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막연한 걱정을 겉으로 드러내 보았자 돌아오는 건 위험뿐이다. 걱정된다 하여 굳이 매일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으니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을 뿐인데 그 모습이 아무래도 상당히 냉정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유더는 아마도 그 냉정한 인상에 크게 한몫했을 제 얼굴을 떠올리며 턱 아래를 슬쩍 문질렀다.
“단장님의 말씀만 들었을 때에는 그 주기라는 게 금방 끝날 일이라 짐작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상보다 너무 긴 것 아닙니까.”
“확실히 이번이 길기는 하지요.”
나단 주커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직까지 최장 기간을 갱신하지는 않았습니다.”
“최장 기간이 얼마였습니까.”
“1달입니다. 2년 전이었지요.”
2년 전. 키시아르가 각성했던 때와 비슷한 시기였다. 이야기만 들었을 뿐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그 시절의 키시아르. 막연히 떠올려 보려 해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유더는 되도 않는 노력을 포기하고 고개를 들었다. 나단 주커만은 여전히 반듯한 자세로 앉아 앞을 보는 중이었다.
“주기는 몸이 좋지 않으실수록 길어지는 겁니까?”
“아뇨. 그렇다기보다는…….”
말끝을 흐린 나단 주커만의 눈빛이 문득 어두워졌다.
“힘의 발산이 잘 되지 않을 때 길어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발산이라면….”
유더의 머릿속에서 키시아르가 보여주었던 작은 물약이 떠올랐다.
“그걸 위해 물약을 드신 것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들었습니다만… 혹 약을 마셔도 특별히 발산이 잘 될 때와 안 될 때가 생깁니까?”
나단 주커만은 그 말에는 곧바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유더가 그의 답을 듣기를 포기해야 하나 싶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을 때에야 낮은 목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그건…….”
“이런. 벌써 와 있었군.”
그때, 안쪽 복도의 기운이 울렁이더니 키시아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에는 잘 억눌러 두었던 기운을 멀리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내뿜고 있는 사내는 오늘도 전신을 감싼 흰 단복 차림이었다. 유더는 곧장 씻고 나온 듯 물기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평소에도 지나치게 눈을 끄는 외모였지만 오늘은 물기와 나른함이 뒤섞여서인지 그 파괴력이 한층 더했다.
“오셨습니까.”
나단 주커만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했다. 유더 또한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 나자 키시아르의 시선이 책상 쪽으로 향했다. 분류된 채 쌓인 서신과 쟁반 위의 초콜릿 더미, 그리고 한 잔뿐인 차를 훑은 붉은 눈동자가 유더의 얼굴로 돌아왔다.
“둘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
“아일 경이 궁금한 것이 있다고 하여 잠시 대화 중이었습니다.”
“나 없는 사이 많이 친해진 모양이야. 조금 질투가 나려 하는데, 나단.”
“…….”
대체 이 삭막함 속 어디에 질투를 한다는 걸까. 유더는 나단 주커만의 침묵 속에서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읽어냈다.
“내가 잠든 사이 급히 확인할 만한 일은 없었고?”
“없었습니다. 순차적으로 확인하실 일은 저쪽에 가져다 두었으니 확인하시면 됩니다.”
나단 주커만은 키시아르의 부관으로서 그의 영지인 펠레타 쪽과 관련된 연락 업무를 주로 맡고 있었으나 그게 다는 아니었다. 펠레타 기사단 일을 비롯해 키시아르가 없을 때 온갖 루트를 통해 들어오는 비밀 연락을 받아 가지고 오는 모습을 보노라면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하며 시중까지 드는지 감탄이 들 따름이었다.
‘그 외에도 뭔가 더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천천히 책상 쪽으로 다가와 위에 놓인 종이 더미들을 훑은 키시아르가 맨 위에 놓인 말린 두루마리를 펴 보고는 문득 손끝을 멈칫 굳혔다.
“벨트레일 샨 아페토가 위독하다는군.”
“그분이라면 레지엥 탑에 갇혀 계시지 않았습니까.”
“누군가 음식에 독을 탄 모양이야. 오늘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니 어쩌면 이미 먼 길을 떠났을지도 모르겠는데.”
아페토 가에서 수많은 이들이 죗값을 치르는 동안, 당연히 가장 큰 죄인인 벨트레일 또한 심판을 받았다. 그는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15년간 감옥에 갇히는 벌을 선고받아 귀족 범죄자들이 주로 갇히는 레지엥 탑으로 가게 되었다.
사실 황제파 법관들은 그를 제국 끄트머리의 가장 구석진 땅에 가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신이 온전치 않은 이에게 너무 과도한 벌이라는 아페토 가 측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수도 내에 있는 레지엥 탑으로 가는 대신 재산 몰수로 합의를 보았다고 들었다.
그의 처벌 결과는 이번 아페토 가를 둘러싼 모든 일을 종식시키는 가장 큰 기준이 되었다. 황제와 키시아르의 승리를 만천하에 알리는 결과였다.
그 재판에 키시아르는 직접 참석하지 않았으나, 유더는 그 결과를 보고 돌아온 하르탄 사람들과 피해를 입었던 각성자들, 그리고 데브란이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두 눈으로 보았다. 벨트레일의 재판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모든 한과 분이 풀린 듯 고향으로 다시 떠난 그들의 면면이 떠올랐다.
키시아르에게 폐를 더 끼칠 수 없다며 밤중에 조용히 인사를 하고 떠나던 이들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동정의 여지조차 없이 잘된 일이다. 그러나 유더는 그 다음도 생각해야 했다. 그는 키시아르의 곁으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밝혀졌습니까?”
“증거는 당연히 없어. 하지만 정황상으로는 에이셰스 샨 아페토겠지.”
에이셰스라. 이제 가문을 장악해 나가고 있는 그라면 충분히 벨트레일을 제거하고 싶었을 만도 했다. 그가 살아있어 보았자 앞으로의 아페토 가에 득이 될 일은 전혀 없었을 테니 말이다.
“1공자께서 본격적으로 나서고 계신가 보군요.”
“그래. 아페토 공작 쪽이 방어를 하려 하고는 있지만 공작이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니 한동안은 어렵겠지. 둘 중 어느 쪽이 이기게 될지 조금 궁금하군.”
그렇게 말하는 키시아르는 어제보다 한결 상태가 나아 보였다. 어제는 아예 유더가 일을 끝낼 때쯤에야 나왔었으니 비교할 수도 없기는 했다.
유더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말을 받아넘겼다.
“두 분 중 어느 쪽이 이기시더라도 단장님께서 손해 보실 일은 없으실 겁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고는 있지.”
“그렇게 되실 겁니다.”
누가 이기든 아페토 공작의 미래는 어둡고, 에이셰스는 병약한 몸을 이기지 못할 테니 말이다.
키시아르가 작게 웃었다.
“그 확신은 여전히 미래를 보고 온 것처럼 확고하군.”
유더는 순간 손끝을 멈칫했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게 눈을 내리깔았다.
“뭐… 내 예상으로는 결국 1공자가 이길 거라 예측하고 있네. 그가 새로 공작 자리에 오르면 그 다음은 또 지켜봐야겠지만.”
그렇게 중얼거린 키시아르가 의자에 걸터앉아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나단. 나에게도 차를 하나 내 줘.”
“알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키시아르가 고개를 저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유더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한 나단 주커만이 단장실을 나섰다. 키시아르가 유더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요즘 어떤가. 내가 제대로 나가지 못하니 살피기가 어려워.”
“모두 열심히 훈련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아페토 가의 재판 이후 더욱 사기가 높아지기도 했고…….”
유더의 대답에 키시아르가 문득 묘한 표정을 지었다. 유더는 말을 멈추고 눈을 깜박였다.
“…이걸 물은 게 아니십니까?”
“아니. 그것도 궁금하기는 했지. 하지만 내가 물은 건…….”
키시아르가 그런 말을 하는 스스로가 조금 우스운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흘렸다. 붉은 눈동자가 다정하게 휘었다.
“…너에 대해서였는데.”
일순 가슴 속에서 무언가 꽉 조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묘하게 변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유더는 저도 모르게 키시아르의 입술을 바라보았다가는 시선을 내렸다. 웃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어쩐지 조금 어려웠다.
“저는 당연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제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잠깐이었지.”
“…….”
“정말로 잠깐.”
그에게 이끌림을 느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입을 맞춘 뒤 지금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아페토 가와의 첫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자마자 닥쳐온 주기 때문에 제 몸과 또다시 싸우면서도 키시아르는 유더를 볼 때마다 단 한 번도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단 한 가지 바꾼 것이라고는 호칭의 미묘한 변화뿐이었다.
이동 중 스치듯 얼굴을 마주할 때, 혹은 일로 인해 대화를 나눌 때마다 맞닿는 시선의 온도가 따뜻하면서도 뜨거웠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강렬한 이끌림을 무시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시간도, 공간도 그의 앞에서는 그대로 녹아버리는 듯했다.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지금은 더했다. 한 번 보면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아슬아슬한 감각이 지금도 슬그머니 고개를 쳐드는 중이었다.
“오늘 일은 다 끝났나?”
“아뇨. 분류만 막 끝낸 참이었습니다.”
“잘 되었군.”
뭐가 잘 되었다는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유더를 향해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여기 좀 더 오래 있다가 갈 테니까.”
“…제가 여기 오래 있기를 바라십니까?”
“가능하면.”
농담처럼 가벼운 답이었지만 어쩌면 농담이 아닐지도 몰랐다. 유더는 그에게 무슨 답을 해야 좋을지 망설이다 신중히 입을 열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느른한 목소리가 장난스레 반문했다.
“단장님께서 제게 여기서 할 일을 더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유더는 그것이 제법 괜찮은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평소보다 진득한 열기를 띤 붉은 눈동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웃음을 터트린 키시아르가 이내 고개를 기울이며 말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