

말을 듣던 키시아르가 갑자기 또 무슨 생각이 났는지 침실이 있는 쪽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유더는 멍하니 그가 사라진 자리에 서 있었다. 잠시 후 돌아온 키시아르가 유더에게 팔꿈치 부근까지 가릴 만큼 목이 긴 흰 장갑 한 쌍을 내밀었다.

“얼마 전 구한 것인데, 편의를 위해 여러 가지 마법을 걸어 놓았다더군. 받게.”

“이건…….”

유더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그 장갑을 그는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이전 생의 키시아르가 단장 자리에서 은퇴하기 전쯤 특히 자주 끼었던 장갑 중 하나였다. 숨을 거두던 날에도 저것과 비슷하게 아주 긴 흰 장갑을 끼고 있던 기억이 나 갑자기 뱃속이 서늘해졌다.

“괜찮습니다. 그냥 지금 끼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지금 입은 예복에는 검은색보다는 이쪽이 나아. 원래 자네에게 주려고 구한 것이기도 하고.”

더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임에도 그것이 마치 가시처럼 가슴을 찌르는 듯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전에도 비슷한 기분을 간간히 느꼈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통증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전 생에서 유드레인 아일은 카치안 황제의 명을 받들어 키시아르 라 오르를 암살한 데 아무런 감정도 없다고 줄곧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이후 이런 감각을 마주할 때마다, 무언가가 제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무언가를 마구 두들겨 대는 이상한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오래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감각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해 유더는 시선을 땅으로 내렸다. 천천히 호흡을 다스리는 동안 꽉 말아쥔 주먹 때문에 손가락이 조금 욱신거렸다.

“전처럼 반점이 크게 번질 일이 생겨서는 물론 안 되겠지만, 혹 그런 일이 생긴다면 감추거나 더 번지게 하지 않는 데에 도움이 될 거라네. 축복을 부어 키운 신목에서 뽑아낸 실과 천으로 만들었으니.”

설명을 하던 키시아르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말을 잠시 멈추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