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아일 경. 왜 여기 서 계십니까?”
칸나가 훈련을 위해 먼저 내려가겠다며 더욱 빠른 걸음으로 사라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단 주커만이 반대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손에 낯익은 상자를 하나 들고 있는 상태였다.
“일은 다 끝내실 시간인 줄 알았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서 있던 위치가 단장실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중앙이라 혹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의문이 생긴 모양이었다.
“아뇨. 이제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잠시 보고할 것이 있어 온 칸나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하지만 손에 들고 계신 건 단장님께 온 편지가 아닙니까.”
유더는 그제야 제가 키시아르의 책상 위에 올려두려던 편지들을 아직도 손에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아, 네. 이것만 돌려두고 돌아가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제게 주십시오. 어차피 저는 지금 들어가던 참이었으니까요.”
“네. 다만 그 전에 드릴 말씀도 하나 있습니다.”
유더는 나단에게 편지를 건네며 칸나가 해 준 이야기를 함께 전달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들은 뒤 키시아르에게 곧장 보고하겠다고 답했다.
“새삼스럽습니다만 각성자의 능력이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무리 해도 저희 펠레타 기사단이 알아낼 수 없었던 정보를 이리 쉽게 얻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건 칸나가 해낸 일이니 감사 인사는 칸나에게 해 주십시오.”
칸나가 받아야 할 감사 인사가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지 않도록 돌린 뒤, 유더는 나단을 향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펠레타 기사단 쪽에서도 그간 그들을 쫓고 있었다면, 다른 수확은 있으셨습니까?”
“추적은 계속 진행 중입니다만… 아직까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확실하지 않더라도 진행되는 상황은 더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 신중한 기사는 유더에게 거기까지 이야기해 주려 하지는 않으리라.
‘아쉽군. 키시아르 쪽도 뭔가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말하지 않는 편이니 그냥 내 쪽에서 따로 알아보는 수밖에 없나.’
키시아르는 여태까지 추적이 필요한 임무들을 마병단이 아니라 펠레타 기사단 쪽에 쭉 배분해 왔다. 마병단원들의 경험이 아직 덜 쌓인 상태이니만큼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그 때문에 정보력이 뒤떨어지는 건 조금 아쉬웠다.
‘내 밑에 둘 수 있는 5인의 임명권을 그쪽으로 고려해 지정하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겠어. 어차피 언젠가는 마병단 내에도 그런 임무만 전담하는 이들을 뽑아야 할 테니까…….’
유더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임명권을 떠올리며 그러고 보니 이논을 그 안에 두어도 되는지 아직 키시아르에게 묻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건 주기가 지나가고 나서 물어봐야겠지.’
키시아르를 생각하니 마치 당연한 듯 문 위에 남아 있던 다섯 개의 손가락 자국이 뒤이어 떠올랐다.
그건 정말 그날 그가 남긴 손자국이었을까. 다시 올라가 확실하게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고 아니기도 한 이상한 마음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그런 마음으로 무심코 단장실 문 쪽을 흘긋 올려다보았더니 무언가 티가 났는지 나단 주커만이 멈칫하며 입을 열었다.
“아일 경. 혹 위에서 뭔가 더 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없습니다. 다만…….”
서둘러 부정하고 나니 갑자기 나단 주커만이 손에 쥔 상자가 또다시 눈에 들어왔다. 유더는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주커만 경이 든 그 상자를 전에도 본 듯해서 말입니다.”
“아. 네. 맞습니다. 이전에 궁중마법사청에서 가져왔던 물건과 동일합니다.”
나단이 상자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혹시나 하여 물었던 게 맞았던 모양이었다.
‘그때 가져왔던 물약을 또 가져왔다고? 왜지?’
“한 번만 드시면 되는 물건이 아니었습니까?”
“보통은 그렇습니다만…….”
나단 주커만이 말끝을 흐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주변을 살피듯 호흡을 가다듬은 뒤 목소리를 낮추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주기가 끝나기 전 발정기가 겹쳐 다가올 듯하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여 혹시나 싶어 추가로 조제를 부탁해 가져온 겁니다.”
‘발정기?’
당황스러운 단어에 순간 가슴이 뛰었다.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진지하다 못해 걱정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보고 나서야 겨우 놀랐던 머릿속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 본래는 지금 시기쯤 내가 2성 발현을 했었던 것 같으니 같은 시기에 발정기가 겹쳤던 키시아르가 지금 그렇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군.’
이전 생에서 몇몇 일들이 크게 변했고, 또 어떤 일들은 전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기는 하다지만 큰 틀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키시아르의 발정기 또한 다가올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이전과 달리 키시아르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힘을 발산하느라 주기가 길어지고 있는 도중에 찾아온 발정기라니. 두 시기가 겹쳤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이 되지 않으니 나단 주커만이 걱정하는 이유도 납득이 되었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겠죠.”
“네. 공작님께서 각성하신 이후 주기가 찾아온 게 두 번밖에 되지 않았으니 처음입니다.”
“…염려되시겠군요.”
“솔직히 말해 그렇습니다.”
나단 주커만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자연스러운 방식인가 하는 방식 말고 본래 하시던 대로 빨리 끝내버리실 생각은 없으시다고 합니까?”
애초에 자연스러운 방식이란 것과 아닌 방식의 차이도 잘 모르겠지만 위험요소를 늘리는 일보다는 나을 듯해 말해 보았다. 그러나 나단 주커만은 씁쓸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일 경도 공작님의 성정을 아시지 않습니까. 한 번 결정하신 일을 이 정도로 무르실 분이 아닙니다.”
‘하기는 그렇지.’
“두 시기가 겹쳐도 크게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거라 주장하시지만 저는 각성자가 아니니 잘 모르겠더군요. 아일 경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각성자들의 발정기나 변화요소에 대해서는 저보다 더 잘 아시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질문의 방향이 유더에게 향했다. 그러나 유더라 해도 그 답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경우, 발현과 발정기가 동시에 찾아왔어도 괜찮았으니 단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면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대답을 하고 나니 문득 오메가 발현자인 제가 키시아르의 근처에서 계속 일을 해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망설임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정말 발정기가 다가오신다면 아무래도 저는 한동안 위쪽으로 가지 않는 편이 좋겠군요. 오메가 발현자인 제가 근처에 있으면 아무래도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공작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은 없었습니다만…….”
“‘향’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들어는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아시겠군요. 가까이 있으면 아무래도 안 좋을 겁니다.”
“공작님께서 다른 각성자들의 향에 별다른 영향을 받으신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래도 아일 경의 말대로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죠. 알겠습니다. 저도 그 부분을 고려해 주변을 좀 더 살피겠습니다.”
‘없다고? 그럴 리가.’
유더는 그의 발현 때 발정기로 인한 향이 완전히 사그라지기 전까지 키시아르가 그를 멀리 두고 대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가까이 다가오지 않으려 마도구까지 사용해 물건을 전달하지 않았었던가.
‘아무래도 내밀한 부분이니 그렇게까지 자세히는 나단 주커만에게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겠지.’
그런 부분을 제 입으로 말하기도 무엇했기에 유더는 대충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 칸나의 이야기를 전해 주신 뒤 제게 주실 말씀은 다른 부단장들과 같이 서신으로 내려보내 달라 말씀 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현재 서부로 가실 준비를 거의 아일 경이 전담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나단의 말대로 유더는 현재 키시아르의 뜻에 따라 서부로 내려갈 마병단원들의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키시아르가 마병단을 어떻게 나누고 어떻게 이동시킬지 전달하면 유더가 그것을 부단장들과 함께 의논해 실제로 적용하는 것뿐이었지만 일단 길을 떠나고 나면 최고 책임자가 그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키시아르가 직접 함께 가지 못할 가능성이 높으니 역시 그렇게 되겠지.’
이전 생에도 키시아르는 서부에 처음부터 함께 가지 않았다. 자리를 비운 그 대신 그때도 유더와 다른 부단장들이 함께 단원들을 통솔해 길을 떠났었다.
그때는 모두가 죽음을 향해 끌려가는 듯 불안해했지만 이번에는 다르리라.
“감사합니다.”
유더는 인사를 한 뒤 돌아서서 내려갔다.
다음 일정은 타이스 율만과 알릭 펠긴의 새로운 연구실에 방문해 연구 진행 상황을 살피는 일이었다.
“오, 왔군. 오늘은 평소보다 늦었어.”
“연구 계획은 어떠십니까.”
“뭐, 아직까지는 어제와 다를 바 없지.”
타이스 율만이 바구니 안에 쌓여 있는 검은 매개체들을 돌아보며 흐흐 웃었다. 그는 현재 매개체 안에 담겨 이전과 달리 위험한 영향을 끼치지 않게 된 붉은 돌의 힘을 자유자재로 꺼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힘이 인간의 몸에 끼치는 변화를 관찰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내가 마법사라 그런지 이 안에 든 힘들을 잘 꺼내기가 영 힘들어. 그래도 제자 놈이 각성을 해주어 얼마나 다행인가. 변화를 관찰하는 부분 쪽은 제법 잘 진행되고 있거든.”
노마법사는 제가 관찰하며 적은 기록과 일지를 열성적으로 떠들었으나 어려운 마법 용어가 너무나 많이 섞인 탓에 유더는 그의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자네 몸을 같이 관찰할 수 있다면 속도가 더 빨라질 듯도 한데… 그건 영 허락해 주시질 않는단 말이야.”
누가 허락해 주지 않는지는 뻔했다. 노마법사는 지하실에서 일어날 뻔한 힘의 폭주를 유더가 막아낸 이후 계속해서 그를 연구하고 싶어 시시때때로 입맛을 다시고는 했다. 유더 또한 제게 일어난 일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으므로 가능하면 그에게 협력할 의사가 있었지만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키시아르가 허가하지 않았다.
혀를 한 번 차며 탐난다는 듯 유더를 훑은 노마법사는 이내 아쉬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