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뭐라고!”
아페토 가의 대리인들이 아우성을 쳤으나 누구도 이 자리에서 떠날 수 없다는 법관의 선언은 단호했다.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분들을 보호하고 혹여나 관련자가 도주하는 사례를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우리가 여기서 도주라도 할 거란 소리인가! 이 무례한.”
“출신 가문이 어디인가. 아페토를 이리 무시할 정도라면 분명…….”
‘모든 말을 자기들 좋을 대로 바꿔 듣는 능력이 특출하군.’
유더는 한편의 촌극 같은 모습들을 지켜보다 키시아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는 7인의 대재판관 쪽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때마침 요청했던 증거물이 도착했는지 재판관들의 뒤쪽에서 하급 법관들이 바쁘게 끈으로 묶은 종이 뭉치를 날라 왔다.
뒤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법관 중 한 명이 키시아르에게 다가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대재판관님들께서 비공개 증거물의 낭독 건으로 펠레타 공작 전하의 의견을 여쭙고자 이것을 보내셨습니다.”
그의 손에는 둘둘 말린 종이와 펜이 들려 있었다.
“제가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유더는 앞으로 나서서 그것들을 받아들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아무런 문제도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없고, 내용은… 제출된 증거물 중 어떤 부분을 지정해 낭독하기를 원하는지 알려달라는 거군.’
확인을 마치고 키시아르에게 종이를 넘겼다. 그는 빠르게 내용을 읽은 뒤 펜으로 밑부분에 짤막하게 답을 썼다. 답장을 받아 든 법관이 곧 대재판관들 쪽으로 멀어져 갔다.
“어느 부분을 지정했을지 알겠나?”
키시아르가 느긋이 입을 열었다. 유더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 조용히 대답했다.
“저야 그 기록을 다 읽지 못했으니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아페토 가가 이러한 일을 저지른 이유를 밝히기 위하여 요청하신 일이니 그와 관련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맞아.”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은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부드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에이셰스 1공자를 위해 아페토 가의 슬픈 집안사 부분은 최대한 가리고 넘어가려 했으나, 저쪽에서 저리 요청하니 어쩌겠나.”
우리도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진실을 밝혀주는 수밖에. 그 말을 듣고 나자 키시아르가 어떤 부분을 요청했을지 곧바로 감이 왔다.
‘축복받은 피와 관련된 부분이겠군.’
오랫동안 감추어 왔던 치부가 밝혀졌을 때 아페토 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저리 당당하게 계속 날뛰지는 못할 터였다.
상상만으로도 약간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유더는 대재판관들이 과연 그런 비밀스러운 부분을 모두의 앞에서 낭독하도록 허락할지 약간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런 부분이라면 대재판관들께서 수락하지 않겠다 결론을 내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대재판관이 7인으로 구성된 이유는 판결을 내릴 때 다수결로 결정하기 때문이지. 이번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네.”
키시아르가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들어 일곱 명의 대재판관들을 살짝 가리켰다.
“네 명 이상만 찬성한다면 낭독할 수 있는데 저 중 둘은 이번에 아페토에게서 뇌물을 받았고 둘은 받지 않았으나 타 공작가들과 연이 깊은 친귀족파 인물들이야.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은 황제 폐하께서 즉위 직후 직접 임명하신 이들이네.”
“그러면…….”
일곱 중 네 명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데 황제파가 세 명밖에 없다면 나머지 한 명은 어떻게 채운단 말인가? 아무리 질 재판이 아니라지만 불리한 인선이 아닌가. 유더의 찌푸린 눈을 본 키시아르의 입가에 문득 평소보다 조금 서늘한 미소가 어렸다.
“어제, 황제 폐하께 디아카 공작이 비밀 서신을 보냈다더군. 이번 일에 작게나마 도움을 드리고 싶다고 말이야.”
“도움이라면 설마… 친귀족파 대재판관 중에 디아카 공작가와 연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까?”
“없을 수가 없지.”
키시아르의 붉은 눈동자가 대재판관들의 면면을 훑었다.
“이 나라 어디에든 그들의 손이 뻗쳐 있으니.”
디아카 공작이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연락을 했을 리 없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가라앉은 얼굴을 보며 그 뜻을 추측했다.
‘디아카 공작이 이번 재판에 도움을 주는 대신 황태자가 저지른 사건을 덮으려 하는 건가?’
실로 영악하기 그지없었다. 이번 대재판관들의 성향을 미리 파악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제안이었다.
“폐하께서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셨습니까.”
“아니.”
짤막하게 대꾸한 키시아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쪽에서는 개의치 않겠지.”
그야 그럴 것이다. 도움을 거절했다 해도 일단 주고 나서 큰소리를 쳐도 되는 사안이라 생각할 테니까. 생각에 잠긴 유더를 향해 키시아르가 눈을 돌렸다. 그는 방금 전과 달리 조금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그들이 정말 도움을 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네. 왜냐하면 아페토 가와 연결된 재판관 2인 중 하나는 에이셰스 1공자에게서 돈을 받은 자거든.”
‘…에이셰스 샨 아페토?’
심각하게 돌아가던 머릿속이 잠시 멈추었다. 유더는 침묵을 지키며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잠깐. 7인의 대재판관 중 황제파가 셋, 디아카 가 측 사람이 적어도 하나, 그리고 에이셰스 1공자 측 사람이 하나. 그렇다면…….’
다수결로 이길 수 있는 넷은 가뿐하게 넘는다.
‘이걸 미리 생각해 두고 아페토 측에서 결정적으로 시비를 걸어 증거물을 밝힐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 때까지 계속 참았던 건가.’
과연 키시아르였다. 연기력과 인내심을 발휘해 원하는 목표를 얻어오는 방법으로는 따를 자가 없었다. 유더는 작게 숨을 내쉬며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단장님께서는 최대한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배려하셨습니다. 낭독 허락이 떨어진다 해도 에이셰스 1공자께서는 아마 이해하실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키시아르가 짐짓 안타까운 척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단장과 보좌가 꿍꿍이를 가득 집어먹은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동안 마침내 서로 의견을 나누던 대재판관들이 결론을 내렸는지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토론 결과,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 요청하신 건에 대해 대재판관 7인 중 6인이 동의하였습니다. 곧 지정된 부분을 법관이 낭독하도록 하겠습니다.”
“말도 안 되오!”
“6인이라니? 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아페토 가 측에서 충격을 받은 이들이 속출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법관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흥분과 호기심에 가득한 방청객들의 시선 앞에서 종이를 들고 안에 적힌 글을 읽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점점 더 병이 깊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태어날 때부터 그러했으나 이제는 정말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약도 신력도 듣지 않고, 마법으로도 고칠 수 없는 이 괴질은 오래도록 우리 아페토의 영광스러우며 슬픈 역사를 증명해 왔다.”
그가 읽은 부분은 벨트레일이 일기 형식으로 작성한 기록 중 일부였다. 직접적으로 아페토의 축복받은 피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수도의 귀족들이라면 대개 아페토 공작가에서 대대로 허약한 이들이 많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음알음 알고 있었다.
모두가 숨을 삼키는 가운데 아페토 측 대리인 중 한 명이 황급히 그를 제지하기 위해 뛰쳐나왔다.
“안 되오! 아페토에서는 이런 일을 동의하지 않았다! 당장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신성한 법정에서 무슨 행패인가! 끌고 나가라.”
“안 돼!”
아페토 가의 사람이 고함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으나 그를 붙잡은 병사들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그 틈을 타 법관이 아래 부분을 마저 읽었다.
“살아날 답을 찾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지 못하랴. 악마가 된다 하여도 좋다. 살기 위해 태어난 이상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답을 얻고 싶다. 1공자는 각성자의 힘 따위로는 아무런 답을 얻지 못할 것이라 말했으나, 2공자는 나를 믿어주었다. 그와 함께 기필코 이 연구의 끝을 보리라……. 이상입니다.”
“…….”
안 된다는 고함을 지르는 아페토 측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이들이 함부로 입조차 열지 못했다.
“…그런 이유였다니.”
방청석에 앉은 누군가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만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사람들이 일제히 소란스러워지자 붙잡혀 있던 아페토 가의 대리인 외에도 다른 대리인들이 일제히 달려 나와 항의를 시작했다. 아페토 가 측에서는 이 정보 공개를 동의하지 않았다는 말, 무조건 거짓말이라는 말 등이 어지럽게 메아리쳤다.
유더는 그 중 가장 나이든 자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앞에 놓인 책상을 두드리며 지르는 고함에 눈길을 돌렸다.
“어쨌든 그건 2공자와 벨트레일 님의 문제가 아니오! 아페토 공작 전하는 아무 관련이 없소! 그분을 이런 불명예스러운 일에 끼어들게 하지 말란 말이오!”
“관련이 없다. 과연 그러한가?”
키시아르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자 아페토 가 측 대리인들의 핏발 선 시선이 돌아왔다.
“죽은 레노어 2공자가 벨트레일을 도왔다 해도, 과연 공작의 묵인과 도움 없이 이 모든 일이 가능했으리라 생각하는가?”
“증거도 없이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증거라. 물론 제출하고 말고.”
“예? 무, 무슨.”
당황한 이들이 말을 삼키든 말든 키시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증인들의 곁에 묵묵히 서 있던 나단 주커만이 다가와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 바쳤다.
“이것은 벨트레일 샨 아페토의 끔찍한 연구를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페토 공작이 직접 인장을 찍은 문건이다.”
순간 유더는 제국 법정 전체가 들썩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고함을 들었다.
“이런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거짓입니다! 거짓이야!”
“펠레타 공작의 조작입니다! 가짜가 분명합니다!”
“가짜인지 아닌지는 직접 보면 알 터.”
키시아르가 우아하게 손을 틀어 대재판관들을 향해 종이를 내밀었다.
“마지막 증거를 제출하겠다.”
‘끝났군.’
유더는 혼란과 좌절에 빠져 날뛰는 아페토 측 사람들과 웅성대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모든 것이 끝났음을 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