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가진 힘을 다 들켰으니 슬슬 말해 줄 때도 된 듯 하여 불렀는데, 그리 충격을 받을 줄 알았다면 좀 나중에 말할 걸 그랬군.”
“예?”
멍하니 충격에 잠겨 있던 통에 키시아르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유더가 뒤늦게 작게 대꾸하자 키시아르가 낮게 웃었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어린아이에게 못된 짓을 한 것 같지 않나.”
“못된…….”
무심코 그의 말을 따라 읊조리던 유더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몸이 좋지 않으시다면서 아직 그런 농담을 할 기운이 있으십니까?”
“으음. 좋아. 이제야 좀 눈빛이 돌아왔군.”
그래야 유더 아일답지. 태연하게 대답한 키시아르가 만족스럽게 눈을 내리깔았다.
“괜찮네. 진짜 문제는 내 쪽이 아니야. 굳이 이 일을 지금 말하는 이유는 어제 이루어 낸 성과를 통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게 하나 더 있기 때문이네.”
“그게 무엇입니까.”
“황제 폐하께서 몇 년째 태양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는 이유.”
황제의 건강과 관련된 이야기는 어느 때에든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가장 극비 사항이다. 유더는 대체 키시아르가 오늘 어디까지 제게 이야기할 셈인지 의문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알고 있듯 황제 폐하께서는 건강에 이상이 생기신 지 꽤 되었지.”
“병환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 하지만 태양궁에서 일전 마주쳤던 폐하께서 과연 정말로 아무 곳에도 나오지 못하실 만큼 심각해 보이시던가?”
유더는 일전 태양궁에서 알현했던 케일루사 황제를 떠올렸다. 안경을 쓴 예민한 학자 같은 인상의 젊은 황제는 굳이 말하자면 병색이 어느 정도 엿보이기는 했어도 궁 내에서 열린 파티에조차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몹시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때 특이하다 여겼던 점은 황제가 일을 도울 신하나 시종들조차 같은 장소 내에 들이지 않고 오직 한 곳에서 침식과 일을 해내고 있는 듯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눈에 보이는 병증은 없으나 밖으로 나오기를 꺼릴 건강이상 증세. 여태껏 키시아르가 던져 준 힌트 같은 대화들. 유더는 생각에 잠겨 있던 눈을 들어 키시아르의 붉은 눈을 마주했다.
“…지나친 억측이라면 죄송합니다만, 그 이유가 혹 방금 말씀하신 ‘그릇’ 때문이라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정답.”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부드러운 칭찬이 돌아왔다.
“폐하의 그릇은 현재 금이 간 상태야. 아직까지는 움직임을 최대한 자제하여 생명력이 누출되는 일을 막아 왔으나, 고칠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점차 빠르게 쇠약해지다 한계를 맞이하게 되시겠지. 한번 금이 가기 시작한 이후 과거의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해 계시다 이해하면 되겠군.”
“그렇다는 말씀은…….”
“그래. 우리는 붉은 돌의 힘이 폐하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한 답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여기고 있네. 정확히는, 내가 더.”
그제야 유더의 머릿속에서 붉은 돌 회수부터 현재까지 보인 황제와 키시아르의 행동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그렇군.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던 키시아르가 붉은 돌의 힘으로 각성한 이후 나아졌으니, 그걸 회수하여 연구하면 치료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 여긴 건가.’
아마 이전 생에도 그들은 같은 선택을 했을 터다. 이후 일어난 일은 지금과는 달랐겠지만.
황제의 치료법을 찾을 목적으로 붉은 돌을 회수하던 중 오히려 키시아르의 그릇이 도로 크게 상하게 되었다면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때도 지금처럼 돌의 힘을 분리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추측되지만 케일루사 황제는 금세 죽었고, 키시아르 또한 극도로 쇠약해진 끝에 암살로 생을 끝마쳤다.
‘그렇다는 건 분리된 돌의 힘으로 이전 생에서는 황제와 키시아르를 다시 고치지 못했다는 뜻인가?’
아니면 그 연구를 수행했을 진주탑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키시아르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포기하시려 했던 폐하를 설득하고, 준비하여 여기까지 오는 데 이만한 시간이 걸렸네. 그릇에 문제가 본격적으로 생긴 뒤 돌이킬 수 없게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사람마다 다르다지만 2년은 꽤 길었어. 내 경우 한계가 왔다고 판단될 때까지 5년 정도가 걸렸으나, 폐하께서는 나보다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짧으실 가능성이 높아.”
키시아르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졌다.
“나는 어제 실험이 끝난 후 폐하께서 주신 1달의 시간을 마무리하는 서신을 보냈네.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 다시 나누겠지만 일단 폐하께서 낸 시험에서 통과했다 생각하면 될 것 같군.”
몸이 좋지 않아 아직까지도 누워 있는 와중에 그런 일을 했단 말인가? 유더의 시선을 알아챈 듯 말을 이어나가던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난감한 미소가 살짝 비쳤다.
“약속은 약속 아닌가. 아무리 몸이 안 좋아져도 해야 할 일은 하고 누워야지. 무모하기 짝이 없는 내 보좌에 비하면 나는 내 몸이 귀한 줄은 잘 알고 있으니, 너무 그렇게 보지는 말게.”
“…저는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습니다만.”
유더는 슬쩍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바깥에 계신 율만 님께서 들으면 기뻐하실 소식이군요.”
“그래. 그의 발상이 이번 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우기는 했지. 하마터면 그 좋은 발상을 지니고도 자칫 잘못했다면 우리 모두 큰일을 겪을 뻔했지만 말이네.”
“…….”
“사실은 이전에 이 실험 계획을 타이스 율만이 중간 보고로 보내주었을 때부터 폐하께 말씀을 드리고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네. 폐하께서는 만약 실험이 예정대로 성공할 시 앞으로 붉은 돌과 관련된 연구의 모든 우선권을 내가 원하는 대로 맡기겠다 말씀하셨지. 그리고 오늘 새벽 보내주신 답장에서 약조를 지키겠다 하시더군.”
“다행이군요.”
“그래. 자네가 처음 마차 안에서 내게 붉은 돌을 폐하께 그냥 보내 드리기에는 아깝지 않느냐고 말했던 때만 해도… 솔직히 이런 결과가 될 줄은 몰랐었지.”
키시아르의 말에 유더는 반사적으로 칸나를 떠올렸다. 그는 그때 키시아르에게 말했던 대로 칸나가 다시 한 번 붉은 돌에 제대로 접촉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를 생각하자 마음이 또다시 무거워졌다.
“칸나가 아직 일어나지 않아… 조금 걱정이 됩니다.”
“나단이 전하기로 의원과 사제는 몸에 큰 이상이 생긴 건 아니라 평했다고 들었네만.”
“말은 그렇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때 좀 더 신중을 기했더라면…….”
“신중을 더 기했더라도 일어난 결과가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수도 있지. 자네는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 그때 폭발하려 했던 붉은 돌의 힘을 멈추게 한 것 또한 자네인데, 그렇게 따지면 오히려 제대로 단원을 보호하지 못한 내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칸나 완드가 깨어났을 때 원망할 상대는 오히려 내 쪽이 맞겠지.”
유더는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단장님께 그런 의도로 말씀을 드리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알아.”
키시아르의 답은 위로처럼 부드러웠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하루 정도만 더 기다려 보게. 그래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깨워줄 테니.”
다른 이가 말했다면 대책 없는 답이라 생각했을 말이, 키시아르가 언급하자 이상하게도 거대한 힘을 지닌 예언처럼 느껴졌다. 유더는 줄곧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풀리는 것을 느끼며 제가 생각보다 훨씬 이 일에 긴장한 상태였음을 자각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때 붉은 돌의 힘을 멈추게 했던 건 자네도 알 수 없는 사이 일어난 일이라 말했었다지.”
유더는 어젯밤 나단과 나눈 대화를 생각하며 “네.” 하고 대답했다.
“그때 나는 자네가 낀 장갑 속에서 붉은 돌의 기운과 비슷한 붉은 빛이 새어나오는 걸 보았네. 두 개의 빛은 마치 서로 연결된 듯 보이기도 했지. 자네는 그것을 어떻게 느꼈나?”
“연결… 같은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유더는 나단 주커만에게 자세히 말하지 않았던 그때의 기억을 새삼 돌이켜 보며 느릿느릿 말을 이어나갔다.
“워낙 다급했던 상황이라 폭발을 앞두고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에 갑자기 그 빛을 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뻗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그렇게 되었더군요.”
“아무 일도 없어서 정말 다행이었지.”
“네.”
“아니, 자네 말이야.”
모두에게 다행이었다는 뜻인 줄 알고 대답했더니, 키시아르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정정해 왔다. 또 무모한 일을 저질렀다고 무어라 말할 줄 알았으나, 그는 이후 잠시 침묵을 지켰다.
몇 초의 정적이 지난 후 그가 내뱉은 말은 예상과 전혀 다른 뜻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네가 아니었다면 모두가 다쳤겠지.”
유더는 슬쩍 바닥을 향해 내리깔았던 시선을 도로 들었다. 키시아르가 눈썹을 슬쩍 누그러뜨린 채 웃고 있었다.
“잘 했네.”
“칭찬을…… 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얼떨떨하게 대답하자 키시아르가 고개를 저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내 단원들이 목숨을 잃을 만큼 위험한 일에 나서지 않기를 바라네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지 않나. 자네가 아니었다면 겉잡을 수 없이 일이 커졌을 거야.”
잘 한 건 잘 했다고 해야지. 중얼거리는 키시아르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울렁대며 뛰었다.
유더가 평소처럼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자 갑자기 조금 더 눈썹을 찌푸린 그가 손을 뻗어 유더의 머리를 슥 흐트러뜨렸다. 깜짝 놀라 눈을 몇 번 깜박이는 동안 그 손은 귓가를 스치고는 이내 원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뭐지?’
머리칼에 먼지라도 묻어 있었던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키시아르가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는 갑작스레 중얼거렸다.
“너무 방심하고 있지 말게.”
“예?”
“평소 빈틈없던 이가 뜻밖의 반응을 보이면 나도 모르게 더 손대고 싶어지는 병이 생긴 것 같거든.”
“…….”
울렁거림은 금세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