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160화 (160/805)

160화

“어서, 유더.”

쿵.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것과 동시에 또다시 몸속에서 깊은 충격이 느껴졌다. 그것은 고통을 배가시키기만 했던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몸속의 무언가가 비로소 눈을 뜨고 형태를 갖추어 첫 숨을 내쉬었음을 알리는 거대한 울림이었다.

유더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손을 내려 배를 더듬었다. 무엇이 눈을 떴는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도 본능적으로 선명히 알 수 있었다.

제2성으로 변화하는 과정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방금 ‘완전히’ 완성되었다.

‘아…….’

충격과 혼란 속에서 뇌 안쪽에서 몸속을 태우는 열이 순식간에 훅 치솟았다. 의식이 몇 초간 깜박 사라졌다가 다시 되돌아왔을 때는 눈앞에서 시간이 다한 방어막이 천천히 사라져가는 중이었다.

팔찌의 마지막 다섯 번째 결정을 깨트려야 하는데, 지독한 고통과 탈력감에 지친 손은 꿈틀거리기만 할 뿐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결국 막이 완전히 사라진 뒤, 유더는 키시아르의 앞에 여과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말았다.

‘…결국 실패인가.’

끝이다. 키시아르는 곧 접촉해 올 테고, 그러면 무슨 일이 생겨도 이후에는 막을 수가 없게 된다. 그는 유더가 유일하게 이길 자신이 없는 각성자이자 끝을 모를 힘을 지닌 강자였고, 알파이기도 했다. 엉망이 된 몸 상태로 막을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이전 생과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유더는 열기와 자괴감, 혼란에 사로잡힌 채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제가 내뱉는 헐떡이는 소리조차 끔찍하게 역겨워 속이 울렁거렸다.

“…….”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앞에서 다음 상황을 알려 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쁘던 숨이 어느 정도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는데도 마찬가지였다.

‘뭐지?’

결국 유더는 죽도록 아픈 몸을 조금 움직여 고개를 들고 천천히 눈을 떠 보았다. 그러자 가만히 그를 보고 있던 붉은 눈동자 위로 웃음이 떠올랐다.

“……이제야 눈을 뜨는군.”

키시아르는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가볍게 손을 짚은 자세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비록 깔끔하게 올렸던 머리칼이 반쯤 흐트러지기는 했어도 눈빛은 여전히 명확했고, 흥분한 기색 하나 없었다.

“그런 표정을 짓는 걸 보는 날도 다 오고, 기다린 보람이 있군그래.”

“……단장, 님?”

“이거 참 섭섭해. 갑작스러운 2성 발현에 대비하려 몸을 숨긴 건 잘한 일이지만, 나까지 적처럼 대할 필요가 있나?”

“하, 지만, 단장, 님은… 2성… 읏. 알파……시고, 흐으……. 저, 는……곧, 발…정이…….”

당혹한 얼굴로 더듬대며 입을 연 유더를 향해 키시아르가 조금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 나의 제2성은 알파지. 자네가 발현에 이어 발정을 앞두었단 것도 느껴져. 특이하군.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몸이 멀쩡했다면 그거야말로 무슨 소리냐고 반문해 주었으리라. 하지만 고통 때문에 입술 사이로 흘러나간 소리는 그저 쌕쌕대는 호흡뿐이었다.

“지금 나는 너를 책임져야 하는 마병단 단장이다. 네가 나를 위하여 홀로 선뜻 나섰으니 이제는 내가 그 신의에 답할 차례일 뿐.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견딜 수 있으니, 그 안에 안전한 곳으로 함께 빠져나가면 돼.”

쿵. 또다시 머릿속에서 충격이 울렸다.

하지만 유더는 그 충격으로 인한 고통과 열기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할 만큼 키시아르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유더 아일.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든, 그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겠다. 그러니 나를 믿어주지 않겠나?”

상황에 맞지 않을 만큼 부드럽게 가라앉은 목소리.

말이 끝남과 동시에 키시아르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거대한 기운이 스르르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자취를 감추었다.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압박감과 고통에 짓눌려 있던 유더의 정신은 그 덕에 겨우 조금 맑아졌다.

숨이 트이며 눈을 가리고 있던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가 스르르 녹아내렸다. 선명해진 시야에 새로이 들어온 광경은 한껏 자신을 억누른 채 유더의 답을 기다려주고 있는 키시아르의 모습이었다.

‘……당신은, 대체.’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 신음 사이로 고통을 닮은 수많은 생각들이 번졌다.

어떻게. 어째서. 왜. 그렇게까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생각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쳤으나, 하나씩 빨려 들어가며 사라진 끝에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눈앞의 저 키시아르는, 이번에도 이전 생과 같은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

증거 따위는 하나도 없는 생각이었으나 마치 인과가 있는 듯 분명한 확신이 들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유더는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즉시 자리에서 일어난 키시아르가 예복 어깨에 고정해 두었던 보석 핀을 빼내며 미소를 지었다.

“본래는 누군가에게 빠르게 결정을 내리라고 강요하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여의치 않으니 어쩔 수가 없었네. 우리 둘 다 안전히 빠져나가려면 협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상황이라서 말이야. 자, 눈을 감게.”

순간 유더의 시선이 팔목에 찬 팔찌로 향했다. 간신히 매달린 단 한 개의 작은 결정. 지금이라면 그걸 다시 부술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그 일이 의미 없이 느껴졌다.

짧은 망설임은 눈 녹듯 사라졌고, 유더는 뜨거운 숨을 삼키며 몸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 위로 키시아르가 어깨에서 빼낸 금빛 망토 자락이 내려앉았다.

“으…….”

“이런. 이 정도만으로도 아픈가?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좀 걱정스럽군.”

진저리를 치는 유더를 보며 혀를 찬 키시아르가 걱정스러워 보이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빠른 움직임으로 몸에 망토를 꽁꽁 둘러 밖에 몸이 노출되지 않도록 완전히 감쌌다. 병에 걸린 환자나 시체를 이동시킬 때 쓰는 방식대로였다.

유더는 망토 자락을 잡은 키시아르의 손이 얼굴을 덮기 전, 그의 얼굴에 배어난 땀방울을 보았다.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역시 그 또한 폭주하듯 발현 중인 상대를 앞에 두고 완전히 평정을 지키기란 힘든 일이었을 터였다.

‘…나 때문에.’

그가 아니었다면, 그가 하필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2성 발현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터다. 이전 생에도 지금도 남은 건 그저 자괴감뿐이었다.

“단장, 님.”

“음?”

힘겹게 입을 열어 부르자 키시아르가 용케 알아듣고 대답했다.

“죄송, 합니다. 임무 도중 하필… 이런…….”

“아. 혹시나 싶어 말하지만 이 상황이 자네 때문이라 자책하고 있다면 그러지 말게.”

유더를 한 손으로 가볍게 받쳐 품에 안은 키시아르가 걸음을 옮기며 낮게 입을 열었다.

“2성 발현은 누구도 언제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지 않나. 내 보좌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미래를 볼 수 없는 이상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야. 따지고 보면 자네 혼자 위험한 일을 하러 가도록 아무 대책 없이 맡겼던 내 탓도 있겠지.”

아니다. 유더는 예측할 수 있었다. 정확한 날짜까지는 아니어도 나름대로 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던가.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가늘게 숨을 내쉬자 키시아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내가 2성 발현을 하던 날은 어땠는지 아나? 오늘 발현한 자네 상황보다 더 심했어.”

키시아르가 2성 발현을 하던 날. 열에 젖은 머릿속에서 그 말을 반복하여 읊조렸다. 이전 생에서도 자세히 들은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따지고 보면… 모르는 게 그것뿐만은 아니지만…….’

“내가 각성했던 2년 전 어느 날, 나는 펠레타 성에 있는 침실에 누워 있었지. 거긴 혼자 쓰기에는 좀 크지만 나쁘지 않은 곳이라네. 아무튼, 그랬는데 갑자기 각성에 이어 곧장 발현이 이어지지 않겠나? 태어나 처음 겪는 고통과 열기에 깜짝 놀란 나머지 나는 드디어 내가 죽는 날이 왔다고 생각했지.”

미약하게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가 부드럽게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래서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하면…. 나단을 불러 당장 성안의 모두를 데리고 나가라고 난리를 부려 내쫓은 뒤 성에서 가장 높은 서쪽 탑 꼭대기에 올랐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거든.”

“…….”

“전대 주인이 사용한 뒤 보관이라는 이름의 방치 중이었던 신검 오르를 가지고 스스로 죽으려 했어. 신검은 제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이 건드리면 아주 큰 벌을 내리거든.”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뼈가 부서질 듯 엄습하던 고통마저 일시적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유더는 망토에 가린 제 표정이 키시아르에게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키시아르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유더의 몸이 굳어도 계속해서 이어져 나갔다.

“하지만… 보다시피 죽지 않았지. 게다가 이렇듯 마병단 단장까지 되었고 말이야. 삶이란 건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네. 그렇지 않나? 오늘 일어난 나쁜 일로 인해 내일 갑자기 행복해질 수도 있는 것이지.”

그래서, 당신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유더는 문득 그렇게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열에 들떠 몽롱한 머릿속에서 그 질문은 금세 지워지고 말았다.

“…저기……다! …두… 찾……!”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낯선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더가 몸을 굳히자 키시아르가 진정시키려는 듯 망토 위를 부드럽게 토닥이며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나를 뒤쫓던 카치안의 손발들이 드디어 왔군. 이제부터 자네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대로만 있어 주게.”

“…흐으…….”

대답 대신 뜨거운 숨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갔다. 유더는 몸에서 천천히 힘을 풀고 키시아르의 품속에 그대로 몸을 늘어뜨렸다. 몽롱하고 둔중한 고통이 간헐적으로 찾아들 때마다 여전히 손발이 곱아들 만큼 아팠지만, 그래도 방금 전처럼 앞일이 두렵지는 않았다.

한창 발현 중인 데다 곧 발정까지 닥칠 상황이고, 제가 안겨 있는 게 알파인 키시아르의 품속임을 알면서도 기이할 정도로 평온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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