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펠레타 공작 전하이십니까?”
“그래.”
그들을 향해 다가온 이들의 발소리에서는 비린 철 냄새가 느껴졌다.
“자네들은 누군가?”
“황태자 전하의 명을 받아 온 제국군 황궁치안대입니다. 무탈해 보이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전하. 갑자기 자리를 비우고 한참 돌아오지 않으시어 혹 위험한 무리를 마주치시지는 않으셨을지 황태자 전하께서 크게 걱정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암살 시도가 있었기에…….”
말을 잇던 병사의 시선이 금색 천으로 몸을 둘둘 감싼 유더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품에 안고 계신 것은 대체 무엇이온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라니. 사람이네.”
키시아르가 보란 듯 품에 안은 이를 살짝 추스르자 전신을 감싼 망토 자락 사이로 흰 장갑을 낀 손 한쪽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시체 같은 모습에 깜짝 놀란 병사들의 분위기가 흐트러진 틈을 타 키시아르는 태연히 입을 열었다.
“잠시 애인을 만나러 나간 것뿐이었는데 황태자 전하께 그리 걱정을 끼쳤을 줄 몰랐군. 이것 참. 감사하다 인사를 드려야겠어.”
순간 병사들은 늘어져 있던 흰 장갑이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아… 그러니까, 그… 분이 공작 전하의……?”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리는 또 다른 병사를 향해 키시아르가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비밀 만남이 조금 길어져서 말이네. 다리에 힘이 풀려 내가 옮겨주고 있었지. 다른 이들에게 얼굴을 드러내는 게 부끄럽다기에 감추어 주었는데 참으로 귀엽지 않나?”
병사들은 그제야 키시아르의 머리칼과 예복이 몹시 흐트러져 있음을 깨달았다. 열기 어린 눈가와 다 식지 않은 땀을 머금은 이마가 오해의 여지 없이 음란한 생각을 절로 자극하는 광경이었다.
그가 품에 안고 있는 이의 모습은 망토로 감싸 얼굴을 볼 수 없었으나 병사들은 당연히도 암사슴처럼 작고 가는 귀족 여인을 상상하며 코끝을 씰룩거렸다. 그것이 평범한 이보다 체격이 훨씬 좋고 키가 큰 키시아르와 망토 안에 있는 이가 낀 고급스러운 흰 장갑이 주는 이미지 때문에 일어난 착각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러셨군요.”
그러면 그렇지. 밥보다 노는 걸 더 좋아한다던 그 공작이 사라져 보았자 뭘 한다고. 저를 보는 얼굴들 위로 미처 다 갈무리하지 못한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키시아르는 쭉정이 공작다운 표정으로 달콤한 윙크를 던졌다.
“그러니 자네들도 비밀로 해 주게.”
이 사람이 아직 어리다 보니 부끄럼이 많거든. 꼭 내가 바래다주어야만 돌아간다지 뭔가. 그렇게 속삭인 순간 흰 장갑을 낀 손이 다시 한 번 꿈틀거리며 키시아르의 옷자락을 붙잡을 듯 움직이다가는 도로 축 늘어졌다.
키시아르는 저를 한심한 듯 곁눈질하는 병사들을 뒤로하고 우아하게 델루마 궁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사람의 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걸음을 멈춘 그가 품에 안은 망토 자락을 걷고 안에 있던 이의 얼굴을 드러냈다.
고통에 질려 하얗게 젖어 든 얼굴 위로 몹시 많은 말을 담은 눈동자가 키시아르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협력이라는 게, 이걸 말씀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감쪽같았지. 덕분에 잘 빠져나오지 않았나.”
“…….”
참으로 기가 막혔다. 품에 안긴 채 애인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의 아찔함을 무어라 말할 수 있으랴. 하지만 키시아르의 말대로 그 임기응변 덕분에 여기까지 아무 일 없이 빠져나온 건 맞았으므로 유더는 긴 한숨으로 답을 대신했다.
“…어디까지… 가실 겁니까? 분명 오늘… 황제 폐하와 식사를, 하셔야 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짤막하게 대꾸한 키시아르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델루마 궁 옆에 내가 황자 시절 살던 작은 궁이 있다네. 안면이 있는 시종들이 아직 머물고 있으니 그곳에서 쉬고 있게.”
“그냥, 마병단으로 돌아가는, 쪽이.”
더듬더듬 흘러나온 말이었지만 키시아르는 큰 어려움 없이 유더의 뜻을 알아듣고 대답해 주었다.
“안돼. 그곳에는 현재 발정기가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알파 각성자가 너무 많아. 아직 발현이 다 끝나지도 않은 이를 혼자 돌려보내기보다는 평범한 이들이 많은 여기에서 홀로 쉬는 쪽이 더 낫네.”
유더는 아페토 가에서 구해 온 알파 각성자들을 떠올린 뒤 키시아르의 말을 따르는 쪽이 최선임을 인정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겨우 다시 풀리자 키시아르도 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유더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다 시야가 점차 몽롱해짐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내뿜는 숨이 점차 달게 변하고 있음을 스스로도 알 정도이니 키시아르에게는 더욱 자극이 될 텐데도, 몸을 받쳐 안은 손에는 아직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토록 강인한 인내심을 지닌 존재가 이전 생에서 단숨에 침몰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까지는 그저 발정기가 서로 겹쳤던 이유가 가장 컸으리라 생각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때의 키시아르가 장갑을 늘 끼고 다녔어야 했던 이유와도 상관이 있었을지 모르지…….’
거기까지 생각한 뒤 깜박 정신이 흐려졌다. 갑자기 폐부를 찌르는 고통에 소스라치며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낯선 궁 앞에 도착한 뒤였다.
“흣…… 으….”
“이런. 깨어났나.”
“전하, 넘겨주십시오. 저희가 책임을 지고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곁에 서 있던 나이 든 시종 두 사람이 노심초사하며 목소리를 낮추자 키시아르가 조심스럽게 유더를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유더. 들리나? 이곳이 아까 말한 그 궁이네. 내가 식사를 하고 돌아올 때까지만 버티고 있게. 최대한 금방 돌아올 테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꽉 잠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유더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상체를 비틀며 노력해 보려다, 문득 제 품 안쪽에서 버석거리는 낯선 감촉을 느끼고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아. 레노어의 시체에서 발견했던 편지가…….’
키시아르를 보자마자 먼저 전달했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 생각지 못했다. 목소리는 내지 못해도 그것만은 꺼내줄 수 있을 듯했으므로 유더는 힘겹게 손을 움직여 제 옷 안주머니를 뒤졌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꿈틀대는 유더 때문에 시종들이 놀라든 말든 필사적으로 편지를 쥐고 끄집어내자 키시아르가 묘한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건…….”
유더의 손에서 편지를 가져간 키시아르가 봉투를 거침없이 열어보고는 내부를 빠르게 훑었다.
“레노어 샨 아페토의 편지인가.”
독이 아직 묻어 있을지 몰라 조금 걱정스러워졌으나 고위 사제급만한 신성력을 지닌 사내이니 그 정도에 당하지는 않겠거니 싶었다. 유더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남은 의식을 그러모아 입을 열었다.
“…잔, 을, 나른… 이는, 이미… 처리되었, 습니다. 그건, 시체……에서…. ……보고가… 늦어, 죄송…….”
말을 다 끝내기 전에 또다시 몸이 축 늘어졌다. 깜짝 놀라 허둥대는 시종들을 손을 들어 진정시킨 뒤 편지를 순식간에 모두 읽은 키시아르가 작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 위로 기막혀하는 감정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참…… 기가 막히군.”
“…어찌할까요, 전하. 이제 안으로 모시고 가면 되겠습니까?”
“그러게. 아, 데려다 둘 곳은 가장 위층에 있는 침실이다. 너희 둘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절대 안으로 들이지 말고.”
가장 위층에 있는 침실이란 말에 시종 두 사람의 시선이 저절로 마주쳤다.
“그곳은 전하께서 머무시던…….”
“그래. 그러니 가장 안전하지 않나.”
씁쓸한 미소를 띤 채 어둠 속에 묻힌 작은 궁을 올려다본 키시아르가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침대 주변의 벽을 둘러 둬. 발현이 일어났을 뿐이지 죽을병에 걸린 건 아니니 옷을 갈아입히고 땀을 닦아주면 충분할 터. 혹 아직 그곳에 정화석이 남아 있다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찾아 가져다 두고.”
“알겠습니다.”
시종들에게 들린 유더가 궁 안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한 뒤 키시아르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레노어의 서신을 든 채 델루마 궁으로 돌아가는 그의 눈빛은 어느덧 잘 벼린 검처럼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전하. 델루마 궁을 나가셨다는 소식에 폐하께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다면 부디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델루마 궁에 가까워지자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낸 시종 한 명이 자연스럽게 뒤를 따르며 말을 속삭였다.
“과연 폐하시군. 궁 내에서 일어난 일은 모르는 것이 없으시니.”
케일루사 황제는 스스로 궁 밖을 나서지 않는 대신 곳곳에 제 눈과 귀를 대신할 이들을 두었다. 이 시종이 나왔다는 사실은 곧 케일루사 황제가 이미 레노어의 사망 소식과 카치안의 암살미수 사건까지 모두 전달받았으며, 그에 대해 키시아르의 움직임을 돕기로 결정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궁을 나선 이유는 별일 아니니 그 건은 되었네. 다만, 이것.”
키시아르는 방금 제가 내용을 확인했던 레노어의 편지를 시종에게 건넸다.
“이 안의 내용을 보니 지금쯤 황태자 전하께서 몹시 찾고 계실 물건 같더군. 내가 홀로 돌아간 후 때를 보아 자연스럽게 이것을 황태자의 시종에게 전달하라. 2층 홀에서 청소를 하다 떨어져 있는 걸 찾아내었다 말하면 적당히 믿겠지.”
“알겠습니다.”
시종은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곧바로 공손히 절을 한 뒤 키시아르의 곁을 떠났다.
홀로 남겨진 키시아르는 홀로 돌아가기 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유리창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예복과 머리칼을 정돈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예복 소맷자락에 코를 묻자 아직도 진하게 밴 향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