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아페토 1공자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물고기가 미끼를 물고 찾아왔다는 말에 키시아르의 눈빛이 변했다.
“그래……. 때를 잘 맞춰 왔군. 레블린에게는 그가 왔다는 사실을 전했나?”
“네. 오기 직전 전달했습니다. 부르시는 즉시 올 수 있도록 숙소 내에서 대기하고 있겠다 말씀하시더군요.”
아페토 가의 막내, 3공자 레블린은 임시단원 신분으로 자유롭게 단 내에서 생활 중이었으나 제 본분을 잊지 않았다. 키시아르는 에이셰스가 언제고 단으로 한 번은 찾아오리라 예상하고 이미 레블린에게 언질을 해 둔 상태였다.
“좋아. 아마 부를 일까지는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키시아르는 이내 마병단으로 향했다.
아페토 1공자 에이셰스 샨 아페토는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망토를 두르고 하인 한 명만을 대동한 채 찾아왔다. 손님용 응접실 안에서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기다리고 있던 청년은 훈련복 차림으로 나단과 유더를 대동한 채 들어선 키시아르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리 갑작스레 찾아뵙게 된 점 죄송합니다, 전하. 가문의 시선을 피해 찾아오느라 미리 연락을 드리기 어려웠습니다.”
“괜찮네. 나야말로 훈련 도중이라 손님을 이런 차림으로 맞이하게 되어 미안하군. 올라가도록 하지.”
유더는 그들의 뒤를 따르며 에이셰스의 얼굴을 은밀히 살폈다. 다른 형제들과 얼굴 생김은 생각보다 닮지 않았지만 눈에 띄는 금빛 눈동자와 예민해 보이는 인상이 한눈에 같은 혈통을 느끼게 했다.
그가 보낸 편지는 일전에 보았고, 이야기도 많이 들었지만 직접 모습을 본 건 이전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저자가 바로 1공자 에이셰스……. 과연 병약해 보이는군. 데려온 하인이 꽤 강해 보이는데… 각성자는 아닌 듯하니 기사를 변장시켜 데려왔나.’
키시아르에게 얕보이지 않으려는 듯 애써 당당히 계단을 오르고는 있으나 갈수록 거칠어지는 호흡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어깨에 두른 값비싼 망토의 무게조차 이기기 힘들어 보이는 귀족 청년에게서 눈을 뗀 유더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우선… 저희 아페토가 레노어의 시체를 자체적으로 조사한 결과 그날 장례식에서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 하셨던 말씀에 틀림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정보를 드리고 싶습니다.”
마침내 단장실에 도착한 뒤 에이셰스는 이전보다 훨씬 지친 기색으로 물 한 컵을 비운 뒤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사실 레노어가 그렇게 되기 전, 광휘궁에서 제가 머무는 저택과 아페토 본저에 따로 수확철 축제를 기념한 선물을 보내주셨었죠. 비밀리에 보내온 선물이라 저와 아버님은 서로가 그런 선물을 받은 사실을 몰랐습니다.”
황태자가 머무는 광휘궁에서 보내온 선물 속에는 주변이 어떻든 상관없이 앞으로 좋은 관계를 도모하고 싶다는 뜻을 은밀히 비유하는 시와 몸을 보하는 값비싼 약재가 들어 있었다.
에이셰스는 당연히 그 선물이 황태자의 이름을 빌려 디아카 가에서 보낸 물건이라 여겼다. 그쪽에서 경쟁자인 레노어보다 에이셰스의 가능성을 더 크게 쳐 주고 있다면 당연히 손을 잡아야 마땅할 일이었다.
아페토 공작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다. 다만 그의 경우는 아페토 가에 얽힌 재판에 추후 디아카 가에서 큰 도움을 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는 작은 차이만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레노어의 장례식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레노어를 죽인 이가 당초의 예상대로 키시아르였다면 황태자와 디아카 가의 손을 잡고서 황제 쪽을 압박하여 재판을 유리하게 끌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키시아르 본인이 레노어의 장례식에 나타나서는 몹시 극적인 방식으로 그를 죽인 이가 제가 아니며 진짜 범인은 자신을 모함했던 황태자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하고 말았다.
장례식에 방문했던 이들의 입이 바람보다 가벼웠기에 소문은 금세 퍼졌다. 일부는 그래도 키시아르가 범인이리라 생각했으나, 다수는 황태자가 디아카 가와 손잡고 아페토를 농락했다고 여겼다.
아페토 공작 또한 그렇게 생각했기에 당연히 불처럼 분노했다. 레노어의 시체를 회수하여 몇 번을 조사해도 키시아르의 말이 옳다는 사실만 증명된 데다, 진상을 확인하려 연락한 황태자 쪽에서는 아니라는 말만 할 뿐 이렇다 할 확실한 증거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디아카 가 쪽에서 이 일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 말했다지만 아페토 공작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물론 레노어 그놈이 죽어주어서 재판에는 조금 유리해질지 모르지! 하지만 그 어린 황태자 놈이 아페토를 그토록 우습게 보았다는 사실을 나는 용납할 수가 없다! 감히 디아카 가 놈들이 우리를 황제와 대놓고 싸움을 붙이려 작당질을 해? 그게 아니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는 게지.’
아페토 공작은 황태자 책봉이 끝난 이래 디아카 가가 나머지 공작가들을 우습게 여기는 꼴을 두고 보아서는 안 된다며 줄곧 강경하게 비판해 왔던 인물이었다. 이번 재판 때 디아카가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잠시 누그러졌던 마음은 장례식 사건 이후 순식간에 더욱 단단하게 얼어붙었다.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보았기에 이따위 짓을.’
이성적으로 판단하자면 이런 일이 일어났더라도 디아카 가나 황태자와 협력하는 쪽이 옳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황태자가 레노어를 지나치게 잔혹하고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독살하였으며, 이후에도 태연하게 아페토 가에 연락하며 줄곧 홀로 친목을 도모할 기회를 살펴 왔다는 사실이 그렇지 않아도 불같은 아페토 공작의 성정에 괘씸죄를 더했다.
황태자 책봉을 두고 일어났던 물밑 전쟁에서 이미 몇 년 전 충분히 상했던 감정이 다시 한 번 크게 상했으니 더 볼 것도 없었다. 아페토 공작은 이 문제가 곧 가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 단언했다.
‘신뢰의 근간이 뒤흔들렸는데 어찌 그들의 말을 믿어준단 말이냐? 아페토는 이번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보다 최대한 손해를 줄이는 쪽으로 움직이도록 한다. 괜히 치열하게 싸워 힘을 빼면 디아카 쪽만 좋은 일이 되겠지! 미래를 위해서는 힘을 보전하는 쪽이 우선이야.’
1공자 에이셰스는 가문의 후계자로서 아페토 공작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가문이 힘을 보전하기 위하여 이번 재판에서 강하게 대적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때야말로 그가 아버지를 몰아내기 위한 가장 좋은 기회라고도 여겼다.
레노어의 장례식 이후 아페토 공작가 내부에서는 이번 일을 계기로 가문의 분위기를 쇄신하면서 몸도 마음도 건강한 방계 출신 후계자를 양자로 들이자는 의견이 나오는 중이었다.
몸이 약한 에이셰스와 집을 나가버린 레블린만으로는 후계 자리를 안정시킬 수 없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말이 방계이지 사실은 아페토 공작의 사생아를 올리려 공작이 손을 썼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후계자 자리가 공고해졌다 판단하여 기분이 좋았던 에이셰스는 그 움직임이 몹시 불쾌했다. 아페토 공작이 자식 중 누구에게도 애정이 없는 건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이미 후계가 정해진 바나 다름없는 상황에서마저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결국 이번 재판 건을 계기로 서로를 쳐내려 한 건 쌍방 마찬가지였던 셈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결정도 한층 빨라졌다.
쓸데없이 약한 몸은 언제나 그의 발목을 잡았다. 비교적 몸이 멀쩡할 때 최대한 빨리 공작 자리를 차지해야만 한다는 초조감이 들었다. 그때 머리에 떠오른 것이 바로 장례식날 보았던 건강한 모습의 레블린과 그의 곁에 서 있던 펠레타 공작이었다.
‘어차피 그와 손을 잡는 건 처음부터 고려했던 일이니까.’
에이셰스는 위와 같은 상황을 간략하게 키시아르에게 돌려 전달했다.
“아버님께서는 이번 일로 많은 충격을 받아 판단능력이 전보다 몹시 떨어지셨습니다. 제 몸을 지나치게 걱정하시며 이상한 말씀을 하시곤 하니 자식으로서 무척 안타까운 일이지요. 하여 저는 이전에 드렸던 편지를 공작 전하께서 아직 잊지 않으셨다면 이번 일에 작은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1공자는 정말 효심이 깊군.”
키시아르가 부드럽게 웃었다. 에이셰스는 저도 모르게 순간 그 미소에 홀려 멍해졌다가는 미간을 찡그리며 정신을 차렸다. 과연 저 쭉정이 공작은 외모 하나만은 정말 대단한 자였다.
“그 뜻은 충분히 고맙게 받아들이겠네. 자네를 다시 보니 장례식 날이 다시 떠오르는군. 황제 폐하께서도 그때 일어난 일에 많은 우려를 표하셨지. 디아카 공작이 폐하께 연락을 넣어 이 사건으로 거짓된 소문이 재확산되고 있으니 언급을 중단시켜 달라 청하였음에도 거절하고 듣지 않으실 정도로.”
“그 일은 이미 아페토에서도 전해 들었습니다.”
에이셰스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더는 그사이 그런 일도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분께서 침묵이 망각과 가장 가까운 형제라는 옛말을 여기에 적용시킬 셈이라면 저는 아니라 말할 겁니다. 아페토의 자존심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도 명예를 훼손당하셨는데 이 일을 어찌 그냥 땅에 묻겠습니까?”
“1공자의 현명함이라면 분명 그러한 결론을 내리리라 생각했네. 그 뜻을 의심하지는 않아.”
아무래도 우리는 줄곧 좋은 관계로 지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드는군. 키시아르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옆으로 뻗자 나단 주커만이 기다렸다는 듯 가져온 작은 상자를 손 위에 정중히 올렸다. 유더가 어제 보았던 두 개의 상자 중 갈증을 일으키는 독버섯이 든 쪽이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는가?”
“아뇨.”
“광휘궁의 시종이 파티 전날 몰래 들여온 버섯이라네. 말려서 빻아 가루로 만든 뒤 물에 타면 몸에 흡수되어 갈증을 부르는 효능이 있다지.”
키시아르의 말을 들은 에이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군요. 이게 바로 그……. 저희도 원료를 찾으려 했으나 소식이 느려 답답하던 참이었습니다.”
“이것을 오늘의 만남을 기념하여 선물로 주겠네. 받아주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