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붉은 돌이라면……. 잠깐만. 그게 황궁이 아니라 여기에 있었다고?”
“그래.”
“지하에 있던 그 힘이 그러면……. 하. 맙소사. 이런 정신 나간….”
한 마디만으로도 안색이 크게 변해 무어라 중얼거리며 정보를 추리해 나가던 이논이 기가 막힌 얼굴로 유더를 돌아보았다. 유더는 그가 더 묻기 전에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그보다 옆의 칸나를 살펴 줘.”
“내가 네놈 부모라도 되는 줄 알아? 이래라저래라 시키지 마. 지금 중요한 건 네놈들이 대체 아래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붉은 돌에 능력을 썼다가 갑자기 기절했어. 겉으로는 이상이 보이지 않지만 너라면 뭔가 알지도 모르니까 일단 먼저 살펴 줘. 부탁할게.”
“……그걸 왜 지금 말해?”
가지가지 하는구나. 무어라 욕을 삼킨 이논이 칸나가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몸을 돌리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멀쩡해. 저 마법사들처럼 탈진 상태도 아니고. 기운이 좀 흔들리긴 했지만 너 정도는 아니야. 본래 가진 힘이 적은 녀석이 순간적으로 무리하게 힘을 썼다가 버티지 못하는 경우 흔하게 나타나는 편이니.”
“그러면… 아무튼 큰 문제가 생긴 건 아니란 거지.”
“그래.”
짤막한 대꾸를 들으며 유더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겨우 조금 안도가 되었다.
“칸나가 깨어날 듯하면 곧바로 알려 줘. 그리고… 루산 사제님을 불러줄 수 있을까.”
“왜. 신성력이 필요한 부상을 입기라도 했어? 그런 게 아니면 그냥 나한테 말해. 저 녀석은 지금 마법사 놈들 치료만으로도 바쁘니까.”
유더는 잠시 침묵하다 오른손에 낀 장갑을 벗었다.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한번에 보여주는 편이 나을 터였다.
“…뭐야, 그건?”
그리고 드러난 손을 본 이논은 예상대로 몹시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멍인가?”
“아니…….”
문제는 대답해 주어야 할 유더 또한 몹시 놀랐다는 것이었다. 어깨만큼 번지지는 않았더라도 당연히 눈에 띄게 올라와 있을 줄 알았던 자줏빛 반점이 예상보다 너무나 작았다. 고작 엄지손가락만 한 정도의 면적밖에 차지하고 있지 않은 반점을 보며 눈을 깜박이다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폈으나 그래도 상태는 똑같았다.
“이건 이전에… 붉은 돌에서 나온 기운을 실수로 맞은 이후 생긴 거야. 힘을 쓰면 위로 번져 올라왔다가 신성력을 맞으면 줄어들어.”
“뭐라고?”
“사실 아까 나가기 전 이걸 보여주려고 했었는데…….”
“잠깐. 됐으니까 손 좀 가까이 줘 봐.”
이논이 유더의 손을 잡아채 얼굴 가까이 가져가 살폈다. 손바닥을 위아래로 휙휙 뒤집으며 꼼꼼히 살피는 그의 눈동자는 몹시 진지하였으나, 한참 뒤 손을 놓고 고개를 든 표정에서 속 시원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주는 아닌데.”
당연히 아닐 터다. 붉은 돌의 힘을 맞고 생긴 데다, 저주였다면 그와 키시아르도 충분히 알아보았을 테니까. 유더는 이논의 심각하게 가라앉은 눈을 보며 지하실로 향하기 전 묻고 싶었던 질문을 드디어 입에 담았다.
“나는 어쩌면 이게 그… 네가 말했던 기운이 흔들린다는 소리의 원인이 아닐까 생각했었어.”
“네 말이 사실이라면야 가능성은 충분히 있겠지….”
자연스럽게 말을 받아 중얼거리던 이논이 문득 고개를 번쩍 들고 다시 한 번 유더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그런데 너. 그러고 보니 아까 나갈 때보다는 상태가 오히려 좀 나아졌는데?”
“나아졌다고?”
아리송해진 이논의 표정만큼이나 유더 또한 이 상황이 의문스러운 건 똑같았다.
‘역시 붉은 돌에서 나온 힘을 붙잡을 수 있었던 일과 관련된 건가.’
생각에 잠긴 유더를 보며 이논이 머리를 긁적였다.
“모르겠다, 정말. 네놈은 하나같이 다 의문뿐이니. 일단 루산을 데려올 테니 그게 진짜로 신성력에 사라지는지 보자고.”
그러고 나서 그는 큰 소리로 루산을 불렀다.
“루산! 잠깐 이쪽으로 와.”
“예? 여기 노마법사님께 신성력을 아직 다 못 넣어드렸는데요.”
“탈진 정도는 가만히 둬도 밥 잘 먹고, 화장실 잘 가면 나아! 그쪽보다 이쪽이 먼저야.”
지나치게 거칠고 노골적인 말에 타이스 율만이 무어라 하지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었으나, 다행히 노마법사는 의료부에 도착하자마자 기절하듯 잠든 상태였다. 잠시 후 돌을 깎아 만든 성표를 손에 두르고 나타난 루산이 이논과 유더를 향하여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분은 멀쩡하시지 않나요? 왜…….”
“안 멀쩡해. 여기로 와서, 이놈 손에 신성력 좀 부어 봐.”
“손이요? 다치셨나요?”
루산의 시선이 유더의 손등으로 내려왔다. 그는 멍처럼 보이는 작은 반점을 보고 이내 몹시 의아해졌으나, 그 정도는 신성력을 조금만 쓰면 되리라 여기고 이내 힘을 사용했다.
소리 없이 뿜어져 나온 밝고 따뜻한 빛이 루산의 손에서 유더의 손 위로 가루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잠시 후 빛을 흡수한 손등의 반점이 아주 느리게 줄어들며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당연한 결과로 보였으나 루산과 이논의 표정은 동시에 심각해졌다.
“…어? 멍인 줄 알았는데……. 뭐죠? 잘 안 되네요.”
가벼운 멍이나 상처 정도는 빛이 조금 닿자마자 곧바로 싹 사라져야 정상인데 유더의 손등에 있는 반점은 거의 뼈가 조각난 이를 고칠 정도의 신성력을 붓고 나서야 가장자리에서부터 조금씩 사라져 갔다. 심지어는 아주 작은 점이 된 이후에는 아무리 해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아서, 루산은 순간적으로 제 신성력에 문제가 생겼나 의심하고 말았다.
“거기까지만 해 주셔도 됩니다, 사제님.”
“아니에요. 이 정도는 당연히 낫게 해드릴 수 있는데… 어어……? 왜 안 되지?”
유더는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젊은 사제를 향해 약간 미안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다른 곳에서 신성력으로 치료를 받았을 때도 거기까지가 한계였습니다.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더군요.”
“아니, 제가 신성력 하나로는 어디서도 밑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요. 조금만 더 해 볼게요. 잠깐만요.”
“됐다, 됐어. 그만해. 그러다 네 쪽이 쓰러져.”
이논이 루산을 말리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신성력도 모든 곳에 다 통하는 건 아니잖아. 고집을 부리지 않고 냉정하게 판단하는 게 고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야.”
“그건 그렇기는 하지만요…….”
말끝을 흐리는 루산의 눈빛에 서린 의아한 기색은 끝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저주…는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어쩌다 그런 증상이 생기신 건지 물어보아도 될까요, 유더님?”
“그건 너와 내가 알아낼 일이지. 이 녀석도 잘 모른다니까 일단 일이나 다 끝내고 다시 알아보자고.”
유더가 입을 열기 전, 이논이 루산의 등을 밀었다. 루산은 반드시 유더의 반점을 고칠 방법을 찾아내겠다는 의지를 보인 뒤 다시 마법사들을 돌보러 몸을 돌렸다. 유더는 루산이 입은 사제복 자락이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고마워, 이논.”
“너 좋으라고 한 일 아니야.”
여전히 솔직하지 못한 대꾸를 내뱉은 이논이 찌푸린 얼굴로 유더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네가 왔다던 곳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어? 그 이상한 반점도 알고 있었다면 미리 피할 수 있었던 것 아냐?”
“글쎄…….”
유더는 꿈속에서 보았던 키시아르의 초췌한 얼굴을 떠올리며 무심코 대답했다.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나와 관련된 부분이 아니라 몰랐어.”
“호. 그래.”
“그리고 반점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니까.”
“신성력을 물처럼 부어넣어도 안 사라지는 반점이 큰 문제가 아니면 대체 뭔데? 보통 인간은 몸에 그런 게 생기면 죽을 듯 절망한다고. 아무리 아프지 않은 반점이라 해도…….”
“아프지 않은 건 아니야.”
“그럼 더 큰 문제 아니야?”
이논이 심히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유더는 반드시 답을 듣고 싶어 하는 듯한 감정이 엿보이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반점 따위가 생겼다 해서 힘을 못 쓰는 것도 아니고, 죽지도 않아. 목적을 이루는 데도 문제없어. 그러면 된 거라고 생각하는데.”
반점이 번질 때 좀 고통스럽기는 하다지만, 그것도 이전 생에서 겪었던 수많은 부상과 고문에 비하면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극히 냉정한 판단이었다.
“목적이라면, 네놈 대장 지키는 거?”
“그래.”
그리고 이논도, 그 외의 다른 사람들과 세계도. 뒷말은 삼키고 짧게 답했으나 안에 담긴 심정만은 잘 전달되었는지 이논의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그게 진심이라면 답은 두 가지겠지.”
“…….”
“미래에 그자가 정말로 중요한 사람이 되거나, 혹은 네가 너네 대장과 죽도록 사랑하는 사이였거나. 아니면 둘 다거나. 어느 쪽이야?”
유더는 순간 곧장 입을 열지 못했다. 전자는 합리적 추론이라지만 후자는 대체 어떻게 그런 방향으로 생각이 튀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랑이라니.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쪽과는 달라.”
“다르긴 뭐가. 말을 할 때 네놈 표정부터가…….”
“아일 경. 아직 깨어 계십니까?”
그 순간 문이 열리며 들어선 나단 주커만 때문에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미간을 찡그린 이논이 물러났고, 유더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환자들을 의료부로 데려다 놓은 뒤 키시아르가 있는 지하로 다시 내려갔었던 나단은 손에 낯선 종이 몇 장을 쥐고 있었다.
“사제님께 치료는 받으셨습니까.”
“받았습니다.”
“다행이군요. 공작님께서 그것부터 먼저 물어보고 오기를 원하셨습니다.”
“…단장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홀로 지하에 남았던 키시아르는 거기서 무엇을 했을까. 과거로 돌아온 뒤 처음으로 가장 많이 지쳐 보였던 얼굴을 떠올리며 묻자 나단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유더의 침상 주변 커튼을 치고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섰다.
“안을 살피신 뒤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시고 단원들을 진정시키러 가셨습니다.”
이논은 건물이 흔들렸다고 말했다. 그도 느낀 흔들림을 안에 있던 다른 단원들이 느끼지 못했을 리 없으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바깥에 상당히 난리가 난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