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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22화 (222/805)

222화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할 수 있겠나.’

솔직히 말하자면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해야만 했다.

키시아르는 유더가 입을 열 때까지 저대로 밤을 새워서라도 앉아 있을 기세였다. 유더는 침묵을 지킬수록 날카롭게 벼려진 칼로 찔려 비트는 듯한 감각이 한계에 달했을 때에야 겨우 메마른 입술을 움직여 목소리를 냈다.

‘통하지 않았습니다.’

‘힘이?’

키시아르가 생략된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유더는 그의 시선을 피해 머리를 돌렸다.

‘……네.’

‘하나도?’

‘검으로 벨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키시아르는 말이 없었다. 기가 막혔을 터다. 그간 제가 지닌 힘에 그토록 자신만만해했던 자가 정작 현장에서 가장 쓸모없는 쓰레기로 드러나다니, 누구라도 우습다 못해 허탈해졌겠지. 유더는 제가 그간 들었던 말들 중 일부를 어렵지 않게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너만 믿다 몇 명이 다쳤는지 알기나 해?

아무 힘도 못 쓰는 저 녀석이 부단장이라고? 이제 어떤 낯짝으로 마병단에 있을 거야? 계속 남아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설마?

…그토록 잘난 체하며 오더니. 꼴 좋다!

‘…….’

다시금 뱃속이 울렁거렸기에 떠올리는 건 그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침묵 끝에 흘러나올 말을 기다리기보다 그냥 제가 먼저 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날이 밝는 대로 현장에서 물러나고 부단장 직위에서 내려가겠습니다. 추가로 무슨 벌을 주시든 받겠습니다.’

‘직위를 반납하고 물러나겠다고?’

키시아르가 느리게 반문했다.

‘왜?’

버석버석 메말라 날아가기 직전의 모래 같은 목소리가 껄끄럽게 귓속을 긁어댔다. 유더는 이를 악물고 그의 시선을 계속해서 피하며 중얼거렸다.

‘제 힘이 통하지 않아 미처 대비하지 못한 탓에 부상을 입은 인원수가 열이 넘으니까요. 당연히 벌을 받고 책임져야 합니다.’

‘네 힘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예상할 수 있었던 이는 아무도 없었어. 그렇게 따지자면 널 보낸 내가 책임지고 벌을 받는 쪽이 맞겠지.’

아무도 납득하지 않을 말 따윈 그만둬. 단장이 그런 말을 한다 해서 누가 납득하겠는가!

목 끝까지 튀어나올 뻔했던 거친 목소리를 겨우 삼켰다.

‘……그냥 저를 벌해 주십시오.’

‘이미 양팔이 잘려나가기 직전까지 다친 이에게 무슨 수로, 어떤 벌을?’

무슨 벌을 받을지까지 제 입으로 말하란 말인가? 유더는 찌푸린 눈을 감은 채 한숨을 삼켰다.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모두 보는 앞에서 매질을 하시든 퇴단을 시키시든 해 주십시오.’

그 정도는 해야 분노에 찬 목소리들이 겨우 가라앉으리라. 후임은 다른 단원들에게 인망이 높은 가케인인가 했던 자나 이번에 쭉 공을 세운 에버 벡 같은 이로 충분하겠지.

퇴단까지 간다면 여기서 홀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겠지만… 뭐 어떤가. 지금이라면 그래도 상관없을 듯했다. 팔로 짐을 못 들면 입으로 물고라도 가면 되는 문제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 편이 눈앞의 남자에게도 더 나은 결말이 될지도 몰랐다.

단둘이 남겨질 때마다 찾아드는 이 지독한 껄끄러움과 참을 수 없이 이상한 분위기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을 테니 불가항력으로 부하를 범하고 말았다는 어두운 기억쯤은 금방 잊겠지…….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유더 아일?’

‘네.’

‘이쪽을 보고 말해.’

서늘한 목소리가 명을 내렸다. 유더는 저항하듯 내리깔았던 시선을 질질 끌어당겨 겨우 키시아르 쪽으로 옮겼다. 날카롭게 날이 선 새빨간 시선이 웃음기 하나 없이 그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나약하다 말하든, 뭐가 되었든 분명 화를 내거나 쓴소리를 내뱉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제일 먼저 각성한 각성자라 해도 고작 2년 차밖에 안 된 시대다.’

‘…….’

‘누구도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 닿는지, 어떤 한계가 존재하는지 완전히 알지 못해. 심지어 나조차도 내 능력의 약점을 아직 모르지.’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키시아르가 조용히, 그러나 무겁게 말을 이었다.

‘너는 그저 그걸 다른 이들보다 빨리 알게 되었을 뿐이야. 그리 생각하면 운이 좋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이번 전투에서 발생한 부상자 11명. 그중 사제가 필요할 만큼 크게 다친 자는 너 하나뿐이다.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마지막까지 검을 들고 홀로 항전하며 시간을 끌어주었기 때문에 후발대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고 들었어. 내 말이 틀린가?’

‘…….’

유더는 또다시 이를 악물었다.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능력이 아예 모든 것에 통하지 않게 된 건 아닐 것 아닌가. 다른 대상에게는 여전히 통하는지 확인해 보았나?’

모르겠다. 정신없는 전투가 끝난 뒤 치료받고 쉴 곳을 구하는 일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 그런 걸 확인해 볼 틈이 없었다. 그나마도 근처에 신전이 없어 겨우 이 헛간 하나를 빌리는 데 그치지 않았던가.

느리게 고개를 젓자 키시아르가 한숨을 내쉬고는 바닥을 뒤덮듯 깔려 있던 지푸라기를 한 줌 집어 들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는가 싶어 보기만 하자 그가 조용히 명을 내렸다.

‘여기에 불을 붙여 봐.’

‘예?’

‘작은 불이면 충분하니까.’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처음 느끼는 상반된 감정이 혼란스러워 망설이자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괜찮으니까, 어서.’

그래. 실패한다 해도 어차피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눈앞의 상대와는 이미 최악의 모습까지 서로 보아버린 참이니 더 잃을 것도 없었다.

이끌리듯이 자포자기하여 힘을 발휘하자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일시에 불꽃이 훅 일었다. 키시아르가 든 지푸라기 위로 작고 새빨간 불이 옮겨붙었다.

너무나 쉽게 만들어진 불꽃을 보며 키시아르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처음 눈을 뜨고 마주했던 때와는 무언가 다른 미소였다.

‘할 수 있잖아.’

순식간에 재가 되어 쌓인 지푸라기 뭉치를 내려다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유더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후 흰 장갑 위로 쌓인 재를 내려다보던 키시아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유더 아일.’

‘……네.’

‘숙제를 하나 내주지. 그것을 해결하면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고, 네 직위 또한 그대로 유지되는 것으로 한다.’

‘무슨 숙제… 말씀입니까.’

‘이 재를 눈에서 보이지 않도록 치우는 방법을 열 가지 찾아내.’

그 말과 동시에 키시아르는 손바닥을 뒤집었다. 수수께끼 같은 목소리가 바닥에 쌓이는 검은 재 위로 내려앉았다.

‘단, 몸으로 치우는 직접적인 방법은 모두 제외하고 온전히 네 ‘힘’만으로.’

‘그게 무슨…….’

‘이게 네 벌이다. 다른 건 필요 없어.’

그리고 다가온 손이 어리둥절해하는 눈 위를 덮은 순간, 어둠이 도사리던 몸을 펼치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

“…….”

또다시 눈을 뜬 유더는 익숙한 마병단 숙소 천장을 보고서야 겨우 방금 전이 이전 생의 꿈이었음을 깨달았다. 욱신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일어나 앉자 아직 검은 어둠이 내린 창밖이 희미하게 보였다.

다시 눈을 감아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았기에 그는 일어나 물을 마셨다. 꿈에서 마셨던 물과 그리 다를 바 없을 텐데도 어딘지 모르게 입맛이 썼다.

‘별 꿈을 다 꾸는군.’

곧 서부로 다시 떠날 예정이라 생각해 긴장한 탓일까. 꿈에서 보았던 키시아르의 희미한 얼굴이 뇌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어느 정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편이었다. 워낙 인상적인 경험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제 힘이 이 세계에서 나고 자란 것들 이외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던 때였으니까.

그때 한발 뒤늦게 온 키시아르에게서 낯선 숙제를 받아든 유더는 며칠이 지났을 때 비로소 그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 그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때까지 했던 방식처럼 직접 불태우거나 꿰뚫어 죽이는 것만 방법이 아님을, 그런 식으로 깨닫도록 했던 것이었다.

몬스터에게 직접적인 힘이 통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놈들은 몸이 으스러지면 어쨌든 죽게 되어 있다. 그리고 유더에게는 제아무리 크고 단단한 놈이라도 곤죽이 되도록 만들 만한 자연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덕분에 그다음 전투에서 유더는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몬스터 수백 마리를 좁은 협곡으로 몰아넣은 뒤 절벽 전체를 무너뜨리며 큰 승리를 거두었다. 서부의 지형 여러 개가 그 때문에 뒤바뀌었고 역사서에 남을 만한 전투라는 평을 받으며 자작위를 받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런 식으로 몇 번 나선 이후 견제가 너무 거세진 탓에 유더는 전투에 직접 참가를 거의 하지 못했지만, 단장이 된 이후로도 그날의 경험은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유더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한 번 쥐었다 펴 보았다. 혼자서 잠을 잘 때는 굳이 장갑을 끼지 않는 탓에 반점이 작게 남은 손등이 고스란히 보였다. 어릴 때부터 온갖 일을 해 온 덕에 자잘한 흉터가 많고 투박한 손끝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문득 꿈에서 보았던 붕대 두른 손이 위로 겹쳐졌다.

‘그러고 보면 그 부상… 이제 와 생각하면 정말 심각했군.’

지금까지는 굳이 떠올린 적이 없어 몰랐지만 꿈에서 다시 보니 새삼 후유증이 남지 않은 게 신기할 만큼 상태가 중했다. 제 능력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몬스터에게 입은 부상인 데다, 키시아르가 오기 전까지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붕대만 감아 방치했으니 뒤늦게 치료해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그리 깨끗이 나았을까?

이후 만난 신전에서 치료를 잘 해 주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들은 키시아르가 다른 지역에서 조달해 온 성수를 마병단원들에게 써 주는 일조차 꺼려 했었다.

‘그때는… 처음 입었던 부상이라 그냥 내가 남들보다 회복이 빠른 편이라고만 생각했었던 것 같은데.’

이후에 단장이 된 이후 몬스터를 처리하면서 비슷한 이유로 입었던 부상들은 다른 이유로 생긴 부상들보다 훨씬 늦게 나았고 흉도 쉽게 지지 않았다.

“…….”

유더는 문득 멈칫 어깨를 굳혔다.

‘설마?’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아는 정보가 하나 있다. 키시아르가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잘 나은 이유가 우연이 아니라면 짐작 갈 만한 부분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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